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HN 재팬 최고 경영자로 일본에서 ‘라인’ 메신저의 성공신화를 쓴 모리카와 아키라가 그보다 앞서 소니(SONY)에 입사했을 때 일이다. 그는 텔레비전에 인터넷을 연결해 새로운 서비스를 구축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TV사업부의 기술자들이 “텔레비전은 인터넷과 연결하는 기기가 아니다”라며 반대해 그의 제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가 쓴 책 〈심플을 생각한다〉를 보면 텔레비전의 본질은 ‘멀리 떨어진 곳에 영상을 전달하는 기술’에 있음에도, 소니 기술자들은 수단에 불과했던 전파를 텔레비전의 본질로 오인한다. 본질에서 벗어난 노력을 시작한 결과가 소니의 몰락으로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성공하는 브랜드에는 본질이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기업은 브랜드 본질을 논리적으로 검증하고 기업 활동의 목적과 대의를 찾아 ‘자기다움’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오늘날 수많은 제품과 서비스, 상업적인 메시지와 광고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이 과정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선택의 폭이 지나치게 넓어진 나머지 소비자들은 혼란에 빠져 스스로 머릿속에 심리적인 장벽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기업으로서는 이 장벽을 뚫고 소비자를 즐겁게 해야 더 오랫동안 더 높은 가격에 더 많은 제품을 사게끔 만들 수 있다. 그러려면 브랜드의 중심에 확고한 본질이 서 있어야 한다.
서두가 길었다. 바야흐로 브랜드의 본질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가 왔다. 비단 상업적인 분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브랜드는 국가와 정부·정당·지방자치단체는 물론 스포츠·문화·예술 등 거의 전 분야를 걸쳐 점차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명확한 본질을 바탕으로 브랜드를 구축해야 스스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제품과 서비스만으로 차별화하기가 쉽지 않은 공공 서비스 영역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케오 시립도서관’을 소개한다. 도서관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고 브랜드를 구축한 최초의 사례다.
다케오 시립도서관은 일본 사가현 다케오시에 있다. 다케오시는 인구가 약 5만 명에 불과한 전형적인 소도시다. 고령화율이 일본 도시 평균을 웃돌고, 전체 면적의 23%는 논밭이라 농업이 주요 산업이다. 13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온천 도시지만 매년 발표되는 ‘일본 온천관광 100선’에도 들지 못한다. 한마디로 전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소도시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케오 시립도서관만은 예외다. 소도시 도서관이지만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이색 도서관’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연간 이용객이 100만 명에 육박한다. 이 가운데 40만 명은 다른 지역에서 온다. 이미 일본에서는 가장 성공적인 도서관의 모범사례로 손꼽히고 있고, 한국을 비롯한 각국의 매체에서도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들의 인기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다케오 시립도서관은 2013년 4월 다케오시가 일본 최대 규모의 서점·DVD 대여점 프랜차이즈 브랜드 ‘츠타야’를 운영하는 컬처 컨비니언스 클럽과 함께 기존 시립도서관을 새롭게 꾸미면서 재개장했다. 츠타야는 이미 도쿄에 서점의 새로운 모델인 ‘츠타야 티 사이트(Tsutaya T-Site)’를 성공적으로 운영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다케오시로부터 위탁운영을 맡았다. 도서와 각종 자료를 보관하고 일반 시민에게 대출하는 종래의 도서관에서 벗어나 서점과 도서관, 카페 등이 융합된 ‘멀티 패키지 스토어’ 형태를 적용했다.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면서 책도 읽고, 공부도 하며 사람들을 만나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커뮤니티 창출을 목표로 한 것이다.
변화는 획기적이었다. 넓은 관장실을 뜯어내고 잡지 판매 코너와 DVD 대여점을 설치했다. 판매용 책과 대여용 책을 서로 다른 색깔의 패널로 구분했고, 독자적으로 개발한 분류법으로 장서 20만 권을 재분류하고 서고를 없애 누구나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유명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가 내부 그래픽 연출을 맡아 분위기도 바꿨다. 글로벌 커피 프랜차이즈인 스타벅스를 입점시켜 카페와 식사 공간도 마련했다.
운영방법도 전면 개편되었다. 자국에서 5000만 명 이상의 회원수를 보유한 츠타야 T포인트 카드를 이용해 대출과 결제 등이 가능해졌다. 이전까지는 공무원 퇴근시간에 맞춰 오후 6시가 되면 문을 닫았지만, 현재는 밤 9시까지 운영하고 연간 70일에 달했던 휴관일도 없애 365일 운영한다. 새로운 관리방침에 따라 도서관 운영비용도 절감했다. 연간 1억2000만 엔의 운영비 중 약 1000만 엔을 줄였다.
반응은 도서관 이용객 수가 늘어난 점을 보면 뚜렷하게 나타난다. 재개장 이후 일일 평균 방문자 수는 전년 대비 4배인 2900명으로 급증했고, 대출 내역도 하루 평균 1644건으로 2배 늘었다. 무엇보다 도서관 회원의 60%를 시외 거주자가 차지했다. 도서대출 역시 외부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이 빌려가는 비율이 43%에 이를 정도다. 그래서 주변 음식점은 덩달아 매출이 20% 이상 늘었고, 숙박시설은 예약률이 2배로 뛰었다. 이러한 성공사례는 일본 각 지자체에 영향을 미쳐 도서관을 변신시키는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2015년 1월 가나가와현 에비나시와 2016년 3월 미야기현 다가조시에 각각 두 번째, 세 번째 도서관이 탄생했다.
이러한 도서관의 변신을 두고 ‘본질’이 변형됐다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지는 않았다. 도서관은 관광시설이 아니라 지역민들이 가치를 학습하고 문화를 육성하는 공공 사회교육시설이라는 지적이었다. 공공도서관의 의미를 상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문제 제기였다.
그러나 나는 다케오 시립도서관이야말로 도서관의 본질에 가장 충실히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공장소의 본질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 지역 주민들만을 대상으로 해야 할까. 도서관이라고 해서 반드시 도서 대출과 보관만 해야 할까. 다케오 시립도서관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곳에 가면 여유롭게 쉴 수 있고, 몸과 마음에 활기가 차오르며 좋은 사람들도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했다. 도서관의 본질을 시민 중심으로 새롭게 재조정하며 장소의 개념 자체를 바꾼 것이다.
나는 지난여름, 사흘 동안 이곳에 머무르면서 만났던 학생들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자유롭게 드나들며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얘기하며 조용히 웃음꽃을 피우던 그들에게 도서관은 어쩌면 첫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