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3월 24일, 평양에서 개최된 평화옹호 전국 연합대회에서 소설가 한설야는 물었다. 그는 평화옹호 선언에서 제일 첫 서명자로 이름을 남긴다. <북조선 소설가 한설야(韓雪野)의 평화의 마음(1), 2015, 북한대학원대학교 구갑우>
2차 세계대전 이후 핵무기는 세계를 압도했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인류 최초의 핵폭탄은 공포 그 자체였다. 미국은 최초로 핵무기를 실전 사용하며 핵 패권 시대를 열었다. 미국과 직접 맞서고 있는 당시 북한의 입장에서 핵무기는 가장 큰 위협이었을 것이다.
평화옹호 전국 연합대회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날이 가면 갈수록 세계에는 또다시 새로운 전쟁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 그것은 전후의 세계 제패를 꿈꾸며 반동의 선두에선 미 제국주의자들이 세계 전쟁을 도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 세계 인민은 평화를 호오하며 전쟁을 반대하며 국제 반동파들을 반대하여 총궐기하였다”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1945, 평화옹호 세계대회 문헌집>
평양 대회에서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릴 세계대회에 파견할 대표를 뽑았다. 소설가 한설야, 여성동맹 위원장 박정애, 기독교 민주동맹 위원장 김창중 등이 선출되었다. 1949년 4월 25일 파리 평화옹호 세계대회 의장이자 노벨상 수상자 프레데릭 졸리오 퀴리는 대회에서 반전반핵과 군비축소를 전 세계에 호소했다. 소설가 한설야는 북측 대표단의 수석으로 파리 대회에 참석하여 전 세계 앞에서 평화운동과 한반도의 통일을 주장했다.
과감한 정치적 행보를 보여준 소설가 한설야는 그 굳게 다문 입처럼 정치적 신념을 문학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낸다.
소설가 한설야는 1929년 단편소설 과도기를 통해 ‘농촌의 몰락과 공장 도시의 발흥과 농민의 노동자화의 과정’을 주제 의식으로 담고 있다.
"창선이는 한심스러운 생각이 더쳐 왔다. 제 고장이라고 그리워하였고 제 친족이라고 찾아는 왔으나 생각던 바와는 아주 천양지판이다. 조선 가면 아무 일이라도 해 먹으려니 했으나 막상 와보니 그 '아무 일'이란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일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고 힘을 쓸래도 쓸 곳이 없고 고기도 잡아먹을 수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다. 대대로 전하여 오던 손익은 일 맛 들인 일은 이리하여 얻어 만날 수 없고 눈이 멀개서 산 송장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든 옛일이나 그네가 같이 밀려간 자리에는 낯선 새노릅(고장 기계)이 주인같이 타리개를 틀었다. 검은 굴뚝이 새 소리를 외치고 눈 서투른 무서운 공장이 새 일꾼을 찾으나 그것은 너무도 자기 몸과 거리가 먼 것 같았다. 그만치 할 일이 있고 할 뜻이 있는 옛일에 대한 애착이 아직까지 뿌리 깊이 가슴을 부여잡고 있다. 그런데 그 일은 어디 가고 꿈도 안 꾸던 뚱딴지같은 일터가 제 마음대로 벌어져 있다. 게트림을 하면서 턱으로 사람을 부른다. 없는 사람을―그러나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천하없어도 후려 넣는 절대명령이요 울며 불며라도 가잖을 수 없는 그곳 이언만―이리하여 망설이는 과도기의 공포와 설움이 그의 가슴을 쑤시었다.."
위 소설 내용처럼 창선이 간도로 이민을 갔다가 돌아온 사이 고향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어 화전민이 되거나 공장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창선은 요행 공장에 들어가게 되어 상투를 자르고 노동을 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1930년대 일제의 자본은 북부 지방에 대륙 진출을 위한 공업을 발전시킨다. 공업의 발전으로 노동자 계급이 탄생하고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이 유포되었다.
이러한 시대상 속에서 한설야는 사회주의 사상을 작품에 구현했다. 그 문학의 조직이 바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다. 카프는 문학을 투쟁의 무기로 삼고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파헤쳤으며, 노동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깨달을 수 있게 계급의식을 고취했다.
그는 1928년 단편소설 <씨름>을 통해 노동자들의 단결된 모습을 그려냈으며, 1948년 장편 소설 <황혼>을 통해 당대 노동문학의 정점을 보여준다.
월북작가 한설야의 대표작으로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발표한 단편소설 <승냥이>가 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승냥이는 미국인 선교사가 공을 훔쳤다며 어린 소년 수길이를 구타하고 나서 이를 숨기려고 전염병에 걸렸다며 병원에 입원시켜 독살하고, 이를 항의하는 수길의 어머니도 일본 경찰이 체포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한, 한설야 소설 '승냥이' 연극화…'반미·반종교' 고취 연합뉴스 김은진 2015.08.31>
평양서 발간되는 조선예술 2001년 6월호에 따르면 이 영화가 `날로 노골화되고 있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반공화국 고립 압살 책동에 치솟는 격분을 터치며 온 나라 전체 인민들이 복수의 심장을 끓이고 있는 시기에 세상에 나왔다`라고 소개했다. <북, 반미영화 `승냥이` 개봉 연합뉴스 최척호 2001.07.24>
한설야는 1900년 함남 함흥시 근처 농촌에서 태어났다. 함흥고보를 마치던 해 3.1 운동에 가담해 옥고를 살았고 함흥 법전에서는 동맹휴학을 일으켜 제적을 당했을 정도로 반일 의식이 투철했다.
한설야는 26살이 되던 1925년 단편소설 <그날 밤>이 조선 문단 4호에 실리면서 소설가가 되었다.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 들어가 논문 <예술의 유물 사론>, 평론 <계급대립과 계급문학> <문예비평의 과학적 태도> <1928년대의 대중 간의 문예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까>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이론 활동을 하였다.
사회주의를 눈엣가시로 여긴 일제는 제2차 카프 사건을 터트려 1934년 2월부터 12월까지 약 200여 명을 잡아 가두었다. 1931년 제1차 카프 사건으로 70명을 잡아간 지 3년밖에 되지 않아 일어난 만행이었다. 한설야는 이 사건으로 1년 동안 옥살이를 한다. 그는 1935년 옥에서 풀려나 함흥에서 소설 작업에 매달린다.
해방 후 한설야는 1945년 11월 문화예술인 가운데 가장 먼저 월북을 한다. 이기영, 안막, 최승희와 함께 38선을 넘어온 한설야는 북조선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화부장을 역임한다. 당시 월북은 비단 사회주의 계열의 선택만은 아니었다. 미군정이 조선인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고 친일파를 다시 등용하는 상황에서 카프계, 비 카프계를 넘어 양심적 문단 인사들의 월북은 계속 이어졌다.
한설야는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문학예술동맹 중앙위원장, 조선 작가동맹 중앙위원장, 교육문화상,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위원장 등 주요한 직책을 맡으며 북한 문학계의 초행길을 닦았다.
2014년 2월 15일에 발행된 북한 계간 학술지 '사회과학원 학보'는 <한설야와 장편소설 '역사'>라는 글에서 한설야의 이력과 문학세계를 소개하면서 그를 "수령형상 소설 창작의 초행길을 개척한 선구자"라며 “주체 문학의 찬란한 개화기를 마련하는 데서 귀중한 경험을 마련하였다"라고 평가했다. <北, 월북작가 한설야 칭송…"수령 소설 선구자" 연합뉴스 김정은 2014.04.20>
북한 소설의 특징적 장르인 수령형상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지도자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창작한 소설을 의미한다. 한설야는 김일성 주석의 항일독립운동을 소재로 1948년 단편소설 <개선>, 1953년 장편소설 <역사>를 발표하며 인민상을 수여받는다. 이 소설들이 원형이 되어 4.15 창작사에서 <만경대>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북한 문예 도서 <조선문학사, 1991년> <문학예술사전, 1993년> <문예상식 1994년>에는 <황혼>을 비롯한 한설야의 작품이 주되게 강조되어 해설되어 있다. 또한, 북한은 1998년 인연을 맺은 동포들을 다룬 다부작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카프 작가> 편으로 그의 일생을 추억하기도 했다. 현재 한설야는 2003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의해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있다.
과묵한 신념으로 비행기 안에서도 글을 쓸 정도로 글과 일밖에 몰랐던 소설가 한설야는 아직도 수많은 노동자 속에서 그의 소설과 함께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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