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메르시어 作
사연 많은 사람이 과거의 삶과 안녕을 고하기 위해 찾는 곳이 있다고 했다. 그곳에 온 사람들은 어떠한 연유로 이 먼 곳까지 온 것인지 묻지 않는 게 불문율이라고도 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든, 큰 상실의 아픔을 겪은 사람이든 가슴에 쌓아둔 것들을 한껏 쏟아 내고 나면 그만인 곳. 그곳은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칠레의 푼타아레나스로 육지의 끝자락이자 남극으로 향하는 바다의 시작점인 곳이었다. 정확히 어디서 그런 글을 읽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실제 이야기였는지, 아니면 허구의 이야기였는지도 명확하진 않다. 그저 이 이야기를 읽고 홀연히 떠날 결심을 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해 이제는 미련 없이 마침표를 찍어야만 했다. 그렇게 칠레 대신 또 다른 세계의 끝 포르투갈의 호카곶으로 가게 되었다.
호카곶은 행정 지구상 신트라에 해당하고, 리스본에서 당일치기 여행이 가능한 곳이었다. 여행을 계획할 당시만 해도 나에게 리스본은 그저 경유지에 불과했다.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고 호카곶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되려 코임브라와 포르토가 더 가보고 싶은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관광지 대신 리스본에서 들를만한 서점이 있나 찾아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리스본행 야간열차’ 에 대한 리뷰 글을 보게 되었다. 책과 영화에 대한 리뷰였는데, 늙수그레한 남자 그레고리우스가 일탈을 통해 삶을 바꿀 힘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이야기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일상에 찌들어 버린 우리에게 삶의 생기를 되찾아줄 힐링 영화가 되어 줄 것이라는 이야기에 홀려 영화를 찾아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고, 어느새 나는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리스본을 헤매고 있었다. 그가 그러했듯 아마데우를 통해 삶을 곱씹어 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깨달음을 얻고자 애썼다.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그와 그의 글 속에 담긴 철학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거라 믿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아마데우의 삶에 깊이 연관되었던 사람들을 만났다. 그레고리우스와 그들의 대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기억을 더듬어 가며 평생 몰래 가슴에 담고 있던 응어리를 풀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나 역시 호카곶에 가서 잊고 싶었던 기억들을 끄집어 내고 되새김질 한다면, 해방감을 느끼고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을거란 기대가 확신으로 변해감을 느꼈다.
그렇게 부푼 가슴을 안고 호카곶으로 떠났다. 호카곶은 상상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망망대해와 따가울 정도로 거센 바람만이 존재하는 황량한 곳이었다. 인간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은 등대, 관광 안내소, 기념비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까마득한 절벽 아래 파도가 만들어내는 하얀 거품을 보고 있자니, 내가 일상으로부터 아주 먼, 낯선 곳에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토록 오랫동안 염원했던 세계의 끝에 서니 나 역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분노와 울분으로 점철된 과거에 대한 원망이나 회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것 또한 작별이기에 눈물을 머금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한 번 비집고 흘러나오기 시작한 울음소리는 다시 주워 삼킬 수 없었다. 그렇게 마음껏 울고 난 뒤 가슴 아픈 과거와 감정의 응어리들은 거센 바람에 실어 보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마음으로 리스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리스본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기 때문에 정말 최선을 다해 리스본을 구석구석 헤매고 다녔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나타를 먹고, 오래된 서점들을 찾아다녔다. 포르투갈 사람들처럼 카페에 서서 피콜로를 마시고, 저녁에는 포트 와인을 마셨다. 영화에서 보았던 장소들과 책 속에 묘사된 리스본의 아름다운 골목들을 돌아다니며, 근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살아있음에 즐겁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를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잃어버렸던 삶의 활력을 되찾고, 자신이 살아왔던 지난날들에 대해 반문해보는 장면이었다.
내 인생은 뭐죠? 지난 며칠을 제외하고는...
그렇다. 그동안의 내 인생은 뭐였던 걸까. 늘 인생은 괴롭고, 두려웠으며 마냥 불공평한 것이라 믿어왔다. 때로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 친구의 선택이 현명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과연 리스본에서 보낸 며칠만큼 진심으로 생에 감사하는 순간이 있었나. 나는 오래된 구속에서 풀려난 듯 자유로웠고, 심지어 충만한 행복감을 느꼈다. 분명 여느 여행지에서 느끼는 해방감과 오락적인 즐거움과는 결이 달랐다. 리스본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도 무수히 저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끝내 답하지 못했다.
다만 이 또한 생에의 의지를 되살려보려 일탈을 결심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지 못했을 기쁨임은 분명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지나온 인생에서 의미를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데우의 말처럼 우리는 떠날 때, 거기에 다시 가야만 찾을 수 있는 우리 안의 물건들을 남기고 가는 법이다. 적절한 때가 되어 돌아간다면 분명 나의 과거에서도 유의미한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더불어 인생을 바꿀만한 순간적인 용기와 선택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랄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삶의 드라마틱한 순간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인 침묵 속에서 진행된다고 한 것처럼, 나의 리스본행이 그러했다. 앞으로도 그저 평범해 보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도록 주변을 세심하게 둘러보는 것이면 충분할 것이었다.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까이 가고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작은 일탈에서 시작된 그레고리우스의 여행처럼 나의 일탈 또한 나 자신을 다시 찾게 해 준, 삶의 활력을 되찾는 여행이 되어 주었다. 나는 언젠가 리스본에 다시 돌아갈 것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나 스스로에게 여행을 가기 위해 그리고 나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