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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Oct 01. 2019

창문에 돌을 던질 자격

책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읽고

어버버 하던 여름밤

그 날, 그러니까 와이프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강연회를 듣고 함께 귀가하던 그날 밤의 신촌 길은 이야기와 상념으로 가득했다. 연사가 연사이니만큼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발걸음을 옮기던 중, 와이프가 한 말이 나를 당황케 했다. 와이프는 가끔 부끄러워진다고 했다.


 페미니즘을 주장하고 지향했지만, 결혼을 했다는 자체에 일종의 인지 부조화를 느낀다고 덧붙였다. 식을 준비하며 드레스와 치장을 하고, 결혼 생활을 하며 서로의 가족을 간혹 만나고, 자녀가 생기면 남편의 성을 물려받기로 서명 - 혼인신고 시 체크하는 란이 있다는 것을 우린 미처 알지 못했다 - 하는 등. 일련의 과정들이 그토록 부인했던 가부장제의 일부로 복속된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재빠른 사람이 아니어서, 그 순간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어버버 했다. 짝꿍의 고민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과 더듬이를 미리 뻗지 못한 미안함과 그 순간의 당혹감이 섞인, 묘한 감정의 색채와 함께 그 날의 대화는 오래간 머릿속에서 부유했다.



창문에 돌을 던지는 일

 이번 여름, 독서 모임 <트레바리 - GD 심화>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오드리 로드'의  <시스터 아웃사이더>였다. 300여 페이지에 걸쳐 강렬한 메시지로 읽는 이를 압도하는 이 책은, 여러 층위로 나뉜 차별과 억압에 대해 직시하고 변화하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구글링을 하다 발견한 한 <시스터 아웃사이더> 서평에서는, 예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강성은' 시인의 <채광>이라는 시를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단상을 묘사했는데, 설명한 포스팅이어서 인상적이었다. (아래에 그 링크를 첨부한다.)

「창문에 돌을 던졌는데 / 깨지지 않는다
   생각날 때마다 던져도 / 깨지지 않는다
   밤이면 더 아름다워지는 창문
   환한 창문에 돌을 던져도 / 깨지지 않는다
   어느 날엔 몸을 던졌는데 / 나만 피투성이가 되고 / 창문은 깨지지 않는다
   투명한 창문 / 사람들이 모두 그 안에 있었다」
   - 강성은 <채광>


많은 이들에게 페미니즘이란, 창문을 향해 돌을 던지는 일일 것이다. 시인이 제시한 프리즘으로 본다면, 와이프에게 결혼이란 무엇이었을까 되뇌어본다. 어쩌면 그것은 돌을 던지기로 중단하고 창문 안 쪽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해석될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고, 시를 곱씹고, 다시 그때의 대화를 반추하고 나서야 다시 한번 스스로의 생각을 반문해본다. 남성으로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발언하며 내가 느끼는 인지부조화의 감각. 이 느낌과 와이프가 제시한 고민에는 서로 통할만한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 창문 저 안쪽 따스한 아랫목에 자리한 채 '울스톤크래프트 왈 파이어스톤 왈' 글귀만 붙들고 있는 서생으로서, 창문 바깥의 사람들에게 죄스러움을 느끼지는 않았던가.



모순을 껴안고

페미니즘 논의의 교차성을 보여주는 책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읽으며, 이러한 내 고민을 다소나마 해갈할 기회를 엿볼 수 있었다. 미국 내 유색인종이면서 동시에 여성 동성애자인 작가 '오드리 로드'가 돌로 겨냥하던 창문은 전형적인 기득권 남성일 때도 있었지만, 때론 백인/이성애자 위주로 편제된 페미니즘 학계이기도 했다. 책을 읽다 보면 그가 조준하는 창문의 위치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모한다. 그 감각. 누군가에겐 내가 '창문 안쪽'으로 위치될 수 있다는 감각.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방관자도, 가해자도, 조력자도 될 수 있다는 모순. 교차성이 선사한 이러한 모순을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소리 내 본다. 


우리는,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서생질을 할 수 없다. 차별과 정의를 논하는 우리의 현실은 늘 얼룩지고 고약하기 마련이다. 모둠살이의 당위를 논하고 찾아 헤맬 자격은 누구에게나 - 합리화를 핑계로 현상을 오용하거나 오독하지만 않는다면 - 주어져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어줍지 않게 찾은 나만의 교훈은 이렇다고 말하면서, 이것만으로도 일종의 위로가 되지 않나 희망해 본다. '로드'의 말마따나 "내가 쓰는 글 한 줄 한 줄이 세상 어디에도 간단한 해법이 없다는 절규"와 같다.


늘 주저하고 늘 반성하지 않고서야, 걸음도 떼지 못한 채 금세 지치고 말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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