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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원 Oct 28. 2024

좋아했던 그녀가 결혼을 한다.

이런 건 책에서도 나오지 않는데 어떡해야 하지?


평온했던 일상을 깨어버린 메시지


  가을비가 내리던 날. 직장동료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지인과 점심을 먹고선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하려던 찰나였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메시지 하나. 전여자친구로부터 결혼을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확히는 전여자친구가 본인과 내가 포함되어 있는 구성원이 4명뿐인 단체대화방에서 소식을 알려왔다.


  전여자친구와 나의 관계는 이미 '행복하기를 바랄 수밖에'에서 밝혔듯이 10년을 대학선후배와 오빠 동생으로 지내다 연인으로 발전했었고, 알고 지낸 기간에 비해서는 다소 짧은 연애를 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탓에 장시간 우려낸 찻잎처럼 진한여운을 남겼고, 나는 오래 우려낸 ‘차’ 특유의 씁쓸함을 긴 시간 동안 음미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연애 이전의 사이로 되돌아갔다.


  단체대화방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척을 하였지만, 오프라인에서의 내 감정은 정반대였다. 분명히 다 잊었을 것이라 여겨왔고 이제는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더 이상 아주 자그마한 여지도 허락되지 않을 끝판왕을 마주하니 기분이 오묘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난 분노감에 사로잡혀서 드라마처럼 결혼식 당일에 ‘깽판’을 친다거나 헤어숍 원장님의 손길로 한껏 멋 부린 다음에 고급외제차를 타고 결혼식장에 찾아가 "나는 너보다 잘 살아!"라고 질러버릴 생각도 없다. 그저 완벽히 잊었다고 생각했던 나의 미련했던 생각들에 스스로 돌을 던질 뿐이었다.



잊을 수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잊다「동사」 「1」 한번 알았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해 내지 못하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정의한 '잊다'의 의미를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일상을 살아가다 내가 알았던 혹은 경험했던 기억들을 아무리 노력해도 떠올릴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가령 어릴 적 힘들게 외웠던 아주 사소한 영단어를 성인이 되어서 어쩌다 마주했을 때의 느낌처럼 나 스스로 일말의 기억도 연상되지 않을 때나 '잊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을 '잊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며,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는 나의 행동처럼 마우스 몇 번의 클릭으로 손쉽게 '삭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나의 관점에서 보면 단시간 내에 사랑의 감정들을 완벽히 잊었다는 건 그만큼 보잘것없는 사랑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숨-기다 「동사」 「1」 감추어 보이지 않게 하다.

  물론, "전여자친구를 잊었다", "추억을 잊었다?" 등의 표현이 일반적이지만 나는 오늘에서야 '숨기다'라는 표현이 더 잘 맞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전여자친구와의 기억을 잊어왔던 것이 아니라 숨겨왔었다. 전여자친구에 대한 나의 감정을 지인들에게 감추었었고 전여자친구에게는 나의 감정을 봉인하고선 묶어놓은 매듭을 더욱 옥죄었다. 잊었던 것이 아닌 숨겨 왔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파일을 삭제하였지만 휴지통으로 이동한 것뿐이었고, 휴지통을 비우지 못해 지운건 맞지만 완전히 지우지 못한 아이러니한 상황

  감정을 숨겨왔다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아이러니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나의 생각에 공감할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 누구나 소중했던 인연을 마우스클릭 몇 번으로 삭제하고선 곧장 휴지통까지 비워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일을 삭제하고 나서도 몇 날 며칠을 휴지통에서 머무르게 하듯 사랑이라는 감정도 휴지통에서 복원될 날을 희망하며 '의도적인 숨김' 혹은 의도적인 '지연 삭제'의 상태에 놓아두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어? 축하해야지.


  새롭게 ‘사랑’이라는 파일이 만들어질 예정이라 스스로 지워내거나, 실수로 다른 파일들과 함께 비워지는 등 휴지통에서도 내 감정들은 결국엔 완전히 지워지겠지만, 파일 하나하나의 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 과거의 파일들이 모여 현재의 나를 만들어 냈기에 그 가치는 충분하고, 그래서인지 소중한 감정들을 깨우치게 해 준 전여자친구가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다.


  좋아했던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결혼을 한다고 한다. 이 감정을 어떻게 글로 풀어써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도 잘 된 일이고 축하해야 한다. 나로서는 이 축하가 내 감정들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휴지통 비우기를 통해 '완전히 삭제' 해야 하는 '끝의 순간‘이라고 생각된다. 결혼식까지 반년정도의 시간이 남았지만 완전히 삭제하기 전에 그 누구보다도 진심이 가득 담긴 축하를 전하고 싶다.


"잘살아! 너라서 어김없이 행복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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