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얀나 May 26. 2019

짐 싸기의 달인

무채색의 위로 10

나는 짐 싸기의 달인이다. 그게 뭐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능력은 아니지마는, 그래도 생존을 위해서라면 꽤 요긴한 능력이긴 하다. 비결을 물으신다면 길게 대답할 것 없이 나를 달인으로 만들어 준 12년간의 기숙사 생활에게 공을 돌릴 것이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나는 한 달에 한번 집에 갈 때마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담아 빠르게 짐을 꾸릴 줄 알았다. 그때는 짐이라 해봤자 옷 몇 가지에 세면도구와 책 정도가 전부였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달 집과 학교를 오고가며 나름대로의 노하우도 생겼다. 티셔츠나 속옷은 돌돌 만다, 무거운 짐은 아래쪽에 넣는다, 집에 가서 무엇을 담아오게 될지 모르니 꼭 필요한 것만 챙긴다 등등.

 

 대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면서는 이전처럼 달마다 작은 짐을 쌀 필요는 없었지만 대신에 방학마다 이삿짐을 꾸려야 했다. 성인의 짐 싸기란 짐을 챙기기만 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고, 나는 방학동안 짐을 맡아줄 곳을 찾고 거기다 짐을 옮기는 것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기숙사를 내 집처럼 생각하며 살았는데 내 집에서 그렇게 1년에 몇 달간은 꼭 나가주어야 한다는 게 나는 늘 못내 섭섭했다. 보잘것없는 살림살이는 모아놓고 보면 왜이리 많은지, 그것들을 꽁꽁 싸서 간신히 구한 어디 다락방에라도 낑낑거리며 옮겨 놓으면 등골이 빠지는 것 같았다. 짐을 맡길 곳이 없을 때는 이불 보따리를 싸서 한 가득 이고 전쟁 통처럼 기차에 오른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서울에 집 없는 내가 그렇게 처량해 보일 수가 없었다.   

 

 기숙사를 나와서 월세방에 머무른 적도 있었다. 그래도 짐을 싸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 방들의 계약 기간이 보통 연초부터 연말까지 1년 정도인 탓에, 크리스마스 하면 트리니 캐롤이니 하는 그런 설레는 것보다 짐을 싸는 게 더 먼저 떠오를 정도였다. 밤새워 기말고사를 준비하면서 동시에 방 뺄 궁리까지 하고 짐을 싸고 있노라면 늘 짜증이 밀려왔다. 그런 날들 중에는 남들은 서울에 집 마련한다고 난리라는데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 간 애꿎은 부모님 탓을 하던 밤들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중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을 지나 이제는 짐 꾸리기를 연례행사로 받아들이며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짐 싸는 일은 여전히 나에게 끝까지 미루고 싶은 일들 중 하나다.

 

 언젠가 앞으로 가진 것이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은 적이 있었다. 가진 게 많다면 떠나야 할 때 바로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생각에는 숱하게 짐을 꾸려온 내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던 것 같다. 가진 것이 많다면 떠나기 위해 짐을 싸는 데 그만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나머지 떠나야 할 때를 놓치고 말 거라고, 짐 싸는 데 지쳐버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오늘도 나는 짐을 쌌다. 갈 곳이 생겼기 때문이다. 짐을 싸는 게 아직도 그렇게 싫지만, 12년간 축적된 연륜을 무시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 세월은 나를 짐 싸기 싫어하는 동시에 쉽고 빠르게 척척 해내는 사람으로 길러냈다. 달인다운 빠른 손놀림으로 짐을 다 싸놓고 가지런히 정돈된 꾸러미들을 바라보다 보니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나 혹시 짐만 싸다가 인생을 마감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별안간 다른 생각이 들었다. 짐을 싸다가 마무리하는 인생도 꽤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짐을 싼다는 것은 곧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늘 떠날 태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혹시 짐이 많아지더라도 얼른 꾸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능력 덕에 가진 것을 다 버리지 않아도 금방 떠날 수 있고, 언제든 어디로든 얼른 가방을 들쳐 메고 출발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간의 서러운(?) 세월이 안겨준 민첩한 행동력이 인생 속 수많은 모험의 문을 열어줄 것이라고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자 오히려 무서운 생각이 현실이 되어 내가 짐만 싸다가 인생을 마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살아있는 동안 그만큼 갈 수 있는 곳들이 많았다는 말일 것이기에.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의 모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