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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글 Nov 28. 2019

죽음을 이야기해도 괜찮겠지요?

유성호,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리뷰



죽음은 무섭고 두렵다. 나는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겪었다. 유난히 체격이 크시고 무뚝뚝했던 할아버지, 할아버지와 대화를 했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주 어릴 적 나에게 과자를 쥐여주던 그 투박하고 두툼한 손 말고는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선명한 것 하나 없었다.

다 컸으니 누군가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의연할 만큼 죽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엄마가 아이처럼 울었고, 나는 엄마를 따라 울었다.

체격이 크던 외할아버지는 십 년 가까이 병상에 누워있다가 돌아가셨다. 나는 할아버지와 그리 친하지 않았지만, 노쇠해져 가는 할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있었고, 엄마가 할아버지를 찾아뵐 때 함께 갔었다. 손자 손녀들 중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 가장 최근 모습을 뵐 수 있었는데 아주 예전에는 병원 침대가 작아서 발이 삐져나오던 그 크던 할아버지가 너무 작고 왜소한 모습을 하고 계셔서 말은 안 했지만 적잖이 놀랐던 것 같다. 그때로부터 몇 년 전부터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고 찾아갔을 땐 가만히 누운 채로 움직이지 못하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실감이 안 난다. 엄마도 그렇다고 했다. 볼 수 없는 먼 곳에 계실 뿐, 이 세상에서 아버지가 없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함께 여행을 하지 못한 것이 너무 후회된다고 했다. 강산이 변하는 시간 동안, 내가 어른이 됐을 시간 동안 할아버지의 생활은 병원, 병실뿐이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은 할아버지의 뜻이었을까, 병원 침대에서 마지막을 맞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엄마에겐 커다란 짐처럼 마음에 남았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라 다들 입 밖에 그 단어를 올리지 않았고, 언제나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만을 이야기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죽음을 이야기하는 건 어쩌면 비인도적이라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서는 조금은 다르게 생각해보게 됐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살아온 세월을 기억하는 일이고, 마지막까지 온전한 내 삶의 주인으로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지 선택하는 일이다.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기에 죽음에 대한 준비는 더 생각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죽지 않기만을 바랄 줄만 알았지.

할아버지의 죽음이 어쩌면 좋을지 할아버지께 한 번도 묻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죽음에 가까워지시는 동안 말이다.

매주 죽음을 만난다는 저자는 매주 삶을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까지가 내 삶에 대한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자식 한 명 한 명에게 당부를 전했다고 했다.

아프지 말라고, 미안하다고.

나는 엄마를 대신해서 할아버지에게 꼭 묻고 싶은 말이 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어떤 걸 가장 하고 싶으셨어요?”

삶을 살아가는 것도 그 삶의 마지막에 죽음이 있는 것도 한 번뿐이다.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정말 갑작스럽게 맞이하는 죽음이 아니라면 우리는 생각하고, 준비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을 겪을 때도 잘 보내줄 수 있지 않을까. 잘 보내준다는 거 참 힘들고 어려운 일인데, 정말, 정말 잘 보내주고 싶다.

죽음은 두렵지만 두려워도 계속 생각해야 하는 일 같다. 그것 또한 삶의 일부이니까.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은 행복하게 지내야지.



> 뛰어내린 순간 나는 인생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방금 다리 위에서 뛰어내렸다는 사실을 빼고요. 나는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_투신자살을 시도했다가 구출되어 살아남은 자의 인터뷰


> 내가 혼수상태가 되거든 이틀을 넘기지 마라. 소생하지 않으면 엄마, 동생 손잡고 산소호흡기를 떼라. 절대 연장하지 마라. 화장 후에는 보령 관촌에 뿌려라. 문학상 같은 거 만들지 말고 제사 대신 가족끼리 식사나 해라. 나는 이 세상 여한 없이 살다 간다. _이문구 작가의 유언


> 노년층 자살은 사회 경제적 안전망이 없는 상태에서 경제적 빈곤을 느끼는 데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위 세대들은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면서 자식들에게 끝없는 시혜를 베푸는 것이 인생의 보람이었기 때문에 노년이 되어 경제적으로 곤궁해지면 이를 버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기대했던 가족 간의 유대감, 소속감 등에서 소외받는 정서적 문제가 발생하면 여기에서도 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다.


> 죽음을 당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맞이하는 쪽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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