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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Aug 16. 2021

이념 밖의 미로

데이비드 레만 개인전 - 호리아트스페이스, 아이프아트

 데이비드 레만(34)은 독일을 대표하는 젊은 미술가다. 평론가로부터 “동년배 작가들이 지켜야 할 기준을 세운 새로운 예술가”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다. 그는 1987년 구동독 소도시 루카우에서 태어났다. 그가 독일 통일 직전에 태어나 생애 대부분을 통일 독일에서 보냈다 하더라도 구동독 지역의 젊은이는 서독의 청년과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통일 직후 무너진 동독 지역의 경제와 이전과 달라진 정치 및 사회 시스템은 구동독 청년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레만의 회화 작품이 대부분 표현주의적 느낌을 주는 데는 이런 출신 배경이 작용했다. 그는 2009년부터 베를린 국립예술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그의 이력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다. 그가 미술을 전공하기 전에 따로 철학 개인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문학, 철학 저술에서 모티프를 따온 작품이 많다. 2016년에 독일 브란덴부르크 연방주에서 ‘젊은 예술가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2019년에는 ‘독일 이머징 회화 작가 특별 순회전’에 참여해 여러 미술관에서 인기를 누렸다. 한편, 그는 K-POP을 즐겨 듣는 팬이라고 한다. 이번에 한국에서 첫 개인전이 열린 배경에는 그의 K-POP 사랑이 한몫 했다고 한다. 한국에도 무척 오고 싶었으나 4차 코로나 유행으로 무산되었다. 


 SNS나 언론 기사에서 전시를 소개하는 글을 눈여겨 보는 편이다. 얼마 전에 이 전시를 소개하는 신문 기사를 보고 관심이 갔다. 우선 거침없이 에로티시즘을 표현한 그림에 눈길이 갔다. 전시 소개글을 읽으니 정치, 사회적 문제에 더해 영화, 문학, 철학 등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주제를 가져오는 작가다. 그의 작품을 보면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재밌는 경험이 되겠다는 기대가 생겼다. 연휴 중간 일요일에 한가한 청담동 거리에 위치한 전시장을 찾았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이 액자에 들어 있으면 수채화이고, 그렇지 않으면 유화라고 한다.


Hero of Yesterdady, 2019/2020  Gouache, dispersion, copper oxidation and oil on canvas 140*100cm


 이 작품에서 상대적으로 여성의 몸이 크고 아름답게 나왔지만 얼굴은 일부만 표현했다. 반대로 남성의 얼굴을 섬세하게 묘사한 대신 몸은 흐릿하다. 여성은 남자의 성욕을 채우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감정을 알 수 있는 얼굴이 다 필요하지 않다. 성적 유희에 필요한 입술 아래만 그린 이유다. 오른쪽 아래 파란 남자 성기 안에 붓이 그려져 있다. 여성을 도구나 수단으로만 취급하는 남자가 작가 자기자신일 수도 있다는 뜻이란다. AC/DC는 1970~1980년대에 큰 인기를 얻은 호주 출신의 하드락 밴드다. 레만은 이 밴드가 가부장적인 남성상을 대표하는 밴드라고 생각해 인용했다고 한다. 이처럼 레만이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은 직설적이지 않다. ‘어제의 영웅’, 즉 구시대의 마초적 남성성이 비틀려있다는 점을 풍자로 표현한다. 남자의 아래턱은 고환처럼 표현되어 있고 눈과 코는 대칭이 아니라 색마저 다르다. 전통적 남성상은 실제 남자에게도 자아를 분열시킬 수 있을 정도로 억압으로 작동한다. 그 안에서 누리는 쾌락은 일회성에 지나지 않는다. 레만은 ‘어제의 영웅’을 노골적으로 까발리고 비판하지 않는다. ’어제의 영웅’을 극복하는 새로운 남성상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또, 가부장제를 깨부수는 진취적 여성을 앞세우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문제의식이 진지한 이유는 솔직함에 있다. 자기 스스로가 이미 가부장제에 젖어든 면이 있을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나는 섣부르게 앞서서 남성성을 비판하고 능동적 여성을 내세우는 남성 작가보다 레만처럼 진솔하게 바닥부터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더 좋다. 이념만 앞세우는 사람은 몸이 따라가지 못하고, 몸과 이념의 분열에 자멸하거나 후퇴한다. 근본부터 자신을 성찰해 차근차근 나아가는 작업이 가부장제의 강고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근간이 되지 않을까?



Piano Nobile, 2019  Gouache, resin, egg tempera, dispersion, copper oxidation and oil on canvas  190



 이 작품도 ‘어제의 영웅’과 비슷한 주제다. 제목은 큰 집의 지상층(주출입구가 있는 층)을 뜻한다. 거실 소파에 누워 있는 남성은 총을 들고 있다. 문 바깥 거리는 건물이 화염에 불타고, 어떤 사람이 긴 막대기를 휘두르는 등 난리가 났다. 남자는 바깥의 폭동에 대비해 총을 챙기는 듯하다. 그의 발치에 있는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 집을 장식하는 조각품처럼 보인다. 그의 옆에는 나체의 여자가 누워있다. 이 여자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무표정하게 널부러져 있다. 여기서도 여성은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자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남자의 옆에 커다란 얼굴이 보인다.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남자의 내면을 지배하는 흑막처럼 보이기도 한다. 남자의 보이지 않는 내면이 드러난 그림자로 해석할수도, 아니면 반대로 마음을 지배해 조종하는 악마로 볼 수도 있겠다. 어쩌면 둘 다가 아닐까 싶다. 사람의 마음은 단순한 감정이나 정서가 아니다. 사람의 행동과 선택을 다스리는 ‘체제’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고 선택하는 일은 우리가 습득한 주변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을 따른다. 여기에 어긋나면 법적, 도덕적 제재가 가해진다. 우리는 이런 제재를 내면화하여 초자아로 만든다. 이를 벗어나기 어렵다. 남자의 가부장적인 태도는 주변의 문화에서 파급되어 마음을 지배하는 체제가 된 것이다. 


 바깥의 폭력에 대항하는 그림 속 남자의 시도는 어떻게 될까? 폭동은 곧바로 남자의 집으로 번지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누워서 총만 들고 있다. 무기력하고 능력도 없지만 가부장제에 편승해 여성을 자신의 도구와 장식으로 삼은 남자는 이 폭력에 맞서 자신의 전통적 남성성을 지킬 수 있을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레만의 가부장제 묘사가 이래서 재밌다. 여성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다루는 작품도 정말 좋아한다. 그러나 남자라면 이처럼 자신의 내면에 숨어서 남아 있는 잔재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진짜로 나아갈 수 있다. 



1984, 2014  Gouache, watercolour, ink, acrylic and pencil on paper 76*58cm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1984>는 억압적인 국가체제의 감시 아래에서 인간성이 얼마나 황폐한 지경으로 내몰릴 수 있는지 섬뜩한 경고를 한다. 다국적 기술 기업은 이 시대의 ‘빅 브라더’가 되어 우리의 취향에 맞추어 정보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우리의 마음과 삶을 지배한다. 그림 속 인물은 누군가가 들려주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레만은 시각적 정보보다 청각으로 듣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는 남의 말에 따라 줏대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팔랑귀라고 하지 않는가? 음성은 문자보다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작품 속 사람은 ‘빅 브라더’가 제공하는 달콤한 말에 행복감에 젖어 있지만 어딘가 이상하다. 눈은 좌우가 생김새부터 색상까지 다르다. 어쩌면 이 사람은 소설 <1984>에서 말하는 ‘이중사고’의 혼돈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중사고’는 사람의 마음 속에 두 가지 상반되는 생각을 동시에 가지고, 상반된 둘 모두를 받아들이는 생각을 뜻한다. 도대체 이것이 가능한가 싶지만 실제로 빈번하게 일어난다. 잘못된 일인지 뻔히 알면서 상사의 명령에 따라 비리를 은폐한다. 페미니즘을 주장하면서 지인에게 성희롱을 일으킨다. 이런 일이 ‘이중사고’가 아니면 무엇일까? 


 ‘빅 브라더’가 제공하는 안락에 젖어 가면서 나는 주체적이고 당당한 사람이라고 SNS에 소비적 일상을 올리는 일이 바로 지금의 ‘이중사고’가 아닐까? 이 그림 속 인물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아닐까?



Dune, 2019  Gouache, resin, egg tempera, dispersion, copper oxidation and oil on canvas 100*70cm


 <Dune>은 프랭크 허버트가 쓴 SF 소설로 많은 과학소설 매니아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영화 <성스러운 피>로 유명한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가 먼저 영화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이 영화를 16시간에 달하는 상영시간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살바도르 달리가 이 영화에 출연계약을 맺기도 했다. 영화는 엎어졌지만 이 작업에 참여했던 H.R. 기거에 의해 <에일리언>이 탄생했다. 1984년에 데이비드 린치가 감독한 영화가 나왔지만 명감독 린치의 이름에 먹칠을 할 정도로 졸작이었다. 제작사와의 갈등으로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올해 드니 빌뇌브 감독이 감독한 새 영화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작품이다. <Dune>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자체가 레만의 폭넓은 관심사를 보여준다. 고대의 신화, 철학, 문학, 영화, 대중문화까지 아우르는 그의 넓은 시야가 놀랍다. 아직 소설도 읽지 않고 영화도 볼 수 없어서 이 그림의 의미를 알아채기 어렵다. 소개글에서는 약물이 주는 환각증세로 나타나는 환상, 아늑함, 신비로움을 표현했다고 한다. 다른 SF 걸작 <블레이드 러너>가 제목인 작품도 이번 전시에 소개되었다. 


Die Fundgrube ( Treasure Trave), 2021  Dispersion and oil on canvas 90*80cm



 데이비드 레만 전시는 강남의 호리아트스페이스와 아이프아트, 그리고 강북 삼청동의 초이앤라거갤러리가 공동으로 주관했다. 그래서 작품도 세 곳에 나뉘어 전시가 되고 있는데, 호리아트스페이스와 아이프아트가 같은 건물 3,4층에 위치했다. 3층의 작품을 먼저 보고 4층 아이프아트로 올라갔다. 연휴 중간 일요일 오후에 작은 전시장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잠시 작품을 보고 있는데 아이프아트 김윤섭 대표님께서 혹시 작품 설명을 듣고 싶냐고 물어보셨다. 냉큼 감사히 듣겠다고 작품 해설을 청했다. 대표님은 데이비드 레만의 출생, 이력을 상세하게 알려주시고 이번 전시가 기획된 배경과 레만의 미술가로서 위상까지 설명했다. 다른 작품도 설명하셨지만 이 작품 앞에서 가장 오래 머물러 설명을 들었다.


 이 작품은 보물창고를 열어 보물을 꺼내려 하는 순간의 기쁨을 나타냈다. 위에 소개한 풍자의 느낌이 강한 그림도 색채만큼은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이 작품은 맘껏 행복의 느낌을 드러낸다. 대표님은 데이비드 레만이 기법 면에서 경지에 올랐다면서 이 작품을 예로 들었다. 우선, 레만은 원색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항상 색을 섞어서 그린다. 그러면 이 작품처럼 여러 색을 칠하면 물감이 떡지게 되기 쉬운데 이 작품의 캔버스를 보면 가벼운 느낌마저 들 정도로 정교하게 칠했다. 각 대상마다 다른 느낌을 주기 위해서 붓을 칠하는 속도를 다르게 하고, 터치하는 방법도 제각각으로 했다. 이런 작품은 즉흥적으로 할 수 없고,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구성을 만들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젊은 작가가 이렇게 노련하게 작품을 만들기가 쉽지 않단다. 작품 제목 옆에 사용된 재료가 다양한 것도 특징이다. 다양한 소재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해 작가가 원하는 느낌을 구현하는 능력을 갖춘 작가다. 


 대표님의 설명을 듣기 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3층으로 내려와 다시 작품들을 감상했다. 덕분에 이 글도 쓸 수 있었다. 강남에서 볼 수 없었던 다른 작품들도 삼청동 초이앤라거갤러리를 찾아가 보고 싶다.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는 대형 전시를 볼 때와는 다른 우연한 만남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던 방문이었다. 코로나 유행으로 어디 가지 못하고 조용하게 지내는 분들이 많지 싶다. 작은 전시를 찾아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우연한 만남의 행복도 찾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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