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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자 Sep 28. 2016

퇴사 후 Self-Interview

드라마는 없다.

나는 주변에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다. 그 중 나의 퇴사를 아는 사람은 더욱 적다. 하지만 이들에게 종종 받는 질문이 "퇴사하니까 어때?"이다. 우울증 환자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들 중 내가 우울증 환자임을 아는 사람은 전무하므로), 퇴사라는 이벤트가 가져다 준 내 일신 상의 변화는 궁금해할 만하다. 사실 나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퇴사 후 한 달이 넘게 지난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요즘 잘 지내?"




Q. 얼굴이 좋아진 것 같아.

A. 자고 싶은대로 자고, 먹고 싶은대로 먹고, 운동하고 싶은대로 운동하기 때문에 얼굴이 안 좋아지면 오히려 이상하겠지. 그렇다고 회사 다닐 때 생각했던 것만큼 아주 건강하고 규칙적으로 살고 있진 않기 때문에 할 말이 없네.


Q. 요즘 행복해?

A. 불평할 순 없어. 아무에게나 이런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건 아니까. 물론 학생 때와 취준 때 이런 시기를 거쳤지만, 그 때와 달리 지금은 정말 자발적 의사에 의하여, 또 부모님 도움 없이 전적으로 '자발적 백수'로 살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남의 시선 생각하지 않고 정말 솔직히 말한다면 '행복해'라기 보단 '행복하다고 믿자'에 가까운 거 같아.


Q. 왜? 그렇게 바라던 퇴사 아니야? 퇴사 과정도 녹록치 않았고.

A. 퇴사의 순간도 사실 홀가분하기보단 씁쓸했어. 속상해서 다시 생각하기 싫지만. 사실 최적의 시나리오는 퇴사 전에 회사 다니면서 다른 데 이직 성공하는 거잖아. 아니면 최소한 인사 이동을 통해 팀을 바꾸거나. 하지만 난 1년 간 그 둘 다 꾸준히 시도했지만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어. 성공하지 못해서 남은 옵션이 버티거나 나오거나 양자택일이었던 거지. 그래서 엄격히 말하면 버티지 못해서 나온 거잖아. 내 사정을 아는 회사 동기들은 1년도 오래 버틴 거라고 많이 격려해줬고 그래서 참 고맙지만...


Q. 너무 부정적인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할 거면 버티지 그랬어.

A. 맞아. 하지만 버틸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어. 퇴사 후 핑크빛 미래가 펼쳐지지 않을 것도 알았고. 퇴사가 답은 아니지만 내릴 수밖에 없는 선택임을 씁쓸하지만 받아들인 거지. '퇴사 하지 말 걸'이라는 후회도 하지 않아, 한 적도 없고. 이제는 앞을 생각할 뿐인데, 용기가 안 날 뿐이야.


Q. 왜 용기가 나지 않아?

A.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하지. 우울증을 겪는 동안 내가 정말 오랫동안 쌓아 온 능력(?)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낙오자가 된 기분이야. 그렇게 생각 안 하려고 의도적으로 무진장 애 쓰고 있지만. 난 돈을 벌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 대학 졸업 후 최종 목표는 취업이었어. 그러나 여러 해 취업을 준비하며 원하는 회사에 원하는 직무는 모두 떨어졌고, 여기저기 써서 유일하게 붙은 곳이 퇴사한 회사였지. 그래서 사실 합격했을 때도 썩 기쁘지 않았어. 들어가고 나서는 물론 우울증이 심해질 정도로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소모됐고, 따라서 그 곳에서 이직과 팀 이동을 여러 번 시도했어. 하지만 그것도 모두 실패했지. 도저히 버티지도 못하겠어서 버티는 것도 실패했고. 그래서 다 실패한 사람이란 생각이 자꾸 들어. 하지만 월급은 받았으니까 돈 버는 데는 성공한 거고, 아직 잔고가 있으니 그건 칭찬해주려고 해. 날로 줄어 들어 가슴 졸일 뿐이지만...


Q. 퇴사 전에 플랜 B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거야? 왜 이렇게 무모했어?

A. 글쎄, 플랜 B는 있었어. 근데 나오니까 플랜 B조차 하기 싫어진 게 문제지. 아무 것도 안 하는 내가 싫지만 또 아무 것도 하기가 싫어. 우울증을 겪는 내내 그랬으니 새로운 것도 아니지만. 퇴사 전에도 사실 걱정은 했어. 지금은 의지가 넘치지만 막상 퇴사하면 의욕이 다 사라져서 게을러지지 않을까는 걱정. 근데 예를 들어, 내가 당장 불구덩이 속에서 타들어가는데 불구덩이 밖에 너무 추울까봐 여기 안에 계속 있어야지 이런 생각은 안 하잖아. 불구덩이는 극단적 비유지만 나에게 회사를 나가는 건 그랬어. 내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까지 하기 싫고, 잘 못하겠는 일을, 1년이라는 기간동안 꾸준히 해본 적이 없었지. 그런 점에서는 유의미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해. 대체 어떤 식으로 써먹어야할 진 모르겠지만.


Q. 그래서 요즘은 온전히 너의 것인 24시간을 어떻게 지내?

A. 퇴사 직후 첫 2~3주 간은 인생을 살면서 꼭 하고 싶었던 일 하나를 저지르는 데 썼어. 맨날 달고 살았던 죽고 싶다는 생각이 이것 때문에 조금 사라졌으니 대단한 거지. 또 지난 약 10년 간 꼭 사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 하나를 샀어. 그 외에 회사 다닐 때도 했지만 충분히 하지 못했던 것들을 공을 들여 해봤어. 이렇게 적어보니 뿌듯하다. 소소한 걸 해내는 경험이 너무 소중해. 이 경험을 더 많이, 더 길게 하고 싶어. 하지만 한 달이 지나가면서 최근에는 넘쳐나는 시간에 좀 질린 것이 사실이야. 날이 쌀쌀해지면서 조금 초조해지기도 했고. 퇴사 후 다음 스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하는데, 그것만 빼고 하고 있는 것 같아.


Q. 결론적으로 나쁘진 않아 보이는데?

A. 그러네. 나도 몰랐어. 훌륭하진 않지만 거지같지도 않네.


Q. 퇴사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해주고 싶어?

A. 내가 뭐라 할 자격이 어딨어. 그리고 개개인의 상황과 처지가 너무 다르니 일반화할 수도 없고. 다만, 아까 스스로 실패자같다고 말했지만, '퇴사 역시 특권'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게 지내려 노력하고 있어. 퇴사할 사람은 누가 뭐래도 퇴사하게 돼있고, 안 할 사람은 안 하게 돼있다고 생각해. 나 역시 퇴사에 대해 나름 오랫동안 여러 가지 고려하며 미뤄왔지만, 결국 어느 순간에 저질러놨더라고. 경력 단절이 두렵지 않나? 세간의 시선이 두렵지 않나? 아직까지 그건 별로 신경쓰이지 않아. 요새 약간 비현실적인 삶을 살고 있어서 그런지, 좀 이상주의자가 돼버린 것같아. 인생 애쓰며 뭐 그렇게 심각하고 괴롭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여유가 넘치는 건가? 그냥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는 상태가 돼버린 거 같아. 나중에 이 글 읽어보면 웃길 수도 있겠다.


Q. 그래서 지금 네가 경험하고 있는 퇴사란 무엇이니.

A. 퇴사 후에도 드라마는 없다 이거야. 회사에서 괴로웠던 내가 퇴사를 한다고 매일이 행복에 가득찰 순 없어. 퇴사 후에 시간만 주어지면 일사천리로 풀릴 거 같았던 미래도 없어. 하지만 사람들이 그러지, 회사 안이 겨울이라면 회사 밖은 지옥이다 그런 말? 그런 말은 이해가 잘 안 가. 난 지난 회사 생활을 통해 욕심과 기대를 많이 버리게 된 거 같아. 나에게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고 아둥바둥거린다고 더 나은 미래가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어. 그래서 악착같이 하기도 싫어. 어차피 지난 회사보다 돈을 더 많이 주는 회사는 들어가지 못하겠지. 어차피 가장 핫한 세계 일류 기업들은 못 들어가겠지. 하지만 또 그렇지 않는다고 내가 굶어 죽어버리지도 않겠지. 지금 내가 행복한 구석이 요만큼이라도 있다면 그걸 만끽하는 데 제일 많이 노력해볼래. 잠깐뿐이더라도 내겐 그게 가장 소중한 경험이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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