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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셋맘 Jun 09. 2022

군인 아내는 멘탈이 강하다

Part2. 딱 1년만 혼자 키우겠습니다

 지난해 8월, 남편이 해외파병을 떠나기 위해 출국을 앞둔 시점에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집 근처로 이사를 했다. 남편은 코로나19 상황으로 휴가가 전면통제되어 이사할 때 우리의 곁을 지켜주지 못했고, 결국 나는 혼자 이사를 도맡아 하게 되었다. 집을 알아보는 것부터 이삿짐 예약과 나머지 소소한 일까지 모두 혼자 하려니 조급해졌고, 서글픔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기까지 했다. 이사 당일, 다섯 시간이 넘는 거리를 직접 운전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왔는데 만약 친정엄마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사는 없던 일로 하고 다시 살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당시 6개월쯤 된 막내는 차를 타본 적도 거의 없을뿐더러 장거리 이동도 처음이라 카시트에 앉자마자 발버둥을 치며 울었고, 도착할 때까지 다섯 시간을 내리 울어 재끼는 통에 내 머리는 지끈지끈 아프다 못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두통약을 먹어도 통증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새집에 도착하자 나는 극심한 두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어린 첫째와 둘째에게도 장거리 이사는 힘든 일이었다. 어른도 다섯 시간 동안 차를 타면 고된데 하물며 그 어린 것들은 오죽했을까 싶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장거리 이사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지인들은 나를 불쌍히 여기는가 하면 존경스럽다고도 했다. 나 역시 이 위대한 도전은 내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라 생각했다. 군인 아내가 된 뒤로는 이렇듯 종종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서 정신력이 자동으로 강화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내 친구 중에는 이런 경험을 미리부터 한 몇몇 친구가 있는데 나보다 앞서 군인 아내가 된 이들이다. 그중에는 내가 가장 아끼는 25년 지기 절친 미화도 포함되어 있다. 누구나 힘들 때 속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한 명쯤 있을 것이다. 미화가 내게 그런 친구다. 우리는 가장 예쁘고, 속이 꽉 찬 20대를 함께 공유한 사이다. 언제까지나 서로의 곁을 지킬 줄 알았지만, 스물일곱 끝자락에 미화가 결혼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서 독립했다.



 결혼 후 남편의 직장을 따라 대구에서 장장 5시간이나 걸리는 강원도 동해로 떠나간 친구는 1년에 기껏해야 한두 번 보는 게 다지만, 기쁠 때나 슬플 때 가장 먼저 찾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친구는 친척 소개로 남편을 만났고, 동해에서 근무 중이었던 그와 장거리 연애를 했다. 대구와 동해를 오가며 사랑을 싹틔운 결과, 4번째 만남에 상견례를 했고, 10번째 만남이 있던 날 두 사람은 예식장 단상에서 혼인서약을 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친구는 그날따라 복스러운 얼굴이 유난히 핑크빛으로 물들어 예쁜 복숭아 같아 보였다. 나는 친구의 결혼생활도 핑크빛으로 예쁘게 물들길 속으로 바랐다.





 친구 남편은 직업군인으로 주로 배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결혼 전에는 2주에 한 번꼴로 배를 타고 출동을 나갔다면, 결혼 후에는 한 번 나가면 한 달씩 집을 비운다고 했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배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은 남편으로 인해 친구는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변기를 붙잡고 서러운 마음과 입덧을 달래야 했다. 남편의 잦은 부재로 별의별 일을 다 겪은 친구는 하다못해 출산도 혼자 했다. 남편이 배를 타고 출동을 나간 사이 진통이 왔고, 친구는 첫째 아이를 혼자 낳았다. 그 소식에 나는 마음이 아팠고, 군인 아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는 군인 가족 중에 남편 없이 혼자 출산하는 아내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했다. 나는 이 말에 놀람과 동시에 군인 못지않은 강인한 정신력도 탑재해야 하는 것이 군인 아내라고 느꼈다. 하지만 내 정신력이 아무리 강인하다 해도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에 남편 없이 혼자 있어야 할 수도 있는 군인의 아내만은 절대 되지 말자 다짐했다.



 친구가 결혼하고 3년 뒤, 나도 결혼이라는 것을 했다. 여느 예식장 풍경과는 조금 다른 내 결혼식에는 정복을 입은 사내들로 바글바글했다. 그들은 버진로드 위에 칼을 들고 서서 남편과 내가 입장과 퇴장할 때 축하의 의미로 번쩍거리는 칼끝을 부딪치며 이색풍경을 만들어냈다. 다짐과 달리 나는 군인을 남편으로 맞이했고, 하객들 앞에서 서로를 평생 아끼고 사랑할 것을 맹세했다. 친구끼리는 닮는다고 했던가? 나는 어느새 친구 미화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고, 그녀처럼 아이도 셋을 낳았다. 친구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출산 때마다 남편이 내 옆을 지켰다는 것뿐이었다.



 남편이 해외파병을 가고, 본격적으로 단독육아가 시작되면서 나는 친구가 겪었던 고통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그제야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남편이 바다로 출동을 나간 뒤 혼자서 아이들을 돌봐야 했던 친구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나는 너무 늦게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 미안한 마음에 목이 메이던 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내 마음을 전했다.


“친구야~ 혼자서 어떻게 애 셋을 키웠니…. 진심으로 존경한다.”



친구 미화와 해군인 남편 그리고 아이들



 군인 아내로 사는 것은 마치 도장 깨기를 하는 것과도 같다. 하나의 미션을 수행하고 나면 다음 미션이 기다리고 있고, 그것을 깨면 내 한계의 벽도 무너졌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피하는 대신 정면돌파를 택하며 한계를 뛰어넘고자 필사의 노력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게 과연 될까?’라기 보다는 ‘무조건 된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달려온 그 시간이 어쩌면 나와 친구를 더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줬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육아를 하면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힘든 시간을 넘길 때마다 나는 고통 속에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잔잔한 희열을 느꼈고, 그 힘으로 지금까지 왔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군인 아내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엄마가 강인한 정신력을 탑재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힘든 육아 전쟁터에서 잘 버텨내고 있는 그녀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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