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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 파일럿 Sep 02. 2023

어느 조종사의 신체검사



얼마 전에 신체검사를 받았다.


조종사들은 1년에 한 번씩 무조건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고, 비행을 하기에 적격 하지 않은 검사 결과가 나오면 해당 증상이 클리어되기 전까지는 비행 임무에 투입이 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청력검사에서 꼭 들어야 하는 해당 주파수 음역대를 듣지 못한다든지, 시력검사에서 꼭 봐야 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든지, 혹은 혈액, 심전도 검사 등 어느 하나 비행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판정을 받으면 비행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밥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신체검사는 매년 나를 긴장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신체검사를 통과하기 위해 신체검사 직전 무리하게 운동을 하는 것도 좋지가 않다. 습관처럼 하는 꾸준한 자기 관리와 운동, 그리고 어느 정도의 절제가 필요하다.


다행히 웨이트 운동을 좋아해서 평소에 운동을 꾸준히 하지만, 유산소만큼은 웨이트 운동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명 벌크업을 하고 있다는 핑계로 살크업을 하는 중이며, 살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뺄 수 있지! 하면서도 그 마음을 도통 잘 먹지를 않는다.


유산소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유산소가 왜 예전에는 고문도구로 사용되었는지 심히 공감할 정도로 지속하기가 어렵다.


그동안의 신체검사를 보면, 다행히 수치들은 정상범위 내에서 움직이지만, 유독 눈에 띄는 수치가 있었으니, 바로 체지방량이었다. 맨날 웨이트만 하고 유산소는 꾸준히 안 하니 지방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몸에서 쌓여가고 있던 것이다.



라고 쓰고, 나름 유산소 하지 않았나? 하고 보니 5년동안 고작 286km를 달렸을 뿐이다



역사는 반복되어 왔던 것처럼, 사람 또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나의 바보 같은 역사를 나열해 보자면, 매년 8월마다 돌아오는 신체검사에서 나의 심정 변화는 이렇다.


8월 신체검사 당일,

신체검사가 끝나고 나온 각종 수치들을 항공 전문의 선생님과 함께 보며 잔소리를 듣는다 이야기를 한다. 이러이러한 수치는 줄이는 것이 좋고, 이러한 수치는 관리가 잘 되어 있고 등등. 병원 입구를 나오며 나는 다짐한다. '내년에는 꼭 수치를 더 좋게 만들어서 칭찬을 들어야지.'


9월~12월,

아직은 수치가 좋게 나왔으니, 유산소는 내년부터 할까? 왜냐하면 세상에는 맛있는 음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1월~3월,

연초라 명절도 있고, 약속도 많으니 2분기부터는 내가 꼭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뱃살도 없애리라. 그리고 사실 남자는 벌크업 아닌가? 뱃살은 조금 있어도 된다.  겨울에는 추우니 지방의 파워로 버티는 것이다.


4월~6월,

날씨가 너무 좋아서 약속을 잡지 않을 수가 없다. 아직 신체검사가 조금 더 남았으니 관리를 조만간 시작할 것이다. 근육도 같이 커져가고 있으니 괜찮다. 지방 컷팅은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다.


7월,

신체검사가 한 달 정도 남았으니, 오늘까지만 먹고 내일부턴 뛰어야겠다.


다시 돌아온 8월 신체검사 당일,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내년에는 꼭 더 관리 잘해서 오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신체검사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나 이루었으니,

작년에 뱃살 둘레로 한 소리를 들었는데, 올해 웬일인지 별말씀이 없으셨다.

인바디를 하고, 몸무게를 계측하고, 뱃살을 측정하는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허리둘레는 작년보다 괜찮아지셨고... 근육량, 지방 모두 조금 증가하셨네요?"

"선생님, 허리둘레가 정상으로 나왔어요?"

"네."


허리둘레가 정상이라니, 그럴 리가 없는데.

최근에 먹은 맛있는 음식들이 나의 지방으로부터 쉬이 탈출했을 리가 없을 텐데.

그동안 게을리 한 유산소들의 시간이 산증인처럼 서 있는데.


무슨 일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최근에 확실히 야식을 먹는 횟수도 많이 줄였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한 통 다 퍼먹던 아이스크림도 그 횟수가 많이 줄었고, 초콜릿을 먹는 횟수도 줄고... 어쨌든 식사 습관에 변화가 온 것이 허리둘레를 줄이는데 도움이 된 것이다. 운동의 73%는 식단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아, 매번 뱃살이 고민이었는데 이런 나의 발전에 스스로를 칭찬하는 와중 선생님의 다음 말씀,


"다음에는 지방만 조금 더 줄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유산소 열심히 할게요. 근데 혹시 지방량은 그대로인가요?"

"작년보다.. 조금 더 증가하셨네요?"

"선생님, 뱃살 둘레는 그대로인데 지방이 증가한 건 어느 부분이 찐 건가요?"


수치를 보시더니,


"골고루요."

"아, 골고루... 죄송합니다."


그렇게 골고루 쪄버린 나의 살을 빼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미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9월은 다음과 같은 달이다.


9월~12월,
아직은 수치가 좋게 나왔으니, 유산소는 내년부터 할까? 왜냐하면 세상에는 맛있는 음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무려, 맛있는 음식을 먹는 달이다.


정말 세상에는 맛있는 음식이 정말 많다.

미슐랭이라는 것을 들어 보았는가. 그중 별 3개의 의미는 요리가 매우 훌륭해서 그 식당에 가기 위해 여행을 떠나 정도의 가치가 있는 식당이라고 한다. 무려 음식을 먹기 위해 수 시간을 날아가는 행동이라니. 그만큼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은 엄청난 가치와 의미가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명과 합리화를 계속한다면 늘어나는 것은 탐욕스러운 나의 지방들과 걷잡을 수 없는 식욕이다. 이번에는 어느 정도의 절제와 자제력으로 꼭 체지방량을 확실히 줄여서 내년에는 당당하게 의사 선생님을 마주할 것이다. 한층 더 줄은 허리둘레와 정상범위 내로 들어온 체지방량이 적힌 수치들을 의사 선생님 앞에 당당히 보이며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 러닝화도 샀다.

근데 요즘 뛰기에 한국 너무 덥지 않은가?


내년에는 닳고 닳아야만 하는 러닝화


아니 정신 차려야 한다.

더울 때도 뛰어야 한다.


내년에는 쌓고 쌓인 포근한 지방이 아닌,

닳고 닳은 러닝화의 밑바닥을 보며 이 글을 기쁜 마음으로 다시 한번 더 들춰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글이 쥐도 새도 모르게 내려간다면?

그것은 열린 결말로서, 독자의 상상력에 맡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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