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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순 Feb 22. 2022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책을 잊지 않기 위한 필사


지난 주말 하루 내리 집에 처박혀서 읽었다.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는 책이라 책 읽는 게 조금 버거운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다.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총 8개의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이다. 이 중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비정상적이게 돌아가고 있는 지구인들의 행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 이야기 속 세계와 그 인물들의 비정상적인 모습들을 보고 속으로 욕하다가 문득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자격이 있다고?'하며 나를 돌아보게 된다. 정세랑의 소설을 읽으면 늘 마음 한구석에 어떤 죄책감이 자리 잡는다. 이번 책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막 살았구나, 지구는 생각지도 않고 내 멋대로 살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정세랑의 책을 읽는 사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생각에 공감할 것이다.



정세랑 책만큼 소설다운 소설이 있을까. 현실에서 벌어지는 문제점을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로 굉장히 현실과 가깝게, 현실처럼 이야기해 준다. SF 작가답게 새롭고 신비롭고 뾰족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지금부터는 필사한 내용들을 옮겨둘 거라 좀 길 것이다. 굳이 다 보지 않아도 된다. 





11분의 1



Page. 21


기준 오빠는 필드에 다녀오면 작은 화석을 하나씩 제게 선물했어요. 그냥 지나가다가 "유경아. 이거 가질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이에요. 자세히 봐야 화석 같은 돌멩이들이었어요. 자연사 박물관에 가면 기념품점에서 2만 원이면 살 수 있는 흔한 화석요. 고사리 이파리가 흐리게 보일락 말락 한 것들. 혜정 씨도 본 적 있죠? 저는 빈 초콜릿 박스에 그 화석들을 모았어요. 박스가 다 차기 전에 기준 오빠를 좋아하게 된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아니, 역시 화석 때문은 아닌 것 같아요. 그게 우리 둘의 기분 좋은 의례이긴 했지만요.


누구와도 좀처럼 말다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 좋아했어요. 농담으로라도 비열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요.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배려해 주고 신경 써주는 사람이라 좋았어요. 오빠는 자주 아팠는데, 그래서인지 제가 조금이라도 아픈 날이면 귀신처럼 알아채곤 했었어요. 오빠가 얼마나 아팠는지 알았더라면, 좋아한다고 더 일찍 말했을 텐데.




Page. 39


우주선의 문이 닫힐 때 저는 남선 오빠에게 고함을 질렀습니다.


"너 그러다 망한다? 그렇게 원칙도 윤리도 없이 막살다가 망한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지구가 끝난 거다?" 끝까지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더라고요. 재수 없어. 저는 고함을 지르다가 조금 울었습니다. 기준 오빠가 장갑 낀 손을 뻗어 제 손을 잡아주었어요.


이제 격렬했던 흔들림은 다 끝났습니다. 선내에서 4년 동안 둥둥 떠다닐 일만 남았습니다. 그나마 몇 면 전까지는 8년에서 10년이었는데 줄어든 거라네요. 울음을 그치고 이 이메일을 씁니다.


혜정 씨, 보고 싶을 거예요. 저는 원래 사람을 안 좋아하는데, 열한 명 중의 한 명 정도만 좋아하는데, 혜정 씨는 그 한 명 쪽이에요. 혜정 씨를 좋아해요. 좋아했어요. 함께 점심을 먹을 때가 하루 중 제일 나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말해도 됩니다. 천체투영관에서 태양계 파트를 틀어주실 때, 목성과 목성의 위성들을 설명하실 때 말해도 됩니다. 저기에 친구가 산다고. 갈릴레이의 위성 중 하나에 친구가 산다고요.


우리가 다시 만나 점심을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리셋




Page. 45


 무엇보다 멸종이 끔찍했다. 멸종, 다음 멸종, 다다음 멸종. 사람들 눈에 귀여운 종이 완전히 사라지면 '아아아' 탄식한 후 스티커 같은 것이나 만들었다. 사람들 눈에 못생기거나 보이지 않는 종이 죽는 것에는 개뿔 관심도 없었다. 잘못 가고 있었다. 잘못 가고 있다는 그 느낌이 언제나 은은한 구역감으로 있었다. 스스로 속한 종에 구역감을 느끼기는 했어도, 끝끝내 궤도를 수정하지 못했다.


모닥불 가의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나를 죽이고 싶어 할지 모르지만, 지렁이들은 제때 왔다. 우리가 다른 모든 종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것을 하기 전에 와줬다는 게 감사할 정도다. 궤도는 가까스로 수정되었다. 나는 배낭에 들어 있던 은박 담요를 덮고 잠들며 가끔 웃는다. 내가 죽고 다른 모든 것들이 살아날 거란 기쁨에, 기이한 종류의 경배감에.



Page. 62


 "헬기 몇 대 말고 나한테 남은 건 거의 없어. 가난해. 청빈하다고." 


 "음... 그것도 꽤 부자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이런 시대엔 더욱."


 "아냐, 그렇지 않아. 회사 지분도 날아갔고 은행에 있던 돈이나 부동산들도 다 소용 없어졌어. 사실 그 모든 걸 내가 관리했던 것도 아니니까 되찾을 방법도 없고. 정말 하나도 소용없어졌어."


 "대체 왜 홀가분해 하는 거예요?


 "나는 못 했지만 누군가는 멈췄어야 했어. 화석연료 산업을, 거기서 파생된 다른 거대 기업들을, 여기저기에 기부와 후원을 하고 또 하면서도 새벽마다 죽고 싶었는데... 너희 엄마들이 아니었으면 정말 죽어버렸을지도 몰라. 그런데 이제 얼마나 깊이 잠드는지. 내 가족의 죄가 씻겨나간 것 같아."


 "저 말고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면 더블데이 국장에게 멱살을 잡힐걸요. 지렁이들이 내려온 게 반갑다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어쩌면······. 아니, 아니야. 너는 엄마들을 잃었는데 내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왕자는 특유의 매부리코를 찡그렸다. 


 "아니에요. 엄마들도 계속 걱정하고 있었어요. 세상이 시궁창으로 가고 있다고요. 엄마들이 끝까지 살지 못한 건 슬프지만 지렁이가 일부러 죽인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나치게 가까이 간 건 엄마들이었다는 거 알아요."


 "난 네 엄마들을 정말 좋아했어. 탁월한 사람들이었지."


 "그것도 알아요."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대화였기에 남겨둔다.



Page. 81


 지하 도시 초기에 수인성 전염병에 몇 번 크게 피해를 입은 후, 울며 겨자 먹기로 사람들은 가축의 개념과 실재에 마침표를 찍었다. 오리를 죽여 개에게 먹이는 걸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마지막 반려동물들이 평화롭게 수명을 다한 후 그것으로 끝이었다. 인류가 다른 종들을 노예로 삼고, 학대하고, 말살했기에 지렁이들이 온 거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인류는 더 이상 인류를 위해 다른 종들을 굴복시키지 않는다. 울타리 밖의 돼지들을 몰래 바라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Page. 86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리셋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분야 중 하나였다. 한때 2백여 개의 채널이 있었고, 매주 다른 영화가 영화관에 걸렸다는 걸 믿을 수 없다. 지렁이들은 스튜디오들을 삼켰고, 카메라들을 삼켰다.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소품을 만들 여유는 더 이상 없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새 프로그램이 나오면 첫 에피소드는 열렬한 환호 속에 상영회를 한다. 과거에 만들어진 시리즈들도 종종 소비되긴 하지만 사실 좀 시들하다. 온전하게 보존된 경우보다 듬성듬성 에피소드가 빠진 쪽이 더 많고, 리셋 이전의 콘텐츠들은 폭력적인 장면이 많아서 괴로울 때가 잦기 때문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기껏 만든 케이크를 바로 쓰레기통에 넣거나 하는 모습을 우리는 웃으며 볼 수 없다. 밀집 사육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인간만을 사랑하는 모습은 어딘지 속을 불편하게 한다. 그 모든 재앙을 불러온 과잉 사회의 면면이 괴로워서 줄거리에 집중하기 어려운 것이다.



Page. 91


 "물 반 물고기 반이 농담이 아니었군요. 이렇게 많아도 되는 걸까요?"


 "뭐, 이제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겠죠."


 종차별 금지법이 시행되며 마지막 양식장이 철거되었고, 이제 인류 문명을 물고기 한 마리도 가두고 있지 않았다. 바다를 식량창고로 여기던 풍습은 사라졌다. 묶인 생명도 갇힌 생명도 없이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다. 종종 지진이나 화산이 좀 방해하지만.


 "재앙을 만난 사람들은 도와주러 가고 있잖아요. 그거 문명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소리예요."


 누군가 말했고 나는 리셋 이전의 괜찮은 부분은 보존되었다는 그 의견에 동의했다.




리틀 베이비블루 필




Page. 134


HIBL1238이 사진 영상 기기 업계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업계 마케팅 담당자들도 마찬가지여서, 데이터 분석이 한참 늦어졌다.


그러니까 어린 연인들이 드디어는 고급 기기를 구하지 않고, 두 사람의 가장 소중한 순간에 알약을 삼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기념일을 맞거나 여행을 가거나 하여간 둘이서 기억하고 싶은 날에 함께 불법 약물을 삼키는 행위는 그럴듯했다. 이들은 수험생 시절 이미 알약을 사용해 본 세대였다.


···


첫사랑이 조금 더 많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대개 사랑이 바래는 것은 소중한 순간들을 잊고 서로를 함부로 대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므로, 이제 잊히지 않는 기억들로 사랑은 유지되었다.


···


"그때 기억나?"같은 말은 잘 하지 않게 되었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 서로 눈만 바라봐도 어느 때를 재생하고 있는지 아니까.


···


일부 영화 팬들도 알약을 삼키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혼자 상영관을 통째 대관하거나, 완벽한 상황에서 블루레이를 감상하고는 영원히 잊지 않았다. 좋아하는 영화를 언제든 머릿속에서 재생할 수 있었다. 긴 영화를 볼 때는 두 알이 필요했다.


"죽고 나서도, 땅 밑에서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기분이야."


한 영화광이 말했다.



Page. 137


인간의 몸이란 일단 고통을 최대한 잊도록 설계되어 있다. 개인별 편차는 있어도 기본적으로는 그러하다. 고문기술자들은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생각했다. 같은 고통이라도 잊지 못하게 만들면 어떻게 될까? 결과가, 효과가 다르지 않을까? 그 편리하다는 알약을 써볼까? 고문하고 또 고문해도 꺾이지 않는, 절뚝거리며 또 저항해오는 자들의 회복 기능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게 가능할까? 고문 기술자들에겐 보통 인간에게 있는 많은 자질이 없었지만, 실험 정신만은 넘쳤다.






목소리를 드릴게요






Page. 196


 "저 언니가 죽는다고 해도, 언니가 죽어서 딱 좋을 정도로 숙성된다고 해도 먹지 않을 정도로 언니를 좋아해요. 그런 낭비를 할 만큼 좋아한 사람 없었어요, 지금까지."


 "아아, 그래······."


···


 "들키면 너도 위험해질 수 있어. 지금보다 나쁜 상황에 놓일 수도 있어."


딱히 대답 없이 구울 소녀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위험해지지 않을 거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위험해져도 괜찮다는 뜻인 것 같았다. 연선이 아픈 와중에도 빗겨주고 땋아준 수현의 머리가 함께 흔들렸다.



Page. 215


 언젠가의 저녁, 연선은 수용소 앞마당의 벤치에서 고작 맥주 두 캔에 취해 느슨하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경모의 담배를 뺏어 들고는, 피우지 않고 머리 위로 들고 공중에 연기로 그림을 그렸다. 혹은 글씨를 썼는지도 모른다. 춤을 추는 것 같은 동작이었지만 바라보는 내내 승균은 담뱃재가 연선에게 떨어질까 불안했고 그 노심초사가 무색하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수용소가, 세계가 연선을 사랑해서 담뱃재조차 달지 않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참 이상한 존재. 우주의 사악한 톱니바퀴에 으스러지지 않는 모호한 존재.


 연선을 만나러 갈 것이다. 찾아가면 그 알 수 없는 얼굴로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겠지. 수술대는 추웠고, 의사는 어쩌면 의사가 아니라 정부가 보낸 사람이라 수술을 하는 척 승균을 죽일 수도 있겠지만, 승균은 미소 지었다. 마취약기 들어올 때, 의사는 숫자를 거꾸로 세라고 했는데 승균은 전혀 엉뚱한 말을 남겼다.


 하필이면 사랑이 일목 대상인 일목인처럼.


 물거품이 될 각오가 선 인어처럼.


 "목소리를 드릴게요."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Page. 236


 화살을 메기고, 70미터 안에 들어온 좀비의 머리를 꿰뚫는다. 하루에 한 놈씩만.


 가장 증오하는 자들을 먼저 쏠 줄 알았다. 체대라 해서 괜히 단체 기합과 폭력을 일삼았던 꼴통 선배들이나, 술자리에서 정윤의 귀를 만지작거렸던 교수들, 그러나 막상 정윤이 쏘기 시작한 것은 반대로 호감을 느꼈던 상대들이었다. 존경했던 교양과 강사, 자매 같았던 동기들······. 정윤은 그들의 변한 모습을 견디기 힘들었다. 세상 어딘가에 엄청나게 똑똑한 과학자나 의사가 남아 있다고 해도 치료약은 만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미 살점이 저렇게나 썩어들어 갔는데 무슨 수로 되돌리겠는가? 좋아했던 사람들을 제대로 된 화살로 끝내준 것엔 후회가 없다. 화살이 떨어지고는 세탁소 철사 옷걸이를 펴고 구부려 조악한 화살을 만들었다. 옷장에 그런 옷걸이가 가득 있었고, 아무래도 명중률은 떨어졌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싫어했던 사람일수록 아껴두었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날 쏘았다.



Page. 241


 낯가림이 그나마 덜한 정윤이 다른 팀원들에게 등이 떠밀려 물었다. 승훈은 대답도 없이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압권이었다. 그냥 있을 땐 아무리 봐도 미남은 아닌 승훈이었지만, 웃으면 미남이 되었다. 종종 그런 웃음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반경 70미터쯤이 환해지는, 얼굴 구조가 아예 바뀌는 듯한 대단한 웃음 말이다.


···


 팔이 문제가 아니라 또래 남성들의 미성숙한 반응이 귀찮았다. '나보다 몸이 좋네? 남자보다 좋으면 어떡해?'하며 열등감을 드러내거나, '만져봐도 돼? 찔러봐도 돼?'하며 감탄인 척 반복해서 조롱하거나 어느 쪽이든 귀찮았다. 귀찮아서 피하고 싶었다.


 "안 더워요?"


 "괜찮아요."


 그러나 정윤은 이마가 벌게질 정도로 더웠다. 싸구려 폴리에스테르 카디건은 통기성이 나빴다. 싱글싱글하며 승훈이 다시 물었다.


 "그럼 열이 나는 거예요? 여름 감기?"


 새끼, 쓸데없이 쪼개긴. 정윤이 카디건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나가떨어질 거면 빨리 나가떨어져라, 하는 심정이었다.


 승훈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가만히 감탄했다.


 "팔이 아니라 조각 같아요."


 고개를 가까이 기울여 와서, 팔등에 잔털이 오소소 섰다. 들킬까 봐 얼른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날의 나머지는 나쁜 예감이 들지 않는 좋은 데이트였다.



Page. 250


 나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삭을 만큼 삭아서인지, 온도나 습도의 도움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문틈을 파고드는 승훈의 손을 고무장갑 낀 손으로 잠시 잡았다. 둘 다 악력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언제나 먼저 손을 내밀어줬었다. 먼저 웃어주고, 먼저 바라봐주었다. 마음을 다 열지 못해 걸쇠를 걸어두고 장갑을 끼듯 방어를 했던 건 정윤 쪽이었다.


 "마지막까지도 이래서 미안해."


 정윤은 승훈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려 애썼다. 언젠가 그렇게 정윤을 똑바로 보던 눈을, 잠깐 함께한 것뿐이지만 승훈을 보면 긴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화살이 X링에 꽂히리라 확신하는 순간처럼 알 수 있었다. 좋은 예감이 적중하리라 믿었던 존비 시대 직전의 오만함은, 귀여운 구석마저 있지 않았나 했다.


 "난생처음으로 귀여웠었지."


 정윤은 승훈 특유의 미소를 따라 하려 노력했다. 살점이 사라져 잇몸이 그대로 드러난 승훈도 어떻게 보면 웃는 것 같았다.


 내가 보낸 마지막 여름이 너랑 함께여서 다행이야.


 내가 쏘는 마지막 과녁이 너라서 다행이야.


 좀비가 된 승훈 앞에서마저 쑥스러워 말들을 잔뜩 삼키고, 정윤은 하나 남은 제대로 된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어깨와 팔이 타는 것처럼 당겼다. 온몸이 스트링이 된 것 같았다. 끊어질 듯한 그 상태가 영원할 수 있다면, 정윤은 바랐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마지막 화살은 적중했다.


 승훈이 무너져 내렸다.


 그 해어진 무릎이 바닥에 떨어졌고, 나머지 관절들이 누더기에 싸여 흩어졌다. 승훈의 머리에서는 전등같이 가벼운 것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승훈을 이루던 많은 부분은 이미 먼지가 되어 저 밖에 있는 모양이었다. 분명 빛나는 먼지일 것이다. 메달처럼 반짝이는.


 "나도 곧 그런 먼지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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