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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돌 Jan 06. 2023

나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자신과의 거리두기, 자신을 타자화하기

나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교도소를 들락거린 적이 있다. 9년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수감자들에게 명상 안내를 위한 교도소 방문은 오전 10시 반에 시작해서 오후 4시경에 마친다. 주당 1회, 4~6차례 다니다 보면 수감자들과 이런저런 사적 이야기도 나누게 될 만큼 친숙해진다. 폭력으로 수감 중인 한 그룹을 안내하던 때였다. 휴식 시간에 40대 중반 수감자와 교도소에 오게 된 경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내가 물었다.  


“사건을 일으킬 때 사람을 위해하는 줄 알면서 하는가요?” 

“제가 그런 줄 알면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본인이 하는 행위를 모르고 한단 말입니까?” 

“화가 나면, 뭔가 흐리멍덩한 상태로 빠져들면서 일이 터진 뒤에야 알게 되죠.”

“흐리멍덩하다는 게 뭐죠?”

“돌아가신 엄마가 치매 걸렸을 때 보니까 당신이 한 일을 기억 못 하더라고요. 내가 사고칠 때도 꼭 그런 식인 것 같아요.”   

“본인이 그런 큰 일 저지르는 걸 모른다는 겁니까?”

“그런 줄 알면 사고 치겠냐고 말했잖아요.”

     

자신이 저지른 범죄 상황을 스스로 모를 수 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엄연히 상대가 있는 범죄가 아닌가. 범죄 대가를 지불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저 태도는 뭔가. 화가 치밀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범죄사에는 그런 상황들이 의외로 빈번하다. 일본에 살던 과거의 대도(大盜)는 새벽에 정신을 차려보니 옆집 안방에서 귀금속을 꺼내 들고 있다거나, 피로 얼룩진 주먹을 씻고 새로운 삶을 살던 조직 폭력 두목 출신이 화가 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떤 사람이 피를 흘리며 본인 앞에 넘어져 있더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조건을 바꿔보자. 배고픈 시절, 미국에 유학 가서 굶기를 밥 먹듯 한 선배 한 분은 슈퍼마켓에서 먹을거리를 찾다가 생각보다 값싼 시리얼을 찾았다. 집에 와서 허겁지겁 먹은 후, 이렇게 고마운 음식도 있구나 싶어서 봉지를 살펴봤더니 강아지용 사료였다. 여든두 해를 사신 나의 장모님은 며칠 전, 냉장고에 양말을 넣어두신 후 하루 종일 그것을 찾다가 노인복지관에 가지 못하셨다. 어떤 여성 후배가 약속시간에 쫓기는 가운데 귀걸이를 손에 들고 이걸 어디에 쓰지? 하면서 한동안 그것의 용도를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 동료 힐러들 모임에서 내가 ‘잠시 쉬었다 하자’고 했는데 다음날 절친 동료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그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이었냐, 고 한다. 웬 뚱딴지같은 말인가 싶었는데, ‘잠시 쉬었다 하자’는 내 말에 분노와 적개심이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다.       

    

위 사례들을 보면서, 사회로부터 격리된 사람과 격리되지 않은 사람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찾아본다. 차이점부터 보자. 한쪽은 문제를 일으킨 대상이 자신이었다는 점이고 다른 쪽은 타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공통점은? 두 부류 모두 어느 한순간 ‘흐리멍덩’ 한 상태였다. 이 ‘흐리멍덩’ 한 상태를 실감 나게 묘사하면 어떤 그림이 될까. 쏟아지는 빗길을 와이퍼 없이 달리는 자동차가 떠오른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선명하게 볼 수 없으면서도, 아주 안 보이지도 않은 상태로 질주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상태가 장시간 지속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치매 증상이 짧은 순간만 나타나는 게 아니듯.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나 자신뿐이다. 타인은 결코 내 마음의 움직임을 볼 수도, 알 수도 없다. 나는 오늘도 무의식 중에 감탄도 하고, 욕하기도 하고, 눈을 흘기기도 했다. 고장 난 와이퍼로 빗길 운전하는 순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타인에게 들키지 않았고, 타격하지도 않았나 보다. 다투지 않았고, 욕먹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의 몸과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 자주 ‘흐리멍덩’ 해진다면, 이런 순간은 잦아질 것이고, 습관이 되고, 타인에게도 드러나고, 문제가 되리라는 것을.      


명상에서 ‘알아차림’이라는 심리적 기제는 이 문제에 대한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심리학에서는 주로 마음 챙김(mindfulness)이라고 표현하는 이것은 자신을 타자화하는 마음의 훈련이다. 자신과의 거리두기. 자신을 타인처럼 보기. 이것은 무의식 중에 감탄하고, 욕도 하고, 냉장고에 양말을 넣기도 하고, 모바일 폰을 자꾸만 잊어먹는 사람, 이와 유사한 사태를 반복하는 분에게 강추하는 학습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당신은 고장 난 와이퍼로 빗길 운전 중인 상황과 다르지 않다. 사회적 도덕률에 역행하는 질주를 하면서도 마음의 시력이 청맹과니 되었음을 인정하지 못하기도 한다. 긴가민가하다가, 늦는다.

        

‘알아차림’ 훈련은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수영을 배우려면 무조건 물속에 몸을 풍덩, 해야 하듯. ‘알아차림’은 몸으로 해야 한다. 몸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는 간단하다. 하루에 십 분이든 이십 분이든, 몸을 앉혀 고정시키고 눈감는 연습부터 하는 것이다. 관념적인 멈춤이 아니라 실제로 멈춤이다. 이십 분짜리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고 생각하라. 그렇게 멈춰 있으면 이윽고 쏟아지는 장대비 같은 잡념들 사이로 와이퍼가 작동할 것이다. 슥삭슥삭슥삭슥삭. 끝없이 쏟아지는 ‘흐리멍덩’을 쓱싹쓱싹 밀어내는 동안, 당신의 삶이 명징해지고 평안해질 것이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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