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원래 소위 '소울류' 또는 '소울라이크'라고 불리우는 게임들을 대체로 좋아하는 편이긴한데, 반면에 본가 소울, 즉 프롬에서 만든 게임들에는 양가적 감정이 교차하기도 합니다. 프롬의 소울은 좋은 면들은 두드러지게 좋긴 하지만, 반면에 괴상하고 이상해서 납득 불가능한 점들도 꽤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저는 소울 특유의 스토리텔링 방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은유적이거나 모호해서 플레이어가 스스로 그 의미를 찾아나서도록 하는 방식은, 물론 그런걸 좋아하는 분들의 취향에 대해서는 십분 이해하지만 저에게 맞지는 않는다고 느껴요. 음식으로 따지자면 뭔가 평양냉면같은 느낌인데, 좋다는 분들이 뭐뭐에 유의하면 즐길 수 있다고 하지만 저는 어느정도 노력해봐도 그런걸 느낄 수가 없더라고요. 비슷하게는 요 몇년 간 유행하는 인더스트리얼 스타일 인테리어 - 저같은 범인의 눈에는 그냥 마감을 덜 한 것으로 밖에 안보이는 - 처럼 느껴진달까. 그노무 갬성이 뭔지 ... 원전이 그렇기도 하겠지만 번역 과정에서 뭔가가 희석되어 한국어 사용자인 내가 이해하기엔 더 어려운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만, 한국어 사용자들 중에서도 소울식 스토리 전달 방법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으로 봐서 그런건 아니겠죠.
P의 거짓은 다릅니다. 정갈하고 깔끔한 이야기를 대체로 친절하게 전달해주는 편이에요. 그렇다고 갬성이 뒤쳐지지도 않아요. 아련하고 모호한, 잡힐 듯 말 듯한 분위기 자체는 또 그대로 가지고 있거든요. 몰락해가는 세계에서 평범한 이들이 겪는 재앙의 암울함도 온전히 잘 전달되고요. 소울하면서 스토리를 느껴보려고 몇 번 시도해보았으나 영 마뜩찮아 결국엔 게임 메커닉에만 몰입하게되고 게임 후반부로 갈수록 스토리가 뭐든 별로 관심가지 않게 되는 것과는 달리, P의 거짓은 엔딩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회차플레이를 이어가면서도 끝까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저를 놓아주지 않는걸 느끼며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액션도 그런 부분이 많아요. 소울라이크의 액션은 타이밍 개념이 매우 정교하게 개입하는 일종의 퍼즐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근데 이상하게 프롬의 소울은 그 퍼즐의 전체 구조나 풀어나가기 위한 힌트를 고의로 감추거나, 또는 역량의 부족으로 인해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어요. 엘든링 말레니아의 물새난격 같은게 대표적인데, 도대체 이 퍼즐을 어떻게 풀라는건지 별의 별 시도를 해보면서도 힌트를 얻을 수 없어 답답할 때가 꽤 있습니다.
근데 P의 거짓이 제시하는 액션은 그런 면이 현저히 덜해요.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만으로 충분히 힌트를 얻을 수 있고, 그걸 기반으로 퍼즐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즐겁더군요. 힌트없는 퍼즐은 답답함만 줄 뿐이지만, 그래서 프롬의 보스전은 계속 헤딩을 하면서도 피곤하고 지루하다고 느낄 때가 꽤 있었다면, P의 거짓의 모든 보스 헤딩은 꾸준히 즐거움을 주고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느낌을 선명하게 전달해줘서 헤딩을 반복하면서도 무척 좋았습니다.
'죽어봐야만 알 수 있는 장치'는 제가 꼽는 프롬 소울의 가장 악질적인 부분 - 애증조차 아닌, 그냥 영 별로라고만 생각하는 - 요소들 중 가장 큰 부분인데요. P의 거짓에서는 일부 판자로 덮힌 바닥이 함정이라는걸 잘 알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런 부분이 없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함정스러운 기믹의 대부분이 적당히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위험신호를 캐치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심지어 판자 바닥이 무너지는 경우에조차 그것이 완전한 실패 - 캐릭터의 사망 - 가 아니라 '이런 루트도 있습니다' 라고 알려주는 장치라는 점에서 더더욱 호감이 가고요.
레벨 디자인 또한 매우 호감입니다. 프롬의 소울은 나름 구성에 정교한 맛이 뛰어나긴 하지만, 반대로 이상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동선을 가진 경우가 많아요. 어떤 분들은 그걸 '모험에 최적화된 공간 구성'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나봅니다만, 저같은 길치에겐 그저 고통 이상이 아닙니다. 무슨 무협지에 나온 진법에 빠진 것처럼 같은 장소를 뱅뱅 돌면서 힘들었던 경험이 아주 많거든요. 그렇 고통을 견뎌내고 결국 제대로 된 길을 찾았다고한들 그게 뭐 대단한 것도 아니에요. 짜증나는 신비주의인데 껍데기 까봐도 뭐 대단한건 없을 때의 실망감과 짜증을 주는거죠.
하지만 P의 거짓의 공간은 정교하면서도 깔끔하기에 저같은 길치조차 전체 구성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숏컷과 메인루트의 구분이 깔끔하고, 장면장면마다 한 번 본 지형지물은 꽤 기억에 남는 편이기 때문에 같은 길을 뺑뺑이 돌기 직전에 '아 여기 와본 데구나'하는걸 단박에 알아볼 수 있게 해주고, 갈랫길 중에서 메인루트가 아닌 곳이라면 너무 뎁스가 깊지 않아서 돌아갈 때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고, 뎁스가 깊다면 그건 분명 숏컷으로 연결되는 루트인 등, 적어도 소울에서 제가 싫어하는 '길 찾다 헛고생' 하게 만드는 선택지가 의도적으로 잘 배제되어 있어서 특히 너무 좋았습니다. 어떤 경로로 가든 무가치한 이동은 없고, 혹시나 반복하게 될 경우는 그걸 막아주는 장치가 잘 되어 있어서 너무 좋아요.
아울러 게임을 하는 내내 다크소울류 특유의 느낌, 비주얼이 전달해주는 시각적 감성과 음악이 주는 청각적 감성, 조작하는 내내 느낄 수 있는 측면까지 포함해서 총체적으로 이 게임이 '소울류다'라는 점이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저는 사실 거기까지 바라진 않았긴 하지만, 아무튼 야심찬 시도의 첫 게임에서 필요로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소울라이크이니까 소울스럽다'라는 부분이 매우 잘 지켜지고 있어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결과적으로 P의 거짓은 제가 프롬 소울에서 싫어했던 부분들이 아주 잘 개선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소울에서 좋았던 부분들은 모두 온전히 가지고 있는, 본가 소울보다 더 나은 소울류 게임이네요. 제가 이 장르에서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인왕2입니다만, 그 바로 아래에 놓아도 될만큼 너무 만족스러웠습니다.
한동안 정말 재밌게 플레이했고, 후속작도 열렬한 마음으로 기대하게 됩니다. 만드신 분들께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