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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얀 Oct 28. 2020

나도, 넘어지고 싶어

끊어지기 직전인데 넘어질 수 없었다

"진짜 딱 한 달만 쉬었으면 좋겠어요."
"맞아요. 근데.. 그러면 너무 많은 게 바뀌어있을 것 같아요."


몇 달 전, 점심을 먹고 직장동료가 한 말에 내가 한 답변이었다. 퇴직을 하게 되리라 꿈도 못 꾼 나였으니까. 너무나 당연히 생각했다.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 변화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니까 버텨야 한다.


하지만 1편에서 말했던 파도를 타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나는 긴장과 이완의 연속을 겪고 있었다. 내일 당장이라도 일을 마무리하고 고객사에 전달해야 하는 때가 있는데, 급작스럽게 멈추는 때도 생겼다. 그런 상태를 계속 겪다 보니, 나는 끊어지기 직전의 고무줄 상태 같았다. 그렇게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히 잡아당겼다가, 축 늘어졌다가를 반복하면서 일상에 작은 생채기가 생겼다. 그리고 점점 닳아가는 고무줄이 되었다. 다른 표현으로는,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셈이었다. 황태는 얼었다 녹으면 감칠맛이라도 더해질 텐데, 나는 회복되지 못한 채 소진되고 있었다. 그저 버티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이유조차 되짚을 수가 없었다. 가끔 일을 둘러싼 상황이 급박하게 변화할 때는 내가 거슬러야 하는 물살이 무척 세서, 나는 나아가려고 노력하는데도 그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생각을 안 하고 싶었는데, 이대로 버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참 많이 따져 묻곤 했다.


그렇게 소진되다 보면 나 자신을 챙기기 쉽지 않아 졌었다. 내 주변을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다면, 내 디테일들이 엉망인 것을 알지 않았을까. 물어뜯은 손톱, 치우지 못한 책상의 종이들, 책상에 탑처럼 쌓인 탄산수 캔, 그리고 낫지 못한 채 계속 나는 피부의 뾰루지들. 어지러운 바탕화면과 다운로드 폴더. 미처 씻고 잠들지 못한 나날들. 내가 집에 들어와서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사람이 되어 출근하기 위한 준비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점점 희미해졌다. 지금이 8월인지, 9월 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쓸모 있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데, 쓸데없지 않기 힘들어졌다. 주도하기보다 자꾸 따라가려 하고, 모든 걸 반투명한 유리막 뒤에서 본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일에 대한 무력감이 드는데, 내가 이러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 안 좋은 생각들이 백 번을 휘감는데,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내게 몇 번을 물었다. 쉬지 않을래?라고. 그때마다, 아직 넘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넘어지고 싶어

라는 검블유 5화에서 나온 대사를 계속 떠올렸었다. 주인공 배타미(임수정)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 비난을 받았음에도, 자신의 원칙-사생활 조항 관련 검색어를 삭제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차현(이다혜)은 타미에게 묻는다. 지금 이 논쟁을 이겨서 얻는 게 무엇인지. 그때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나는 배타미만큼 많은 책임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녀만큼 심지가 굳은 사람(회사 대표로 청문회 가서 국회의원 목을 날리는 사람이다!)은 아니지만, 저 말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넘어지고 싶지만, 넘어질 수 없는 마음.


나는 넘어질 수 없었다. 나는 쉬지 않고 돈을 벌어야 한다. 일하지 않는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천천히 해보려 한다.


+ 배경 사진 출처: NeONBRAND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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