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낡은 캐리어
바쁘다는 핑계로 글 쓰는 걸 미뤄두고 미뤄둬 왔다. 사실 지난 1년간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날들은 총 3~4개월이나 될까? 아내가 중국에서 돌아오고 일과 생활이 모두 안정권에 접어들자 퇴근 후 나의 몸은 소파와 티브이 속으로 깊이 파묻혔고, 책보다는 리모컨을 잡고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숲을 헤맬 때가 많았다. 여기저기서 더 편하게 글을 쓰겠답시고 아이패드와 키보드도 사놨는데 아이패드도 책처럼 먼지만 뒤덮였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뭘 할까, 뭘 써볼까 고민 끝에 하루 한 컷의 사진과 짤막한 글, 그게 아니라면 몇 줄의 문장이라도 적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처럼. 그래서 오늘 써보는 첫 하루 한 컷.
나의 낡은 캐리어
첫 직장에서 맡은 나의 직무는 해외영업. 나도 언젠간 해외출장을 가겠지 생각하며 해외직구로 구매했던 게 바로 저 샘소나이트 캐리어다. 오래 지니고 쓸 물건들이라면 허투루 구매하지 않던 나는 뭐 신소재가 어쩌고 저쩌고 해서 가볍다는 설명을 보고 구매했던 거 같다.
입사하고 몇 개월이나 흘렀을까 나보다 9개월 먼저 들어온 선배는 동남아로 어디로 제법 출장을 많이 다니는 걸 보면서 ‘아 이제 나도 좀 갈 때가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맡았던 지역은 동남아와 중동, 남아공이라 동남아를 빼곤 쉽게 갈만한 지역들은 아니긴 했다. 그러다 드디어 첫 출장을 가게 됐다. 5~6년 전이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터키 그리고 레바논을 가는 여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행기 탑승 횟수만 10여 차례. 첫 해외 출장치 곤 꽤 터프한 스케줄이었지만 생전 처음 가보는 나라로의 출장에 꽤 설렜었다. 그렇게 시작한 저 캐리어와의 여정은 두 번째 직장에서도 함께 했고, 결혼 후 신혼여행과 해외여행에서도 줄곧 함께였다.
24인치 캐리어에는 며칠간 입을 나의 옷들과 고객사들에게 줄 선물, 제품 브로셔, 어떤 때는 샘플까지 잔뜩 담겨있어 무거웠고, 돌아오는 길에는 시발 비용으로 면세점에서 지른 물건들과 여자 친구(현 와이프)와 가족들에게 줄 사소한 선물과 기념품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5년 동안 이름조차 생경한 여러 도시로 나의 옷가지들과 누군가에게 줄 선물들을 싣고 다녔던 낡은 캐리어는 이제 이곳저곳이 패이고 긁힌 채로 용도 폐기된 기계처럼 집안 구석 한편에 몸을 숨기고 있다. 더 이상 해외영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기도 하거니와 코로나 때문에 더더욱 저 캐리어를 찾을 일이 없어졌다. 언제 또 나는 저곳에 나의 일상을 그득히 담아 낯선 곳으로 향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