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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얀나 Dec 17. 2018

더 맛있는 세상을 위하여

무채색의 위로 3

룸메이트와 함께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맛을 조금 아는 그 덕분에 나는 여러 맥주를 더 맛있게 즐기는 법을 배우곤 했다. 코젤을 담은 컵 입구에 계피가루와 설탕을 묻혀 먹으면 훨씬 맛있다는 걸 알려준 것도 바로 그였다. 그와 함께 가게에 가서 그렇게 코젤을 먹고 나중에 혼자 캔에 든 코젤을 먹으면 그렇게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처음 코젤을 먹었을 땐 분명 충분히 맛있었는데. 하지만 코젤을 더 맛있게 먹자고 평소엔 먹지도 않는 계피가루를 따로 살 수는 없었고 그날도 우리는 집 앞 편의점에서 캔에 든 맛없는(?) 코젤을 사다가 홀짝 마시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코젤을 먹다가 나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코젤 컵에 계피와 설탕을 묻혀 먹는 게 맛있다는 걸 아는 순간, 그 순간이 불행의 시작인 것 같아.”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블루문에 오렌지 한 조각을 띄울 줄 알게 된 그 순간 같은 거 말이야.”

 

 그러니까 알게 되는 게 불행이고, 모르고 사는 게 행복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계피가루와 설탕이 없어도 코젤을 즐길 수 있었던 때, 블루문에 오렌지 조각을 굳이 띄우지 않아도 오렌지향을 느낄 수 있었던 그 때가 행복했던 것 아니겠냐고. 우리는 어쩌면 더 알게 되어서 알지 못했을 때보다 더 불행해지는 것일 테다. 높아지는 기준을 맞추기 위해 허덕이지만 만족감은 더더욱 맛보기 힘들어지니까. 앞으로 나아가는 건 불행일지도 몰라.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우리는 빈 맥주 캔을 치웠다.

 

 생각해 보니 그런 불행의 순간을 가져다주었던 건 맥주 말고도 여럿 있었다. 어쩌면 모르는 게 더 좋았던 것들과 알아가는 만큼 나를 더 행복하지 못하게 막는 것 같은 것들, 그리고 불편한 진실들. 삶에서 앎의 과정은 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하루하루 새롭게 아는 것이 고역이었다. 앎은 분명 짜릿하고 즐거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은 모르고도 잘 살았던 것들이 갑자기 나타나 나를 잘 살지 못하게 하는 듯했다. 먹지 않아도 죽지 않는 맥주에 비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나를 불행하게 만든 앎의 영역들은 거의 실존과 관련된 것이었으니까. 맥주와는 달리 살아가려면 꼭 부딪혀야만 하는 것들이 새롭게 알려졌다. 하지만 진일보가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맥주나 삶이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나에게 다시 그 모든 것들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 기회를 적극적으로 놓쳐버릴 것이다. 앎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온한 상태를 행복이라고 세뇌하며 나의 세계 안에만 머물러 있으려 했다면 나에게는 그 비좁고 어두운 공간이 전부가 되었을 것이다. 훨씬 맛있는 맥주도 맛볼 수 없었겠지. 그렇기에 소설 <데미안>에서의 유명한 구절처럼, 내가 갇혀있던 알, 그러니까 나의 세계는 나의 몸부림을 통하여 깨져야만 한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 고통스럽듯 나의 투쟁은 언뜻 괴롭고 불행한 과정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끝에는 더 큰 자유와 깨우침의 넓은 새로운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권하고 싶다. 맥주에 설탕과 계피를 묻혀 먹고 오렌지를 띄우자. 또 그런 멋진 방법을 찾아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비록 그런 맥주는 더욱 찾고 마시기 힘들어지겠지만, 우리는 그런 맥주를 즐길 자격이 있으므로. 알아챈 자들의 삶은 더욱 고단해지고 팍팍해지겠지만, 그들의 깨져버린 알을 통해 세상은 더욱 나아질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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