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 기억과 역사의 불확실성에 대해 -

by eduist 이길재

최근 고등학교 졸업 4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했다. 40년이란 세월은 청년을 중년으로 만들었고, 예전의 맑고 여린 피부는 건조하고 생기를 잃었다. 깊게 패인 주름 속에서는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지만 인생을 충실히 살아낸 사람의 정체성과 깊이도 함께 느껴진다. 그동안 팍팍한 삶의 무게를 짊어졌을 친구들은 오히려 더 착해지고 여유로우며 순수해진 모습이다.


맞잡은 손의 온기와 따스한 눈빛 속에서 오가는 옛이야기들. 하지만 그 대화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기억이 미묘하게 어긋나고, 각자가 생각하는 친구들의 모습마저 다르다는 혼란스러운 진실에 직면한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친구의 모습이 과연 맞았을까?' 왜곡된 기억 속에 드러나는 고마움, 섭섭함, 미움, 즐거움 등 복잡한 감정들은 우리 삶의 우연과 필연 사이를 걷는 인간의 숙명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처럼 불완전한 기억과 진실에 대한 생각이 깊어질 때, 생각나는 소설이 있다.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원제: Elizabath Pinch)>. 이 소설의 저자 줄리안 반스는 맨부커 상 수상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영국의 대표 작가이다. 사실 반스의 이 두 작품은 '기억'과 '역사'의 불확실성, 그리고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기억의 진실'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공유하며 깊이 연결되어 있다.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는 이러한 기억에 대한 성찰을 더욱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영역으로 확장한다. 이 소설은 단순한 서사 중심의 이야기보다는 철학 서적, 철학 에세이라고 불릴 만큼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그것은 인간의 상상 또는 해석의 산물이 아닌가?


이 질문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주인공이 "나는 삶을 살았고, 이제 삶이 나를 소유하고 있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과거 기억을 끊임없이 의심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반스는 독자에게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기억이나 역사 기록조차 얼마나 주관적이고 흔들리기 쉬운 것인지를 집요하게 묻고 있다.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화자인 닐은 대학 인문학 강좌에서 엘리자베스 핀치라는 지적이고 통찰력 있는 여성 교수를 만난다. 닐은 엘리자베스를 통해 철학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접하며 그녀를 깊이 추앙한다. 세월이 흘러 엘리자베스가 사망한 후, 닐은 그녀의 유품을 전달받고, 그녀가 생전에 관심을 가졌던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에 대해 탐구하며 글을 쓴다.


율리아누스는 다신교 부활을 꿈꾸다 후대에 '배교자'로 불린 인물로, 그에 대한 기록과 평가가 후대 사람들과 승자의 역사에 의해 다양하게 왜곡되었다. 역사 속 진실이 기록자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듯이, 닐은 동시대를 살았던 엘리자베스 핀치에 대해서도 자신이 추앙했던 모습과 그녀의 가족이나 다른 수강생이 기억하는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세상 사람들은 내가 보는 방식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나를 바라본다는 깨달음은, 40년 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어긋난 기억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기억과 관계의 본질을 성찰하게 한다. 우리가 믿었던 '진실'이 사실은 개인의 해석과 상상의 산물일 수 있다는 통찰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남긴 '기억의 배신'이라는 씁쓸한 여운과 공명하며, 독자들에게 기억의 겸손함을 요구한다. 진정한 기억의 진실이란 고정된 사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구해야 할 대상임을 반스는 역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엘리자베스 핀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책에서 제가 발견한 엘리자베스 핀치의 가장 훌륭한 점은 그녀가 참된 교육자라는 점이다. 엘리자베스는 학생들에게 정답을 알려주는 대신 생각의 여백을 주고,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강의를 이끌어간다. 그녀에게 이해란 정답 그 자체보다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의 사유, 생각하는 힘, 그리고 질문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오랜 시간 교육계에 봉직했던 나의 화두는 "AI 시대 급격하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우리 교육이 변함없이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무엇인가?"였다. 엘리자베스 핀치의 가르침처럼, 그것은 바로 사유, 생각하는 힘, 질문하는 힘이 이라는 점에서 깊이 공감한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일들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단정할 수 없는 이 현실 속에서, 어쩌면 우연히 자기 뜻대로 하게 놓아두는 것이야말로 삶을 견디는 인간의 필연적인 숙명일지도 모른다.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는 서양 철학이나 역사적 배경지식이 없다면 책넘김이 쉽지 않은 불친절한 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줄리안 반스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부터 던져온 기억, 역사, 관계의 진실을 따라가다 보면, 늘 당연하게 여겼던 기억을 의심하고 세상을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힘을 길러주리라 생각한다.


책 한 권을 들고 공원을 산책하거나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여유를 즐길 시간이 될 때, 혹은 사유의 엄격한 즐거움을 느껴보고 싶을 때, 줄리안 반스의 깊은 사유와 통찰의 소설,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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