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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KYOTO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아경 [사진 :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페이스북]



서울시는 도시 브랜딩을 위한 상징적인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옛 동대문운동장 부지에 약 4800억 원을 들여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를 개장했다. 건축계의 아카데미상으로 통하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를 맡아 세간의 화제가 된 바 있다.


당시 동대문운동장 부지는 서울에서도 대표적으로 낙후된 도심 상권이었다. 비록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곳이었지만, 대부분의 공간이 주차장과 벼룩시장 등으로만 활용되었고, 의류 도. 소매 업체들이 밀집되어 있던 인근의 종합 쇼핑몰도 점차 사람들의 발걸음이 줄어든 상태였다.


2007년 철거를 시작해 2014년 정식으로 문을 연 DDP는 불과 3주 만에 관람객을 100만 명 이상 모았다. DDP가 하루 평균 4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찾는 명소가 된 데다 인근 도매시장 건물이 재개장하고 특급호텔과 레스토랑 등도 영업을 시작하면서 노쇠한 상권은 점차 부활의 조짐을 보였다. 이후 서울시는 '아이 서울 유'라는 브랜드 슬로건을 기반으로 서울의 진면목을 알리고 도시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다양한 도시재생사업을 계속해 왔다.


교토의 중심가인 산조 도오리의 모습 [사진 : 필자 제공]

일본인의 정신적인 수도


그런데 눈을 감고 서울을 떠올려 보자. DDP가 먼저 떠오르는가 DDP를 포함해 다양한 건축물과 역사적인 명소, 관광객들의 호기심 가득한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출되는가? 물론 DDP는 기술의 진보를 바탕으로 한 시대적 유산이자 디자인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했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과거의 '하이 서울', '소울 오브 아시아', 가장 최신의 '아이 서울 유'같은 슬로건이 그랬듯 DDP 건물 하나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식별 가능한 지표를 심었다고 보기엔 의문도 많이 남는다.


서울은 오랜 역사를 가진 수도이자 역사도시지만 현대 들어 전쟁으로 부침을 겪었다. 빠른 시간 동안 현대화되면서 세계가 주목하는 메트로폴리스로 손꼽힐 정도가 됐으나, 도시 브랜드로서의 정체성과 품격은 여전히 더 발전할 여지가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전 세계의 도시 중 도시 브랜딩이 가장 완벽하게 구축된 곳은 어디일까? 여러 후보를 떠올릴 수 있지만 필자에게 상징적인 한 곳만 꼽으라면 단연 일본의 교토(京都)를 꼽겠다.


교토시의 인구는 150만 명 안팎으로 일본에서 7번째로 인구가 많다. 한국의 시각을 그대로 옮긴다면 대도시이긴 해도 '일개 지방도시'라 볼 수 있다. 규모로 보면 도쿄나 오사카, 나고야 등 더 큰 도시도 많다. 그런데도 굳이 교토를 고른 이유가 있다. 먼저 역사적인 가치에 더해 혁신적인 이미지까지 선점한 결과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도시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효과를 낳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자신들의 자부심과 정체성이 만들어내는 의외성 역시 한몫했다.


교토의 중심을 흐르는 가모가와 강 [사진 : 필자 제공]


교토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도시다. 794년 간무 일왕이 세력이 커진 귀족과 불교 세력들을 피하기 위해 나라에서 천도한 이후, 1869년 당시 메이지 정부가 지금의 도쿄인 에도를 도읍지로 지정하기까지 천수를 누렸다. 오랜 역사와 도시에 대한 자긍심 덕에 여전히 일본인의 정신적 수도로 불린다. 또 일왕 즉위식에 사용되는 전용 좌석인 다카미구라가 여전히 교토에 있고 공식적으로 도쿄를 수도라고 선언한 일이 없기 때문에 일부 교토 토박이들은 자기네 도시를 수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유가 무엇이든 교토는 그 명맥을 잘 이어오고 있다. 매년 5300만 명의 관광객들이 17개의 세계문화유산과 50여 개의 일본 국보, 300여 개의 중요 문화자산을 보기 위해 교토를 방문한다. 하지만 단순히 관광도시의 명성만으로 교토를 설명하긴 어렵다. 일본의 문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소설 <고도>에서 "천년의 고도가 서양의 새로운 것을 가장 빨리 끌어들였다"고 설명하듯 실제로 교토는 언제나 기상이 넘치는 신도시의 면모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최초의 근대적 초등학교인 릿세이 소학교가 1869년에, 일본 최초의 수력발전 사업은 1891년에, 일본 최초의 시가지 열차는 1895년에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일본 최초의 영화 상영을 비롯해 다양한 사회, 경제, 문화적 시초가 이 도시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움직임은 도쿄로 천도한 이래 도시의 명성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되었다. 수도로서의 지위는 잃었지만, 여전히 일본 최고 도시라는 자존심과 그에 상응하는 면모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 결과 식산흥업, 즉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키는 시책을 진행해 결국 선도성을 지닌 도시 이미지를 각인시키게 만들었다.


교토의 금각사 [사진 : 필자 제공]



자부심과 반골 정신의 시너지 효과


이런 선도성은 교토에 체화된 특유의 반골정신과 결합해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잘 알려져 있듯, 교토는 보수적인 도시 이미지와는 상반되게도 일본 공산당의 지지기반이 오랜 기간 유지되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이러한 성향은 이른바 전국구 대기업은 드물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강소기업이 일본에서 가장 많이 모여 있을 정도로 중소기업 기반 경제가 탄탄하다는 점과도 연결된다. 특히 교토에 자리 잡고 있는 기업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일본의 장기 불황속에서도 소위 교토식 경영을 기반으로 세를 확장해 현재는 세계에서도 선도적인 첨단기업으로 이름 높다.


'경영의 신'이라 불린 이나모리 가즈오가 회장으로 역임했던 '교세라'(교토+세라믹에서 이름을 따왔다), 포켓몬 Go로 다시금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했던 게임 회사 닌텐도는 국내에서도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음향용 전자부품 세계 1위 기업인 니치콘이나 가정용 혈압계 분야에서 세계 최고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는 오므론, 2015년 미국 환경보호국이 폭스바겐의 배기가스 조작 사건을 밝히는 데 썼던 계측 시스템을 제작한 호리바제작소 등이 모두 교토에 본사를 두고 있다.


사실 교토는 규제와 제약의 도시라 불릴 정도로 기업들이 활동하는 데 불편한 점이 많다.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유적이 최근에도 발굴되고 있고, 시 경관을 보호하려는 규제도 강해 건물의 높이와 용적률 등에 엄격한 제한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교토에 기반을 두고 있는 강소기업들은 여전히 교토를 중심에 두고 있다. 왜일까? 노벨상 수상의 메카인 교토대학을 비롯해 많은 대학이 포진되어 있어 인력을 쉽게 확보할 수 있어서일까? 아니면 교토의 지명도가 높아 물건을 판매할 때 효과적이라서 그런 것일까?


분명한 것은 교토 사람들의 자부심과 반골 정신이 시너지 효과를 냈다는 점이다.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기술과 정체성을 고집하는 동시에 도쿄의 대기업을 능가하고자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다. 이러한 의외성이 단적으로 드러난 예가 학사 출신의 민간연구원 다나카 고이치의 2002년 노벨 화학상 수상이다. 그가 속한 시마즈 제작소가 회사 차원에서 연구개발의 폭과 깊이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장려한 결과다.


비단 기업뿐 아니라 오래된 가게와 새로운 가게들 모두 교토다움을 뽐내며 자기네 도시의 미래를 책임지는 셰르파의 역할을 분담한다. 오래된 역사와 혁신적 마인드, 선도성과 의외성이 적절한 균형을 갖춘 모습이 바로 교토의 도시 브랜드를 세계에서 손꼽히게 만들어낸 결정적 요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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