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량은 1940년 소설 <빛 속으로(光の中に)>로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芥川) 문학상 후보작에 선정된 작가다.
<작가 김사량>
소설 <빛 속으로>의 주인공은 일본 빈민촌의 남(南)선생과 제자 하루오다. 일본 아이들은 남 선생을 미나미(南) 선생으로 부르며 내지인으로 대한다. 남선생은 조선 사람이지만 굳이 번거롭게 자신이 조선인임을 밝히지 않는다.
제자 하루오는 유별나게 사고를 치며 조선 아이들을 유독 괴롭히고 무시하는 소년이다. 사실 그는 조선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다. 소년은 자신에게 조선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을 강렬하게 부정하며 조선인을 미워한다. 하지만 미나미 선생에게 무의식적으로 끌려 그 주위를 맴돈다.
그러던 중 미나미 선생은 하루오의 일본인 아버지가 조선인 어머니를 칼로 찌르는 극적인 사건을 통해 스스로를 합리화하던 모순을 깨닫는다.
“조선인이거나 조선인의 피가 섞였다는 것 말고는. 미나미 선생 자신도 굳이 조선인이라 밝히지 않는 표면적인 이유는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였지만 실은 그 자신이 조선인인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또 자기는 조선 사람이 아니라고 외쳐대는 야마다 하루오의 경우와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없지 않은가. 나는 이 땅에서 조선 사람이란 것을 의식할 때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빛 속으로> 中에서
하숙집에서 떠오른 이야기를 단숨에 쓴 이 단편소설은 김사량 자신의 이야기였다.
거짓말
김사량이 담담하게 남긴 <빛 속으로> 집필 동기는 ‘문예춘추사(文藝春秋社)의 현지보고(現地報告) 1940년 9월호 평론’인 ‘조선문화통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조선문화를 적극적으로 일본이나 동양, 세계 차원으로 넓혀가기 위해서 미력하나마 그 중개자로서의 수고를 맡고 싶다”라며 일본 제국주의 아래 조선인의 감정과 생활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어 창작을 진행했다. <강성욱, '빛'의 저항 정신 <김사량>, 오마이뉴스, 04.08.06>
그러나 김사량의 속내는 좀 달랐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더 솔직한 심정이 담겨있다.
《…본래부터 자기의 작품이면서도 〈빛속으로〉에는 아무리 해도 꼭 맞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거짓이다. 아직도 자기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저는 이 작품을 쓰고 있을 때에조차 자신에게 말하였습니다.》 《김사량작품집》 문예출판사 1987:앞말)
김사량이 거짓이라고 표현했던 것은 아마도 작품에서 일제 식민지 시절 겪는 민족의 비극이나 고통이 소극적인 내적 갈등의 수준으로 그려져서일 것이다. 그가 일본어로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식민지 통치라는 검열 속에서 느끼는 참담함 등이 느껴지는 편지 구절이다. 그는 이후에 일본을 탈출하고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며 전면적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김사량의 성장환경을 보면 그가 괴로워했던 이유를 좀 더 찾을 수 있다. 김사량(金史良, 1914~1950, 본명 시창)은 평양의 작은 주물공장을 경영하는 상공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터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시위에 나섰고, 졸업반 때는 일본 장교의 학교 배치를 반대하는 동맹휴학에 참가하다 퇴학을 당했다.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김사량은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제국대학에 갔다.
김사량은 일본에서 세틀먼트 운동 즉 빈민 지역에 직접 살면서 함께 생활하고 싸우는 운동에 참여한다. 이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 바로 단편소설 <빛 속으로>다. 그는 빈민운동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며, 대학 당시에는 노동자 중심의 연극 운동단체 조선예술좌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반일활동으로 1941년 12월, 김사량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다음 날 발동된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법’으로 예비검속 되어 끌려갔다. <방민호, 작가 김사량을 생각한다, 경인일보, 2018.05.01.>
노마만리
부친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간신히 풀려난 김사량은 1942년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서 소설 쓰기에 집중했다.
그러나 해방을 3개월 앞둔 1945년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병사후원부는 그를 중국으로 동원한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조선총독부가 중일전쟁 발발 이후 조선 민중을 통제하고 후방 차출하기 위해 조직된 기구다. 그는 중일전쟁에 끌려간 조선인 학도병을 위문하는 ‘조선학도병 위문단’으로 동원되어 베이징으로 갔다.
그러나 김사량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중국 베이징에서 일본군의 감시를 뚫고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했다. 김사량의 대표작 <노마만리>는 조선에서 중국으로 베이징에서 연안을 거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탈출기를 다룬 보고문학이다.
<노마만리>는 ‘걸음 느린 말의 만리길’이라는 뜻이다. 김사량은 처음에는 몰래 기차를 타고 나중에는 나귀를 타거나 걸으며 탈출에 성공했다. 가까스로 도착한 곳이 조선의용군의 근거지인 연안 태항산 근거지였다.
김사량은 조선의용군 태항산 근거지 있는 조국의 깃발을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연약한 자신을 탈피하고 비약의 길을 걸을 것을 결심한 것이다.
"담벽에는 중국 깃발과 함께 우리 깃발이 장식되어 있었다. 조국의 깃발 아래서 존경하는 선배 동지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는 기쁨은 불기하고 나에게 눈물을 자아내었다. 이 우리 깃발을 눈앞에 버젓이 걸고 우러러보기는 이것이 나의 반생에 있어서 처음되는 일이었다." <최재봉, ‘잊혀진 항일 소설가’ 김사량과의 만남, 한겨레신문 최재봉 기자, 2002.9.2.>
김사량의 소설 <노마만리>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가던 1940년대, 많은 작가들이 변절을 하고 펜을 꺾을 때 윤동주의 저항시와 함께 대표적인 항일문학으로 평가받는다. 김사량의 항일업적은 중국에서도 높이 평가된다. 중국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 마을 입구에 김사량의 위업을 기리는 항일문학비가 2005년에 세워지기도 했다.
해방된 조국으로
김사량은 조국으로 돌아와 <노마만리>를 쓰던 심정에 대해 이렇게 썼다.
“… 사실 그때의 나로서는 내가 이렇게 살아서 이 기록을 품에 안고 돌아오게 되리라고는 기필치 못하였다. 때문에 이 기록을 적어놓던 당시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여실히 나타내기 위하여 수기의 첫머리에 쓰여있는 서문의 일부분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놓고자 한다.
이 조그마한 기록은 필자가 중국을 향하여 조국을 떠난지 바루 일개월만에 적 일본군의 봉쇄선과 유격지구를 돌파하여 우리 조선의용군의 본거인 화북 태행산 중으로 들어가는 로상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기록은 언제까지에 끝날 일인지 혹은 어느 때에 중단될 일인지 필자역시 예기하지 못하는 바이다.
그것은 우리 의용군이 잔포한 적군을 쳐물리치며 압록강을 건너 조국의 서울로 진군하는 장정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이로 되, 그러나 이날이 언제라고 기약할수 없는 동시에 장차 우리 의용군의 뒤를 따라 붓대와 총을 들고 조국으로 돌아가기 원하는 필자의 생사 역시 포연탄우속의 일이라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허나 만약에 불행히도 조국독립의 향연에 참례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필자 대신 이 기록이나마 우리 용사들의 채질하며 내달리는 병마의 등에 실려 서울로 입성하여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김사량선집, 국립출판사, 1954>
죽음을 각오한 김사량은 1945년 7월 <노마만리>를 탈고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꿈에 그리던 조국의 해방을 떳떳하게 조선의용군 소속 종군기자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당시 조선의용군은 중국 국민혁명군 팔로군 소속이었다.
해방 후 김사량은 팔로군 종군기자 출신으로 조국, 평양에 도착하여 1945년 11월 작가 중 처음으로 김일성 주석을 만나게 된다. 김사량은 김일성 주석을 만난 후 1946년 북조선예술가총연맹의 국제문화부 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는 장편소설 <마식령>, 희곡 <뢰성> 등 해방 후 5편의 장막희곡, 1편의 소설집 등 많은 작품을 창작하였다.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인 보천보 전투를 소재로 한 희곡 '뢰성'은 북조선노동당창립대회 경축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김사량은 <노마만리>에서 항일유격대를 태양 부대로 비유하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은 “소설가 김사량은 참군을 결심하고 만주광야를 헤매다가 우리 부대를 종시 찾아내지 못하고 연안에 가서 장편기행문 <노마만리>를 썼다.”고 회고했다. <김일성전집, 제99권 53페이지>
공화국 영웅으로
김사량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종군작가로 전선에 탄원한다. 김사량은 제105탱크사단에 배속되어 첫 종군기인 '서울서 수원으로’를 시작으로 '우리는 이렇게 이겼다' '지리산유격구를 지나며' '낙동강반의 전호속에서' '바다가 보인다' 등 9편 종군기사를 썼다.
그러나 후퇴 시기 김사량은 심장병으로 혼수상태를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위중해졌다. 그는 병색이 짙어지자 후퇴 과정을 적은 편지를 부대에 전달하고 지리산에 남았다. 편지는 "…나의 당원증은 당중앙위원회에, 종군수첩은 작가동맹에 전해다오. 승리를 위하여, 희망을 위하여. 김일성 장군 만세! 1950년 10월 1일 김사량"으로 끝나고 있다.
그는 지리산 빨치산에 들어가 출판선전사업을 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포위 속에서 최후의 순간에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며 수류탄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승현, 北 공화국영웅 칭호 받은 종군작가 김사량의 최후는, 통일뉴스, 2013.07.08.>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사량의 최후를 요해하고 그를 혁명적인 작가로 높이 평가하면서 '김사량 작품집'을 출판하도록 했다.
정전협정 60주년이 되는 2013년 6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김사량에게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 영웅홀에 전시하도록 했다. <서정인, 영웅작가 김사량을 그리며, 조선신보, 2013.07.12.>
<평양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2013/06/25>
일제강점기 번민하던 지식인이 무장투쟁에 뛰어들어 종군기자가 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윤동주 시인을 잘 알 듯 만약 분단만 되지 않았다면 김사량은 남쪽에도 널리 알려진 작가였을 것이다. 비록 분단으로 인해 남과 북의 평가는 다를지언정 그가 보여준 조국에 대한 사랑은 우리 민족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