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같은 날, 다른 세 체제를 생각해보다-!
1. 네덜란드 왕의 날(Koningsdag)
2. 입헌군주국 네덜란드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3.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
4. 판문점 선언에 대한 네덜란드 네티즌 반응
5. 각자 또 함께 행복한 개인, 평화의 주인으로 살자!
2018년은 역사적인 해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정전협정(armistice; wapenstilstand)이 1953년 7월 27일 체결된지 65년 만에 공식적인 종전 선언을 연내 앞두고 있다. 2018년 4월 27일 남북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군사정전위원회가 위치한 공동경비구역, 판문점의 남측 지역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제 3차 정상회담이었고, 11년 만의 첫 정상회담이었다. 판문점 선언의 전문은 여기, 공식 영문 번역은 여기서, 선언 서명 후 문재인 대통령의 소감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네덜란드의 외무부 장관 Stef Blok은 27일 브뤼셀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VO; Noord-Atlantische Verdragsorganisatie) 외교장관회의를 마치고 나오며,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의견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특별하고 희망을 주는 사건(een bijzondere en hooggevende gebeurtenis)"이라 답했다. 또 덧붙여 "북미회담으로 가는 과정 중에 중요한 신호이다. 그렇지만 모든 약속이 실제 비핵화로의 구체적인 발걸음으로 옮겨질 수 있을지야말로 최종적인 시험이 될 것이다. (Maar de definitieve test wordt of alle toezeggingen ook inderdaad kunnen worden omgezet in concrete stappen naar nucleaire ontwapening.)" 라고 이야기했다. 결과가 중요하다는 메시지이다.
한편,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7일 트위터에 메시지를 남겼다.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Er gebeuren goede dingen, maar de tijd zal het leren; Good things are happening, but only time will tell!)", "한국전쟁이 끝난다! 미국과 위대한 미국민 모두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들에 자랑스러워해야 된다! (Korea-oorlog gaat eindigen! De VS en al zijn geweldige inwoners kunnen heel trots zijn op wat nu plaatsvindt in Korea!)."
이번 정상회담의 제목이 '평화, 새로운 시작(Vrede, het nieuwe begin)'인 것처럼 '앞으로',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이번 선언의 내용은 정상회담이 지난 6.15선언(2000년), 10.4선언(2007년)과 비교해 보면 연속성이 뚜렷하다고 한다. 당시도 비핵화를 이야기했다. 파격적인 점은 이번 3차 회담에서는 그 지속성과 실현성을 담보하고자 양측 다 뚜렷한 의지를 보였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1년 만의 성과이고, 아직 임기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최대한 속도를 내어 구체화해할 것이다. 특히 평양에서 열린 지난 정상회담과 달리 이번 정상회담은 최초로 남한 구역, 공동경비구역(판문점)의 남쪽에서 열렸다. 생중계로 김정은의 말과 표정이 실시간 전 세계에 방송되었다. 대북제제로부터 벗어나 경제개방 노선을 본격화하기 위해서는 김정은 스스로 정상국가의 지도자로서 신뢰할 만한 인물임을 보여야 했다. 지난 정상회담보다 더 큰 기대와 판돈을 올려둔 만큼 본인이 한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 후폭풍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 글은 4월 27일이 마침 네덜란드 공휴일 '왕의 날(Koningsdag)'이어서 나올 수 있었다. 여느해 같으면 시내에 나가 쏟아져 나온 인산인해를 구경했을 날이다. 올해는 실시간 회담 중계 보는 편을 택했다. 놓칠 수 없는 역사적 장면들이었다. 이를 계기로 평소 '왕의 날'과 관련해 네덜란드 왕가의 존재와 입헌군주제, 헌법, 문화 등에 생각해 보았던 점, 대한민국과 평화, 열린 민족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단상, 완전한 비핵화 프로세스와 평화체제 구축을 통해 10년, 20년, 30년 후 우리 다음 세대에 남길 유산에 대한 기대까지 '붓 가는 대로' 정리해보았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알게 모르게 여러 사람들의 글과 생각, 경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이 글은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에 관한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분석을 구하는 분께는 적절치 않다. 향후 구체적인 비핵화 일정과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우선순위와 원칙, 협상 전략, 이어 질 북미회담과 예상되는 다자 회담 등에 대한 가능성 분석과 논평, 제안들은 국제관계와 북한 연구를 오래 하신 전문가 여러분의 기고문과 여러 더 질 높은 취재 기사에 맡겨 둔다. 다만,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네덜란드에 사는 사람이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본 소감에 호기심이 가거나, 네덜란드란 나라에 대해 일말의 실마리를 구해보려는 분께는 쏠쏠한 재미가 될지도 모르겠다.
매년 4월 27일은 네덜란드 국가수반을 기리는 기념일, '왕의 날(Koningsdag)'이다. 그 기원은 18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949년부터 정식화되었다. 베아트릭스 여왕 때까지는 4월 30일을 '여왕의 날(koninginnedag; 1891-2013)'로, 지금의 알렉산더왕이 취임한 2013년 다음 해부터는 4월 27일을 '왕의 날'로 지키고 있다. 왕의 날은 그 자체로 국가 지정 무형 문화재(Immaterieel Cultureel Erfgoed)이기도 하다. 왕가는 매년 시정부를 하나씩 선정해 방문하고, 그 곳 축제에 참여한다.
네덜란드는 도시든, 시골 마을이든, 기초지방자치정부는 모두 gemeente라고 부른다. 행정 상 시, 군 구분이 없다. 전국에 도정부provincie는 12개, 시정부gemeente는 380개이다. 시정부는 지방의회가 이끌고, 지방의회 선거는 4년에 한번씩 열린다. 단일 선거구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로 의원을 뽑기 때문에, 정당 별 득표수로 의석이 배분된다. 지방의회 내 복수의 정당이 연정을 구성한다. 연정에 참여하는 정당들이 합의한 연정 협약은 지방정부 행정을 일상적으로 도맡는 시행정수뇌부(College van burgemeester en wethouders)를 통해 실천에 옮겨진다. 시행정수뇌부는 지방의회가 채용하는 정무직 부시장들과 행정 전문가로서 왕의 임명을 받는 시장으로 구성된다. 부시장마다 각각 책임지는 정책 분야가 있으며, 시행정수뇌부 내에서 조율하고 합의한 안을 지방의회에 보고하여 재가받는다.
그렇다면, 왕의 날에 보통 사람은 뭐 하는가? 놀고, 쉰다. 왕의 날에는 각 도시와 마을, 주요 광장마다 벼룩시장이 펼쳐진다. 누구나 물건을 팔 수 있는 날이다. 봄이라 집구석구석 물품을 정리하기 좋은 때이기도 하다. 옷, 책, 장난감 등 육아에 요긴한 물건을 말도 안 되는 값에 잔뜩 구할 수 있다. 길거리 곳곳에서 음식과 맥주도 팔고, 지역 음악 동호회에서 음악도 연주한다.
왕의 날에 네덜란드인이 감흥하는 정도는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왕가를 친근하게 여기며 알렉산더왕과 그 부인 막시마를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이 날을 그저 또 다른 휴일, 쉬고 노는 날 정도로 생각한다. 네덜란드인 중에는 간혹 공화주의자도 있다. 즉,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믿기 때문에 특별 계급의 존재, 왕가를 반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평화롭게 먹고사는 데 당장 지장 받는 건 없다 보니 현실이 정치적 신념과 다른 것을 못 견디게 괴로워하는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다. 신념에 늘 생명을 걸 필요는 없다. 정치적 신념을 알릴 권리가 있고 알리고 싶으니, 일부러 매년 왕의 날에 시위를 할 뿐.
한편, 왕가는 평등 의식이 높고 까다로울 수도 있는 네덜란드 시민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어떤 측면에서 보면 서비스, 즉 '섬김의 행동'을 보인다. 어차피 왕실이 쓰는 돈도 납세자에게서 나오니 말이다. 공화제가 아닌 입헌군주제를 표방하는 네덜란드에서 왕가가 입법, 사법, 행정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왕가의 혈통이라도 왕가 공식 일원으로 살려면 "왕실 일원에 관한 법(Wet lidmaatschap koninklijk huis)"에 따라 성인으로서, 결혼을 희망하는 배우자에 대해서도 일종의 허입 심사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법적으로 공인인 왕가(koninklijk huis)와 사인인 왕족(koninklijke familie)을 구분하고 있다. 만약 왕가 일원으로 사는 데 수반되는 의무를 지고 싶지 않으면 그 명예와 특권도 포기하면 된다.
왕가의 모든 공식 활동은 네덜란드라는 정치사회 체제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공적 영역에서 지킬 덕목을 소중하게 다루며, 공동체 의식과 시민성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네덜란드에 대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문화, 경제적 외교와 로비에 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왕가의 일년 예산과 결산은 법에 따라 의회의 감사와 승인을 받는다. 알렉산더왕과 그 아내 막시마, 전 베아트릭스 여왕은 그 공적 활동에 대한 대가로 일종의 정부 수당을 받는다. 나머지는 왕가 소속이어도 수당을 받지 않는다. 다만, 왕가 구성원으로서 각종 재단에 이사로 봉직하거나 행사에 참석하다. 예를 들어, 구호와 자선, 에너지 전환, 가정 폭력 근절, 교육, 여성 인권 신장 등 다양한 어젠다와 관련된 의미있는 행사와 조직이다. 왕가의 모든 공식 활동은 정치적으로 왕가의 존재를 정당화해야 한다.
특히 왕의 날에는 네덜란드 정치, 사회, 경제 공동체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 협회, 기관에 왕(가)의 이름으로 각종 영예 훈장과 표창을 수여한다. 후보자 추천과 평가, 선정에는 물론 별도 절차와 조직이 있다. 공휴일인 왕의 날 전날, 각 지방정부마다 표창수여식이 열린다. 매년 수백 명이 네덜란드 전역에서 지역 스포츠 클럽이나 문화예술, 돌봄, 종교 단체 봉사 등을 통해 지역 사회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표창을 받고 있다.
왕실 표창받는 것을 een lintje krijgen이라 표현한다. een lintje는 메달을 다는 색색의 리본을 뜻한다. "koninklijke onderschedingen uitreiken"은 "왕실 표창을 수여하다"이다.
집이 없으면, 왕위도 없다! NO HOUSING & NO CORONATION!
- 1980년 4월 30일, 베아트릭스 여왕의 대관식이 열리는 동안, 암스테르담에서는 주거운동가들이 불을 지르며 큰 시위를 벌였다. "주택 문제를 해결하라! 집이 없으면 왕위도 없다!" 그 포스터.
여왕에게 정치적 실권이 없는데 여왕에게 집을 요구하는 것은 따질 주소를 잘못 찾은 셈일까? 그 체제 구성원에게 주거권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입헌군주제의 정당성에 의문을 표한다는 점에서는 실제 정치인과 행정가의 인식에 호소하는 메시지였을까? 3-40년이 지난 지금, 이런 선명한 구호는 더 이상 흔하지 않다. 대의정치와 행정기술, 주민조직을 통해 기술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기 때문일까?
나는 민주공화주의자이다. 모든 사람의 평등을 믿고, 주권자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체제를 꿈꾼다. 현실이 그렇지 않아도 사회가 그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 이런 선언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실천으로만 의미가 있는 건데 써 놓고 보니 손이 오글거린다.
네덜란드 헌법은 일단 평등을 강조한다. 1조가 모든 사람에 대한 평등한 대우를 기본권으로 강조하는, 차별 금지 조항이다.
Grondwet 1. Allen die zich in Nederland bevinden, worden in gelijke gevallen gelijk behandeld. Discriminatie wegens godsdienst, levensovertuiging, politieke gezindheid, ras, geslacht of op welke grond dan ook, is niet toegestaan. (Gelijke behandeling en discriminatieverbod)
헌법 1조.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동일 상황에서 동일 대우를 받는다. 종교, 가치관(세계관), 정치적 신념, 인종, 성별, 그 외 어떤 이유에서도 차별은 허락되지 않는다.
2조에서는 네덜란드 시민권자와 외국인을 구분 짓는 조항이 이어진다.
2조 1항, 법으로 누가 네덜란드인인지 규정한다. 2조 2항, 법으로 외국인의 입국 허가와 추방을 규정한다.
그런데, 네덜란드에는 왕(군주)이 여전히 있다.
민주공화제를 표방하는 대한민국 헌법에는 '사회적 특수계급'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 제도 인정은 위헌이다.
대한민국 헌법 2장 11조 2항 "②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이렇게 명시한 것을 보면 조금 가슴이 뛴다. 솔직히 더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평등'의 개념을 한 단계 더 구체적으로 표현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덕목(deugdzaamheid)을 표현하고 지킴으로써 네덜란드인에게 문화적, 정신적 구심점이 되고자 하는 왕가의 행보와 근신(謹愼)이 부럽기도 하지만, 적어도 "지향점"에 있어서는 대한민국 민주공화국 시민인 게 자랑스럽다!
비록 불평등의 정도와 특권 계층의 존재는 사실 상 한국이 현재 더 심할 수 있다. 실제 불평등 지수가 높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그것을 덮어 버리지 않고 문제시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열망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더 역동적이고 가능성 있는 정치, 문화, 사회, 경제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결국 그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영토에 자리 잡고 살아가며, 주권을 발휘하며, 사회적 협력과 생산, 소비를 영위하면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구성원 한 명 한 명을 '사람'으로 대접하고, 서로 손잡고 끌어줘야 한다고 믿는다.
베네딕트 앤더스의 분석대로 민족을 근대의 기획,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로 여긴다 하더라도, 그 주장이 한국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현실을 부정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상상은 현실이 된다. 상상은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대한민국 헌법의 영향력 하에 살면서도 분단과 휴전으로 인해 그 법의 구체적 실천이 제약당하는 것을 경험하거나, 그 법으로 이룰 삶에 대한 상상력을 제한받아 왔다. 한국 땅에서 사는 이들에게 모종의 운명 공동체는 '의식'만이 아니라 실제 경험하는 현실, 일상이기도 하다. 분단과 휴전의 영향력을 비처럼 함께 맞고, 헌법 아래 함께 사는, 생사를 어느 정도 공유하는 그런 운명 공동체.
대한민국 1987년 헌법은 투표와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대표성을 가진 여야가 합의 발의하여, 국민투표를 통해 채택된 헌법이다. 즉, 한국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고 택한 헌법이다. 또 그 기원과 87년 헌법이 사람들 간에 작동되고 실천되는 현실은 그에 선행된 역사의 영향을 받았다. 즉, 지금의 헌정은 수많은 사람들이 내린 선택의 축적으로 형성되었고, 다시 형성되어 가고 있다. 사람들이 내리는 선택은 그 선택이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기대, 즉 미래상(未來像)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일본의 통치가 계속 이어질 것이고, 그 밑에서 사는 게 어쩔 수 없다고 믿은 이들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앞장섰다.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와 달리, 말과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사상과 문화를 꽃 피울 수 있는 자주권이 있는 나라를 꿈꿨던 이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따라서 수용이든 항거든 사람들의 선택이다. 외부의 영향으로 주권을 발휘할 수 있든 없든 그 역시 그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 내리는 선택의 결과로 빚어지는 상황이다. 한 인간의 성장을 절대적인 외부환경 결정론도, 절대적인 내재적 결정론도 그 하나만으로 설명해낼 수 없는 것처럼, 한 국가가 처하는 상황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헌법의 통치를 받는, 아니 적어도 헌법의 실천과 준수를 지향하는 한 국가 공동체의 향방은 '선택할 수 있음'을 인식할 때 더 또렷이 응시할 수 있다.
이 즈음에서 1987년 헌법 전문을 다시 읽어본다. '기회균등',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에 이어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이 눈에 들어온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대한민국 헌법의 역사에 대해서는 "헌법의 상상력. 어느 민주공화국의 역사"(심용환 저, 2017, 사계절)를 추천한다. 1987년 헌법의 한계를 인식하며 대통령이 발의안 헌법개정안과 그 해설은 "문재인 대통령 헌법개정안"(청와대 저, 2018, 더휴먼)을 추천한다.
네덜란드 헌법은 1798년도 바타비아 공화국 헌법에 기원하며, 중요한 개정으로는 입헌군주제 의회민주주의 시대를 연 1848년 수정헌법, 선거구별 최다득표자만 하원 대표로 선출하던 제도를 전국구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로 일시에 바꾸고 보편참정권을 도입한 1917년 헌법, 오랜 용어를 쉬운 말로 개정한 1983년 헌법이 있다.
네덜란드 헌법의 역사는 "네덜란드 헌법(De Nederlandse Grondwet)"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외 시민을 위한 헌법 해설과 개정 논의 중인 사안 소개도 있다. 네덜란드 내무부 지원으로 네덜란드 몽테스키외 연구소가 만든 누리집이다. 이 연구소는 삼권분립으로 유명한 프랑스 정치사상가 몽테스키외(1689-1755)를 기리면서, 민주주의, 정치, 의회, 유럽연합, 국제 거버넌스 등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하고 있다. 레이던대학과 의회역사센터 등 5개 기관이 합작하여 설립했다.
왕의 날이 공휴일인 덕분에 남북정상회담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이어 볼 수 있었다. 네덜란드 현지시간 27일 새벽 1시부터 3시까지 (한국 오전 8시부터 10시), 27일 아침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한국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 밥 먹고 설거지하고 글 읽으며 계속 방송을 보았다. 평소 같으면 일할 시간인데, 물론 집에도 일할 것이 쌓여있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왜였을까?
직관적으로, 평화 체제로의 이행은 지금까지 레드 콤플렉스를 동원해 종북, 공산주의자 딱지를 붙여가며 대한민국 시민권자의 안녕과 복지, 생명을 우습게 보고 억압했던 이들의 허구와 기만을 밝히게 될 것임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대치 상황을 구실로 삼아 하루하루 평범하게 일해 먹고사는 이들의 처우 개선은 끊임없이 뒤로 미루고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몰두했던 정치 세력, 국민 안전은 정작 담보하지 못하면서 정권 넘기면 안보가 위험하다고 협박했던 정치 세력, 그렇게 안보를 팔아 거짓 안전을 약속했던 정치 세력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날이 좀 더 빨리 올 것을 고대하니, 지난 시간 묵혀둔 체증이 그냥 내려가는 것 같았다.
진정한 안전은 상대 존재를 부정하고 없애버림으로써 내가 사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존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 즉 연결됨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즉, 안전은 고정된 축이 아니다. 서로 이미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 현실, 연결되어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움직이는 그물망과도 같다. 네가 변해야 내가 변할 테지만, 내가 변할 때 너도 변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정의의 열매는 평화이고, 정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는 성서 구절처럼, 각자가 일한 만큼 자기 몫을 가져가고 공동의 것은 공동의 것으로 지켜가는 분배 체제, 지속 가능한 사회경제적 분업과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공정한 체제를 세워갈 때 평화도 키워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함께 공존함으로써 서로 안전한 상태를 역동적으로 유지해가는 체제 말이다.
문재인과 김정은이 판문점 경계선에서 악수할 때, 오후 판문점 선언 사인 후 밖으로 나와 각각 준비한 연설을 낭독했을 때, 마지막 환송 영상을 볼 때, 뭔가 전율이 왔다. 매일 생활에 치여 별로 생각하는 사람 아닌데, 그간 속속들이 쌓인 답답함이 어느새 기쁨으로 바뀌어 눈물이 나왔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7월 6일 베를린에서 발표한 '베를린 구상'(독일 쾨르버재단 연설 영상과 전문)을 실현하기 위해 성실히 움직였다. 그 결과 오늘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평화 체제를 적극적으로 이뤄가기 위해 발걸음을 주저 없이, 그러나 신중하고 치밀하게 내딛고 있는 문재인 정권. 누가 시민의 기본권을 더 진정성 있게 생각하는지, 누가 시민의 안전과 번영을 말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위하는지 증명하는 행보였다고 생각한다.
평화는 모두에게 소중한 것.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비취는 해처럼,
공기처럼, 물처럼,
한반도 땅에 살아가는 모두에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소중한 것.
돈으로 자기를 보호할 수 있어
공권력의 보호가 덜 소중한,
힘 가진 이보다,
상대적으로 더 돈 없고 권력 없고 말할 줄 몰라
부당한 공권력 행사를 당하기 쉬운 이들에게
더욱더 소중한 것.
그것이 평화이고, 평화체제이다.
평화체제 구축은 바로 공권력 행사의 방향을 트는 일이자,
국가의 체질을 바꾸어 나가는 작업이다.
국가 권력의 어쩔 수 없는 본질, 폭력의 독점과 억압 기제에 마냥 낙관적이어서가 아니다.
현실에서 아무리 작은 변화라도 점진적 걸음이 내게는 매우 큰 의미로 다가온다.
전 세계 각종 인권 단체들이 청와대에 서한을 보내 북한 인권 문제를 회담 의제에 넣어 달라고 요청했다는 한 국제 인권 단체의 발표를 보았다. 그 단체들은 할 일을 한 것이고, 청와대 입장도 충분히 수긍한다. 정상회담의 전략과 우선순위가 있는데 의제의 초점을 비핵화에 둔 것, 전략 상 지혜롭다. 수순이 있다. 완전환 비핵화 의지를 천명하고, 비핵화 프로세스를 향후 더 자세히 협의해 나가면서, 그다음 철도 연결, 경제 협력, 시장 영역 확대와 인권 신장에 대한 압력 증대, 하나씩 전개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오늘 판문점 선언, 특히 연내 종전 공식 선언과 평화 체제로의 이행에 같이 협력하기로 한 내용은 남북 양측에 장기적으로 국가성의 체질 변화를 위한 첫걸음이었다고 생각한다. 첫걸음을 내디뎌야 다음 걸음이 가능하다. 그 긴 변화는 내가 죽고 나서도 이어져야 할 과정이다. 점진적 교류와 개방, 협력이 가져올 변화, 살맛 나는 세상 만들기는 정치 지도자에게만 맡겨둘 것이 아니다. 평화를 염원하는 이라면 모두 그 살고 있는 터전에서 고대하는 세상에 대해 이미 마음을 열고 살고 있어야 그 세상이 가까이 온다.
기사가 꽤 많이 나와 있지만, 댓글이 많은 nu.nl의 기사, "북한과 남한, 영구적 평화를 추구하기로 결정하다"에 대한 반응을 살핀다. (NU는 1999년에 생긴 비교적 신생 언론사이다. NOS나 다른 Volkskrant, Trouw는 댓글 기능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거나 구독자만 로그인 상태로 읽어볼 수 있다.)
출처: NU.nl/ANP/Reuters
Noord- en Zuid-Korea besluiten te streven naar 'permanente vrede'
북한과 남한, 영구적 평화를 추구하기로 결정하다
댓글이 40개나 달렸다. 누군가 엉뚱한 말 하면 아래 바로 잡는 댓글이 달린다. 걔 중엔 많이 알아봤다는 생각이 드는 댓글도, 사실을 왜곡하는 댓글도 섞여 있다. 전체 댓글 중 몇 개만 소개한다.
ilovejb: Het zou heel fijn zijn als we binnen niet al te lange tijd zien dat hoogbejaarde Noord- en Zuid-Koreaanse familieleden weer bij elkaar zijn. Dat zou heel wat aandoenlijke, historische beelden opleveren.
Ik denk dat het wel kan. Oost-Duitsland was ook Communistisch en nu is er gewoon 1 Duitsland. De generatie die geboren is na de hereniging zal zich volledig Koreaans voelen, zoals dat ook bij Duitsland het geval was en niet Oost-Duits.
Dat gedoe in NK kan niet eindeloos door gaan. Ooit houdt het geduld van China op, hoewel ze er wel baat bij hebben dat het Amerikaanse leger in ZK niet naar NK zal verplaatsen want dan staan de US army voor de deur van China. De worst-case scenario voor China.
- 우리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나이 든 이산가족들이 다시 만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네. 그거야 말로 정말 감동적이고, 역사적인 모습이 될 거야.
난 가능하리라 생각해. 동독도 공산주의였고, 지금은 하나의 독일이잖아. 통일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완전히 (하나의) 한국인이라 느낄 걸, 지금 독일에서도 독일인이라 생각하지 동독인이라 생각 안 하는 것처럼.
북한의 그런 움직임들(짓거리) 끝없이 계속될 순 없어. 중국도 언젠가는 인내심을 잃을 거야. 남한의 미군이 북한으로 올라오지 않기 때문에 중국이 득을 본다 해도 말이야. 올라오면 미군이 바로 중국 문턱에 있는 거니까. 중국한테는 최악의 시나리오지.
(het) gedoe는 소용없는 노력, 헛된 시도 혹은 시끄럽게 논란되는 상황을 뜻하며, 주로 부정적으로 사용된다. hassle로도 번역되지만, 딱히 다 들어맞진 않는 전형적인 네덜란드어 표현이다. (Haags gedoe: politieke spelletjes - 헤이그에서 일어나는 공방 혹은 로비 등을 포괄하는 - 정치 게임)
crammel: Goed nieuws, niemand kan tegen vrede zijn!
- 좋은 소식, 평화를 반대할 사람은 없다!
대꾸 Pendragon: Enkel de mensen die gebaat zijn aan oorlogen en conflicten.
- 전쟁과 갈등으로 이득 보는 몇몇 사람들은 (반대할 수도 있겠지).
Rob_Blom: Denk goed nieuws.......nu nog doorzetten.
- 좋은 소식 같은데... 이제는 계속 실천해가야지.
Bgerk: Gaat deze Noord-Koreaanse massamoordenaar ook nog berecht worden?
- Would this North-Korean massamoordenaar be brought to justice/ a court judgement/ put on trial? 북한의 이 엄청난 살인자가 법정에 설 것인가?
대꾸 Pendragon: Denk je dat dat de juiste vraag is op dit moment?
- 그게 지금 이 순간에 제대로 된 질문이라 생각하니?
Johan_Entrop: Naar mijn mening is het “beste wat er nu kan gebeuren”, dat Noord-Korea stopt met “alle activiteiten op het gebied van “Kernwapens”, en andere Massavernietigingswapens.Als President Moon Jae-in daartoe bereid is, is naar mijn mening “de weg naar normale internationale betrekkingen op allerlei gebieden open!”
- 내 의견엔 지금 일어날 수 있는 최선은 북한이 핵무기 관련 모든 활동과 다른 대량 살상무기를 모두 그만두는 거야. 문재인 대통령(김정은 위원장이라 해야 하는데 실수로 보임)이 그렇게 할 거라면, 내 생각엔, 모든 분야에서 정상적인 국제 관계를 여는 길이 열린다고 생각하는데!
bereid zijn tot iets / daartoe bereid zijn: ~할 준비가 되다. ~에 준비되다.
Monde: NK heeft, naar het er naar uitziet, weinig keus, gezien de sancties en de belabberde toestand van welzijn en economie.
- 북한이, 보이는 거로는, 선택지가 별로 없는 것 같네. 모든 경제, 무역 제제와 복지-경제 사정이 참담한 것을 보면 말이야.
이런 댓글도 있다.
Droogkloot: Nu het regime in noord korea opdoeken en korea weer als 1 geheel.
- 이제 북한 체제 없애버리고 다시 하나의 한국으로...
이 분, 다른 네티즌 눈에도 과격하고 급해 보였다 보다. 밑에 댓글이 10개 이상 달렸다. 여럿이 주거니 받거니 각자의 이해와 생각을 이야기한다. 그중 하나.
Monde: En bovendien is NK natuurlijk niet de eigenaar van land van ZK waar andere mensen wonen. Al is het één volk. Ook in ZK wonen individuen. En tenslotte zullen ze maar wat blij zijn dat zíj het niet waren die onder het autoritaire communistische bewind kwamen. Want dat systeem heeft geen welvaart maar alleen maar agressieve producten voortgebracht.
- 무엇보다 북한은 남한 땅의 주인이 아닌 게, 거기 다른 사람들 살잖아. 이미 한 민족이라 해도. 남한에도 개인들이 산다고. 끝으로 그 사람들 전제주의 공산주의 통치 하에 있지 않은 걸 모두 다행으로 여길 걸. 왜냐하면 그 체제는 번영은 없고, 공격 무기들을 만들 뿐이었으니까.
Maastricht043: Nou, je zegt het alsof het eventjes op een zaterdagmiddag geregeld kan worden. Kom zeg. Een regime opdoeken. Alweer? Vindt je dat we er zo goed in zijn geworden dan? / En wie de rechtmatige eigenaar is van Korea? Serieus? [...] Schei toch uit.
- 무슨 그런 일이 토요일 오후에 처리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말하는구나. 체제를 날려버린다고? 다시? 너는 그럼 우리가 잘 될 거라 생각하니? / 그리고 누가 한국의 정당한 주인이냐니? 레알?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나눠 살아.
소개한 댓글들은 알아서 봐주시길. 댓글은 그 작성자의 현실인식을 보여줄 뿐, 판단은 독자가 분별력있게!
왕과 왕비가 있다는 것을 막연히 멋있게 여겼던 적이 있었다. 어릴 때 동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 뭔가 우아하고 아름답게 전통을 수호하는 중심점이 있다는 것은 썩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입헌군주제인 네덜란드에서 왕가의 존재를 보고 느끼니, 뭐랄까, 거부감은 아닌데 낯설었다. 동화에서 볼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아무래도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와서 그런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 평등하다는 것을 인식한 상태에서 살다 보니, 뭔가 눈에 보이게 상속되는 특권계층의 존재가 낯설었던 거다. 머리로는 '그래도 네덜란드는 민주주의의가 더 강한데. 입헌군주제여서 왕비/왕이 정치적 실권을 휘두르는 것도 전혀 아닌데' 이해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것을 대할 때 그 낯섬을 알리는 감정의 신호는 분명했다.
왕가가 있는 네덜란드 산다고 해서 그렇다고 막 독재나 전제주의적 의사결정의 기운을 느끼거나, 지위나 나이 있는 분의 권위 의식을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쉽게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도 나이 있거나 지위 있으신 분들이라고 다 권위주의적이라고 일반화하긴 어렵겠다. 개인 간 편차가 큰 것 같다. 아님 내 주위에 괜찮은 어른들이 꽤 있어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에서 사소하지만 인상 깊게 관찰한 풍경이 몇 개 있다.
대학에서 교수와 미팅할 때 내가 교수에게 내가 커피 떠 줄 필요가 없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교수가 학생에게 '커피 마실래? 차 마실래?' 물어보며 잔에 따라주는 건 좀 의외였다. 연구 설계를 논하던 소규모 워크숍 중이었다. 한 학생이 먼 북쪽 도시에서 오느라 워크숍에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다른 학생이 발표하는 동안 그 도착한 학생에게 교수가 '오는데 오래 걸렸지. 우리 이거 진행 중이었어. 앉아. 뭐 마실래? 자, 여기, 커피.' 이런 상황이란... 물론 일반 수업은 지각 시 경고가 있을 수는 있는데, 워크숍에서의 이런 교수 태도는 지도 교수님을 이름으로 부르며 나름 적응했다고 생각한 내게도 새삼스러웠다. 또 다른 일례는, 지도 교수님이 건물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와 오며 가며 인사하고, 화장실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던 일상의 모습. 또 다른 일례는, 기차 안에서 어느 부서장과 부하 직원이 합석하여 이야기 나누던 모습. 기차 바깥 풍경에서부터 휴일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대해 격의 없이 이야기 나누는 내용이 들리길래 나중에 물어보니 재정부(Ministerie van Financiën)의 한 부서가 연례 친목 도모 나들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실 네덜란드 알렉산더왕도 가족이 다 함께 사는 바세나르(Wassenaar) 동네에서 줄을 서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네덜란드인이라면 누구나 이용하는 슈퍼마켓 브랜드 '알버트 하인(Albert Heijn)'에서 장을 본다. 탈권위적인 모습을 일부러 보이는 것이다.
각자가 개인으로서, 동등한 인격체로서 존중받고, 존중하는 문화 속에서 살다 보면, 왕이 있든 말든 별 상관 안 하게 되는 게 아닐까? 저 사람도 나랑 비슷한데, 왕가의 대표로 살려면 그 왕도 그 의무를 다 해야 하니 저건 쟤의 역할이겠지, 이렇게 넘기며 불만을 품을 이유도 없어지는 게 아닐까?
각자가 살고 싶고, 말하고 싶고, 하고 싶은 대로 취향을 발휘해도 되는 사회, 각자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여러 선택의 폭 중에 고민하여 결정 내려간다는 느낌이 드는 사회라면, 일상이 보다 더 민주적일 수 있게 각각의 자치 단위(개인, 가정, 결사체, 일터, 지방정부)가 조직되고, 개인이 숨 쉴 공간이 있는 사회라면, 괜찮은 것 아닐까? 개인이 인격체로 존중받고 존중주는 바탕 위에서 무슨 일을 할 때 여럿이 함께, 공동 통치하는 경험을 축적해가는 사회. 일상과 일터에서 좀 더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경험하는 사회.
이 곳에서는 비영리 단체나 재단, 주택협회, 또 지방정부의 운영을 거의 대부분 모두 bestuur로 부르는 이사회 혹은 집행부, 즉 복수의 공동의사결정자로 구성된 공동통치체가 맡는다. 의사소통 능력과 토론과 타협, 협업의 기술이 없으면 어떤 조직의 책임을 맡을 수 없는 구조, 일이 돌아가게 할 수 없는 구조이다. 1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설사 카리스마있는 1인이더라도 같이 일할 줄 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그 이사 혹은 집행부원의 마음을 얻어야 하고 설득해야 한다. 오히려 함께 일함으로써 일이 되게 만드는, 문제를 해결하는 지도력이야말로, 권위를 앞세우지 않는 지도력이야말로 권위 있게 여겨진다.
네덜란드 정치체제와 사회를 바라보며 느끼는 점은, 우리나라가 특권계급의 제도 창설이 위헌인 민주공화국이라는 점이 좋고 헌법이 지향하는 사회상도 좋으나, 진정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침투 정도, 농도라는 점이다. 상식적이지만 절실한 깨달음이다. 좋은 지향점을 가진 건 좋다. 실천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바로, 남북의 체제가 각각 양립한 상태에서 교류의 폭과 종류와 깊이를 더해가게 될 터인데, 그 모든 것이 남한과 북한 체제 각각이 보다 더 민주적으로 진화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집중된 금권과 금권으로 매수한 권력 바탕 위에 일하는 사람의 인격까지 좌지우지하며, 사회적인 일상(가족과 밥 먹고 이웃과 말하는 일상)을 누리지 못하게끔 쪼아대는 자본의 힘이 커진 남한. 기본적인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북한. 그런 북한에서조차 시장 영역, 장마당의 교역은 확대되고 있다. 내가 생산한 재화(물건이나 서비스)를 팔고, 대가를 받고, 주고받는 것은 생존 본능이다. 문제는 어떤 사회적 분업과 협업이 이뤄지는 시장 체제를 만드느냐이다. 즉, 공정한 거래가 이뤄지는 시장 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 이다. 남한은 남한대로 재벌 일감 몰아주기 같은 예를 보면 공정 시장에서 멀다. 자본과 노동의 거래가 더 공정해질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부동산소유권(부동산투자)에 대한 보상과 노동에 대한 보상을 더 공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은 북한대로 평양 아파트 개발과 부동산 붐의 수혜, 생활수준 개선의 혜택을 평양 시민에게 제한하고, 그 밖에 있는 이들은 여러 기회로부터 배제된다고 한다. 당이 투자를 승인해줘야 투자도 하고 수출입도 할 텐데... 남한에 사는 서민은 기업 권위주의, 행정 권위주의로 고통받는 동안, 북한에 사는 서민은 당-파벌 독재로 고통받는다고 하면, 지나친 단순화일까?
북한에 사는 나와 동갑인 누군가이든, 남한에 사는 내 또래든,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인격체로서 개인의 생활과 가정과 일터와 그 외 자발적 결사 모임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고, 더 개성 있는 목소리를 내도 괜찮은, 그 뜻대로 삶을 조직해나가도 괜찮고, 그럴 수 있는 사회를 간절히 희망한다. 일상에서 땀 흘려 일해 먹고사는 모든 평범한 사람 각각이 그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안전감과 주권 의식을 가질 수 있는 사회, 온전히 나로부터 시작해 또 다른 이들과 함께 결사와 협력, 생산과 교역의 자유를 누리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두어들입니다. (야고보서 3:18)
> Waar in vrede wordt gezaaid, brengt gerechtigheid haar vruchten voort voor hen die vrede stichten. (Nieuwe bijbelvertaling)
> Gerechtigheid is een vrucht, die in vrede wordt gezaaid voor hen, die vrede stichten. (NBG)
> The seed whose fruit is righteousness is sown in peace by those who make peace.
> You can develop a healthy, robust community that lives right with God and enjoy its results only if you do the hard work of getting along with each other, treating each other with dignity and honor. (The Message)
역사 속을 행진해가는 신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그가 채 다 지나가기도 전에 그 옷자락을 잡아채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정치가의 임무이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1815-1898)
> Het is de taak van de staatsman om te luisteren naar Gods voetstappen die door de geschiedenis lopen en te proberen om de slippen van zijn jas te grijpen als hij voorbijkomt.
* staatsman: leidend politicus met veel ervaring en aanzien. 경험 많고, 명예로운, 지도력 강한 정치인.
> The statesman's task is to hear God's footsteps marching through history, and to try and catch on to His coattails as He marches past. (Otto von Bismar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