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하고 산다>를 읽고
“All happy families are alike; each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 안나 카레니나 (펭귄클래식코리아 번역 버전)
<별일, 하고 산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생각났다.
무려 11명의, 그것도 배경/상황/업의 종류가 모두 다른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마치 [행복한 가정]의 표본들이랄까. 업을 대하는 태도에의 '단단함', 어떻게든 자신의 일을 더 낫게 만들어 보겠다는 즐겨보겠다는 '향상심', 그리고 어디에 서있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목표의식'의 마인드.
올해 3월 즈음, 뒤를 열어둔 퇴사를 고민했을 정도로 심각한 번아웃과 고민의 시간을 겪었다. 10년 차를 지나는 PM으로서 그리고 직장인으로서 업의 동기, 도메인에 대한 핏, 이후에 대한 생각들이 휘몰아치듯 한꺼번에 몰려왔고 몇 달 동안 수도 없이 울고 웃던 시간이었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짐) 덕분에 11명의 말 한마디가 내게는 더 공감과 자극이 됐다. 내가 선 이곳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거름이 됐달까.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보려고 한다.
일을 한다는 것이 뭘까? 으레 생각하듯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과정'일까? 물론, 이것만 잘 처리하고 끝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리 단순하게만은 보이지 않는다. 가장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일은 사람이 한다는 것. 사람이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갈등이 생길 수 있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부딪힐 상황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일하는 과정은 '업무의 본질' 외적인 것과 끊임없이 맞서야 하는 과정에 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 방법일까? 일잘러들은 이야기한다. 아니라고. 상황에 대한 마인드 컨트롤. 상황은 바뀌지 않지만 대하는 마음이 달라진다고. 그리고 결국 내가 해낼 '결과물'에 집중하자고.
일터에서 힘들 땐 나를 힘들게 하는 게 일 자체인지 사람이나 상황인지 물어봐요. 일 바깥의 것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면 동그랗게 굴려서 작게 또 작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이유 없이 날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도 조그맣게, 언젠간 끝날 마감의 압박도 조그맣게. 그렇게 작게 만들어 시야에서 치우면, 다 흘러가요. 그렇게 17년을 버텼죠. ... 쉽게 탓하고 떠넘기며 일하는 사람들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거든요. 하지만 제가 만든 책들은 다 남았죠. (이연실, p.110)
해도 해도 부족한 나를 매일 발견해. 13년 차이지만 아직도 내 일이 어려워. 도무지 능숙해지지 않는 종류의 일이 있다면 아마 이런 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루에도 변수와 오류가 수십 개씩 터지는 환경에서 완벽한 통제권을 갖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거든. ... 연차가 쌓이며 딱 하나 능숙해진 게 있다면 돌발 상황을 대하는 마음가짐 정도야. 스스로를 과하게 자책하지 않고, 다음만 생각하는 것. (이미준, p.291)
일은 원래 어려운 거다. 일잘러들의 인터뷰에서 저 말에 대한 공감이 나올 때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행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하지만 '어렵다'에서 끝내느냐, '어렵지만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느냐에 따라 결과물의 차이도 발생한다. 다만 이들의 중요한 것에 집중할 줄도 아는 듯해 보였다. 중요한 일에 집중하고,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어떻게든 계속 시도하는 것.
일이 매번 어려운 이유는 매번 '새롭게 하기'때문이 아닐까요. 대충 해도 중간은 가는 공식을 되풀이하지 않기 때문에 (이연실, p.113)
광고에도 콘텐츠 만들 때의 영혼을 실으니 시청자 반응이 특히 좋았죠. 어쩌면 영준 씨는 본능적으로 알았는지 모릅니다. 광고투자 대비 효율이나 가성비에 매몰되면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어려워진다는 사실을요. (정영준, p.117)
회사에 불만을 가질 수 있어요. 욕할 수도 있어요. 근데 거기서 끝나면 내 성장은 딱 거기까지죠. 어떤 환경에서든 주어진 일을 잘 살피다 보면,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지점이 한두 개쯤 꼭 있거든요. 저는 그런 포인트를 파고들었어요. 떨어지는 일들을 쳐내는 데 급급해하기보다는 힘닿는 대로 고민했죠. '어떻게 다르게 할 수 있을까?' 새로 배운 게 있으면 바로 적용해 봤고요. (이미준, p.296)
사람마다 일의 동기가 다를 거다. 어떤 이는 돈일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성장, 어떤 이는 보람. 나에게 있어 일의 동기는 '북극성'인 것 같다. 내가 이 일을 왜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있다면 어떻게든 끌고 갈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기지만 그게 희미해지는 순간 일을 할 동기를 확 잃어버린다.
내가 생각하는 북극성은 회사의 비전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다. 본인이 정의하고, 이 직업을 끌고 나감에 있어서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책에서의 일잘러들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본질로 정의하기도 하고, '우리의 일은 세상에 더 많은 웃음을 만드는 것'이라고 단언있게 말하기도 한다. 나의 일의 비전은 무엇이었지?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서비스를 만드는 것' 그게 아직도 유효한가를 되짚어보게 만들었다.
"저는, 웃음이 없으면 세상이 영영 분노로 가득 찰 거라고 생각해요. 저희도 실패할 때가 있겠죠.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계속할 거예요. 우리의 일은 세상에 더 많은 웃음을 만드는 거니까" (정영준, p.193)
삶 속에서 일이 어떤 존재감으로 자리하는지 다시 보게 됐어요. 저에게 있어 일의 본질이란 누구도 대체할 수 없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에요. 다른 걸 찾는 게 불가능해 보였어요. 기꺼인 온 힘을 퍼내 달릴 수 있으려면, 달리는 그 길이 반드시 내가 만든 길이어야겠더라고요. (권정현, p.36)
제가 세상 밖에 벌여놓은 책들이 저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해요. 나를 배신하지 않고 지탱해 줄 내 삶의 기둥. 회사는 수단일 수 있지만 일은 수단일 수 없죠. 내가 하는 일은 나의 정체성이니까. '워라벨'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지만, 저는 일과 삶이 무 자르듯 나눠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삶 안에 일하는 내가 있는 거니까 (이연실, p.108)
책을 덮고 나니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대학교 4학년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국문과를 나와서, 이 과의 진로는 하나인 줄 알았던 시절. 취업하려면 경영학과로의 복수전공은 필수라는 편견도. 하지만 그새 10년이 넘은 시간이 훌쩍 지났고... 지금은 이제 그런 전공과 편견들이 나의 앞으로를 가둬서는 안 된다는 확신 하나만큼은 생겼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11명의 인터뷰이는 모두 자기의 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낸 사람들이다. 모두 전공에, 지식의 틀에, 상황에 자신들을 가두지 않고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향해 걸어갔다. 배경이 어떠하든 업을 대하는 태도가 명확하고, 어떻게든 더 나은 길을 찾아 거침없이 항해하고, 내가 어디에 서있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분명한 나침반을 가진 이들. 그런 값진 경험을 누군가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사회 초년생, 혹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별일, 하며 산다> 이 책 속에서 조금이나마 해답을 찾아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