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낙원의 귀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이 말은 아랍 속담에서 나왔고 독일 영화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가 자신의 영화에 제목으로 붙여 유명해진 말이다. 2020년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가 팬데믹(pandemic, 세계적 대유행)에 접어 들었다고 선언했다. 3월 21일 현재, 전세계 누적 감염자 수가 27만 명을 넘었다. 유럽 각국은 유럽연합 내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는 솅겐조약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출입을 막거나 국경을 폐쇄했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스페인 정부는 시민들에게 외출금지령을 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도 3월 13일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18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이 전시 대통령이라고 발표할 정도다. 21세기는 사람과 자본과 상품이 전세계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세계화의 시대가 틀림없다. 그런데 호흡기를 침범하는 바이러스 때문에 순식간에 물자와 사람의 교류가 중단되고,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람들의 일상도 변했다. 타인과 허물 없이 가지던 친밀한 접촉은 바이러스 전파의 가능성을 높인다. 나도 거의 한 달 넘게 외부 모임을 전혀 가지지 않으며 번잡한 곳에 가지 않는 등, ‘사회적 거리 두기’에 동참하고 있다. 또, 코로나19가 중국에서 발원했다는 이유로 동양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도 점점 번지고 있다. 전세계 사람들의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확실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이런 시기에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작 <레트로토피아>를 읽었다. 레트로(Retro)는 과거를 회고한다는 뜻으로, 복고풍 스타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온라인 탑골’이나 방송 프로그램 <슈가맨>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가수 양준일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유토피아가 미래의 이상향이라면, 레트로토피아는 과거에 존재했던 이상향을 따른다. 이 경향은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불안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레트로토피아는 각자도생, 부족주의, 불평등 및 자아로의 회귀를 동반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화려한 번영 이면에 숨어 있던 레트로토피아를 낯낯이 드러냈다. 생필품 사재기, 특히 총기류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선 미국 사회의 모습은 각자도생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특정 집단을 바이러스 전파의 온상으로 의심하는 혐오는 부족주의로 회귀하는 모습이다. 바이러스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지만 치료받을 기회와 생존 가능성은 분명히 다르다. 이 어려운 시기에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될 것이고 가난한 자는 생존 자체를 걸어야 한다. 불평등은 코로나 사태 이전에도 증가하고 있었지만 이제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타인과 물리적 거리를 두는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과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며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더욱 SNS와 인터넷 쇼핑에 몰두한다.
복고주의는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현재에서 비롯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한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현대인은 왜 미래를 두려워하고 불안에 젖어있는 걸까? 우선 자본이 전세계를 유동하는 세계화의 시대가 되면서 권력이 정치와 분리되었다. 자본이 없는 정치가 얼마나 무력한가? 세계화 이전에 권력은 국가를 단위로 영토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를 나타내는 단어가 토포스(topos, 현명하고 자애로운 통치자의 지배를 받는 고정된 장소, 폴리스, 도시, 주권국)다. 이제 인간 사회의 미래를 누구도 토포스에 근거하여 사고하지 않는다. 우리는 점점 특정한 토포스에서 벗어나 세계 전체를 무대로 사고한다. 그대신 우리는 토포스가 제공하던 안전과 복지를 잃었다. 더이상 국가나 기업이 개인을 돌보지 않는다. 모든 책임을 개인이 떠안고 있다. 바우만은 이를 ‘책임의 하청’이라고 표현했다.
개인화, 사유화, 개성화, 그리고 ‘책임의 하청’은 68혁명의 유산으로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서구는 유례 없는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무덤에서 요람까지”라는 표현이 알려주듯이 복지 제도도 완비했다. 이 시기 미국의 소득세율은 현재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보다 더 높았다. ‘포드주의’로 대변되는 대량생산체제와 복지국가의 혜택은 서민도 풍요로운 소비생활을 누리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전후에 태어난 젊은이들은 이런 체제에 반기를 들었다. 국가와 자본, 그리고 전통 문화가 온 사회를 답답할 정도로 꽉 틀어쥐고 있었다. 기성 세대는 ‘라인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경제적 번영을 일군 대신 물질적 가치를 최고로 여기는 속물이 되었다. 포드주의는 일상과 의식에까지 스며들어 틀에 박힌듯한 사람을 만들어내고 비판적 사고와 상상력을 약화시켰다. 이런 상황에 염증을 느끼던 대학생과 지식인이 명분이 약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 흐름은 순식간에 기존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규범에 저항하는 혁명으로 번졌다. 68혁명은 탈집중화, 자기결정, 자율성, 반권위주의의 거대한 흔적을 서구 사회에 남겼다. 페미니즘, 환경운동, 성소수자 운동, 인종차별 반대, 반전 평화 운동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며 일상에 침투한 억압을 없애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맞서 국가와 자본은 이전과는 다른 전략을 도입했다. 세계 대전 이후 국가의 강력한 보증 아래 자본과 노동자는 휴전을 맺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는 체제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68혁명 이후에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이 증가되는 개인화, 개성화가 꽃을 피우고 자본이 점점 국경을 넘어 세계화를 이루면서 자본은 노동자와 맺었던 상호관계를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국가는 세계화를 핑계로 자본의 탐욕을 제한하던 조치를 점점 폐지했고, 노동자를 보호하던 장치를 점점 축소시켰다. 이제 국가와 기업은 개인을 돌보지 않는다. 정치가 책임져야 할 일들은 이제 개인이 하청받는다. 개인은 혼자서 생존을 걸고 모든 순간을 전쟁처럼 살아야 한다. 사회적 연대 대신 상호불신이, 타인에 대한 따스한 시선 대신 적대감이, 그리고 무한경쟁이 찾아왔다.
이런 세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가 가질 수 밖에 없는 태도는 홉스가 리바이어던(국가)이 나타나기 이전의 자연상태로 표현했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각자도생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일어나자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생필품 사재기, 그리고 개인용 무기를 구하려는 긴 줄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얻었지만 안전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안과 분노는 커질 수밖에 없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폭력을 위한 폭력을 낳는다. 이른바 ‘묻지 마’ 폭력이다. 폭력을 당한 피해자에게는 삶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엄중한 일이지만, 막상 가해자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폭력이다. 폭력을 행사하면 더 행복해질까? 그럴 리가 없다. 폭력은 가해자의 영혼도 잠식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유행은 광범위하게 타자에 대한 혐오를 분출시켰다. 한국에서도 발원지인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혐오가 거의 당연시되고 있다. 외국인이 아닌 대구 경북 지역에 대한 혐오도 흔하다. 세계 곳곳에서 바이러스를 전염시킨다는 이유로 동양인에 대한 혐오도 커졌다. 바우만은 한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부족중심주의(Triblaism)’에 있다고 한다. 칼 슈미트는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특정한 정치적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고 간파했다. 부족은 적과 동지의 구별에서 잉태된다. 부족의 목적은 누구를 돕고 누구를 죽일지 정하기 위해서란다. 인간은 지금까지는 적이나 타자와 대립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집단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인간이 문명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범위가 점점 커졌다. 150명 근방이던 수렵채집 시기를 지나 부족의 시대, 영토국가의 시대로 이어졌다. 이제는 지구 전체가 하나의 우리가 되는 과업만 남았다. 그런데 모두가 ‘우리’라면 적은 어디에 있는가? 전 지구의 인간이 모두 ‘우리’라면 이 ‘우리’는 무엇일까?
사람은 언제까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 홀로 버틸 수만은 없다. 인간은 집단을 이루면서 살도록 진화했다. ‘사회적 뇌 가설’에 따르면 인간의 뇌가 발달한 이유가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해 복잡한 인지 기능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람은 인간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사람다움을 얻는다. 과거 공동체로부터 독립해 개인의 자유를 얻으려던 갈망은 이제 어떻게든 집단에 소속되고 싶은 갈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갈망은 자본이 지출은 줄이면서 수익과 이득을 늘리는 기회로 삼았다. 우리가 마주한 현대는 삶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고 책임져야 한다. 자본은 예전에는 노동자의 노동만 관리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회사에 들어간 사람은 삶 자체를 바쳐야만 쫓겨나지 않는다. 자본은 소속감과 보수를 빌미로 개인의 모든 인격을 종속시켜 말그대로 영혼까지 뽑아낼 정도로 일을 시키지만 보상은 보잘것없다. 그나마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세계화의 흐름은 현대 사회가 액체처럼 유동하게 만들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단단히 버티고 있는 땅, 토포스에 근거한 삶이 사라졌다.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다. 또, 개인이 어떤 문제를 총체적으로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로 현대 사회는 너무나 복잡하다. 어떤 사태의 진면목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려 애쓰는 대신에 음모론과 가짜 뉴스에 열광한다. 알기 어려운 진실 대신 쉬운 거짓을 택한다. 그 댓가로 점점 현실에서 소외된다. 현재가 현실로서 존재하기 보다는 ‘낯선 나라’처럼 여겨진다. 현재조차 잘 모르는데 어떻게 미래를 대비할까? 미래에 대한 기대가 옅어진다. 현재가 낯설고 미래가 두려우면 남은 것은 과거다. 과거로 돌아가 이상향을 찾는다. 레트로토피아가 등장한다.
바우만은 미래를 형성할 힘을 빼앗기면, 정치가 집단기억의 공간으로 이전된다고 했다. 기억의 공간은 과거일 수밖에 없다. 역사처럼 과거도 구성의 공간이다. 마치 개인의 기억이 정확한 사실이 아니라 감정과 믿음에 따라, 선택하고 조작된 이미지로 남는 것과 같다. 알기 어려운 현재, 도무지 알 수 없는 미래는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더없이 친숙하게 변조된 과거는 행복을 건네준다. 우리는 안전과 안정을 잃고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거대한 세상에 나뒹굴지만 과거의 잔재에 매달려 겨우 버티고 있는 셈이다. 기억의 잔재, 과거는 현재나 미래와 달리 마음대로 조작할 수도 있다. 잃어버린 만능감을 되찾는다. 조작이나 취사 선택을 통해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는데, 핵심이 되는 가치가 적과 동지의 구분이다. 내가 의미를 부여한 과거의 어떤 상태를 공유할 수 없는 사람이 ‘적’이 된다. 우리가 최고다. 적은 배제한다. 적은 우리보다 열등하고 나쁘다. 적대감과 갈등이 커진다. 부족으로 회귀한다.
부족으로의 회귀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외국인, 이민자, 난민에 대한 혐오와 공포다. 세계화의 시대에 이들은 더이상 먼 이야기속 사람이 아니다. 내 곁에서,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나와 다른 타자다. 저절로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밀어내는 마음을 의식하게 된다. 지금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세계 곳곳에서 마음 속에서만 숨겨져 있던 여러 종류의 혐오와 공포가 솟아나고 있다. 이런 혐오는 진실에 대한 외면에서 온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생활 반경이 넓어지면서 야생 동물과 접촉이 늘어서 인수공통 감염병에 노출될 확률이 점점 높아지고, 거대 도시에 막대한 인구가 밀집해서 거주하는 환경에서 순식간에 많은 사람에게 번지며, 교통 수단을 통해 세계 각지로 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인류 전체의 책임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하게 인간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 중국인, 동양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은 진실을 외면하고 책임을 방기하는 일이다.
‘부족으로의 회귀’ 현상을 많은 사상가들이 우려했다. 그들은 ‘개인으로서 자율성을 잃지 않고도 공동체에 완전하게 소속될 수 있는 감각’을 지향하며 부족중심주의를 넘어서려는 변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앞에서 보았듯이 자본에 포섭되어 삶 전체가 종속되거나, 아예 주류에서 배제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현상이 오히려 부족중심주의를 강화하는 지경이다. 어떻게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고리를 극복해야 ‘우리’와 ‘그들’의 구별을 뛰어넘어 전 인류가 통합될 수 있다. 바우만은 책의 후기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연설을 소개한다. 대화를 통해 죽음이 아닌 삶, 배제가 아닌 포용을 생각하는 문화를 만들자는 내용이다. 당연히 동의하지만 과연 이것만으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세상의 모습이 바뀌었다. 그중에 인상깊은 장면이 있다. 중국의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면서 공기가 맑아졌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관광객이 없어서 운하의 물이 맑아져 돌고래가 노닌다. 인류의 물질문명은 농업혁명 이래로 쉼없이 발전했다. 이 발전이 한계에 달하고 있다는 여러 조짐이 있다. 기후 변동이 그 중 가장 큰 경고다. 인간 문명의 종말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경제 발전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때, 우리는 어떤 미래를 꿈꿔야 할까? ‘레트로토피아’, 곧 과거에서 이상향을 끌어온다면 매드맥스 영화가 묘사한 미래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바우만이 유작을 통해 경고하려던 바가 이것이 아닐까? ‘레트로토피아’를 뛰어넘고, 파국이 임박한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