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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돌 Jan 13. 2023

자식은 부모의 결핍인생
대리인이 아니다

  

자식의 인생을 박살 내리라, 고 결심한 부모가 있다. 그럴 리가! 어떻게 부모가 자식 인생을. 하지만 이런 요소는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없다고 할 수 없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내 부모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항상 우리의 상상을 능가해오지 않았던가.  

     

서른 살이 되어서도 부모와의 여행이나 친지 방문 따위를 철저히 외면하는 청년이 있다. 가만히 보면 나름대로 원칙이 있다. 부모와 접촉이 이뤄지는 시공간은 허용하지 않는다. 혼인을 앞둔 누나의 양가 상견례 같은 경우, 가긴 가는데 혼자 출발한다. 상견례 자리에서도 부모와 떨어져 앉는다. 말을 섞지 않기 위해 잔뜩 딱딱한 표정을 유지한다. 부모 젓가락이 지나간 음식은 먹지 않는다. 이쯤 되면 한 가정 안에서 살기 어려울 법도 하다. 하지만 따로 살아본 적은 없다.  

    

그는 가족이 거실을 오가는 낮 동안에는 잠들어 있다. 마치 다른 대륙의 이민족처럼 곯아떨어져 있다가 해질 무렵에 깬다. 눈을 비비면서 헬스클럽 가고, 산뜻한 얼굴로 돌아와서 차려진 밥, 혼자 먹는다. 그런 후 책상에 앉아 게임 삼매에 빠진다. 청년은 딱 한 번, 군 제대 후 따로 살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한 달에 이십여만 원 하는 월세방이었다. 그런데, 이사 가는 날 아침, 돌연 포기했다. 딱히 이렇다 할 이유도 없다. 마침 시월 하순이어서 엄마가 겨울 이불 하나 꺼내 이삿짐 위에 얹히는 순간, 아들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 이사 안 가요.”        

청년이 말했다. “엄마는 내 인생의 틈입자였고, 난입자였고, 난동자였어요. 그런데 그게 너무 정성스럽고 성실하고 끈질겨서 항의하기도 어렵고, 항의해 봐야 먹히지도 않아서, 올무에 걸린 짐승처럼 숨만 헐떡대며 살았어요.” 엄마가 말했다.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지금까지 써먹고 그래! 세상에 자식한테 그만한 신경도 안 쓰는 부모가 어디 있대니? 엄마가 그만큼이라도 했으니 네가 기술사라도 땄지.” “그러니까 엄마는 자식 인생 평생이고 지고 다니세요. 그 대신 폼나는 학위나 자격증, ‘사’ 자 들어가는 것들은 다 수집해 드릴게요. 내 인생 다 해잡수라고!”      


이런 이야기, 일반화도 위험하지만 그다지 독창적인 사연도 아니다. 당신도 이와 유사한 가정사 한두 건쯤 숙지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른바 부모의 ‘결핍 인생 대리전’에 이은 ‘자식의 반격’ 편이라고 해야 하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내 가정사와 아주 먼 이야기도 아닌 듯하다. 아무튼, 삶의 속무늬가 자연스럽지 않은 청춘들이, 어쩌면 겉무늬만 그럴싸한 모습으로, 열심히 산다. 불현듯이 들춰지는 속무늬 때문인지, 서로 알만큼 아는 연인 사이도 결혼까지는, 글쎄다. 살아보고 결혼한다,는 말에 어른들이 대놓고 대거리하지 못할 만하다.         

저 아름다운 문양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이스라엘 와이즈만 연구소에서는 1998년 어느 날, 인류 과학사에 ‘가장 아름다운 연구’라는 평가를 받는 ‘이중슬릿 실험’ 결과를 내놓았다. 연구소는 우선, 물질이 더 이상 작아질 수 없을 정도로 쪼개고 쪼갠 미립자를 야구공만큼 확대해서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런 후, 창문처럼 네모난 구멍 여러 개를 이중으로 배치한 다음 마지막 벽에는 그 미립자들이 달라붙을 수 있도록 장치했다. 실험 의도는 그 미립자들을 다연발총 쏘듯이 벽을 향해 쏴댔을 때 슬릿을 통과한 입자들이 어떤 문양을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다.      


결과는? 미립자들은 당연히 벽면에 네모난 형태의 무늬를 만들었다. 그것은 마치 ‘사랑해’라는 글자를 오려내고, 오려낸 글자 공간에 페인트를 분사하면 벽면에 ‘사랑해’가 쓰이는 원리와 다르지 않다. 과학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뻔한 결과였으니까. 과학이 허용하는 한 가장 잘게 쪼갠 미립자지만 질량을 가진 물질은 아무리 쪼개도 물질의 성질을 잃지 않는다는 ‘보편적 진리’를 재확인한 수준이었다.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려니, 하고 심드렁해진 과학자들이 실험 작동 상태를 내버려 둔 채 화장실 등지에 다녀온 다음, 다시 실험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그동안에도 다연발 미립자 분사기는 작동 중이었다. 그런데, 벽면에 그려진 미립자 문양이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돌 하나가 던져진 호수의 너울처럼 잔잔히 퍼지면서 다른 물결과 자연스레 겹치는 문양이었다. 이게 어찌 된 거지? 저 아름다운 문양은 어디서 온 거지?    

 

이스라엘 와이즈만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미립자 다연발 발사 기구를 사용하면서 벽면을 쳐다보는 마음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공감적 주시’였을까? 아니다. 그들은 ‘물질이란 이런 것이다’는 개념에 익숙한 과학자였고, 미립자들은 과학자의 해묵은 생각에 부응하여 움직였다.  위 청년도 마찬가지다. 우주의 미립자였던 유아기부터 부모의 욕망 프로그램에 맞춰 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내 인생이 아니라 ‘부모의 결핍 인생’을 채워주는 수단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 친구, 자기 인생의 벽면에 그려진 그림이 아무리 봐도 타인 그림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이중슬릿 실험실 벽면에 ‘아름다운 문양’을 그려주었을까. 그날 과학자들이 가장 잘한 일을 따져보면 금세 드러난다. 그 놀라운 현상은 과학자들이 실험 과정을 지켜볼 때 나타난 게 아니었다. 실험 결과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고 소변이든 음료수든 각자의 생리적 현상에 집중하는 동안 일어난 일이다. 그 미립자들은 정작 관찰자의 시선이나 관심에서 벗어났을 때 경이로운 사고를 친 것이다. 

       

  어떤 어린애조차도, 염려나 의도 섞인 시선을 ‘공감적 주시’로 느끼지 않는다. 낯선 타인의 고정된 시선은 심지어 범죄다. 이쯤 되면, 세기적 연구였던 ‘이중슬릿 실험’ 결과가 이 땅의 기성세대에게 시사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자명해진다.      


  내 자녀의 삶을 박살 내기로 작정한 사건은 누가, 언제부터 시작한 일인가. 모든 어른이 이렇게 어리석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불만을 품거나 결핍감을 안고 있다면, 당신은 어쩌면 어느 순간엔가 결심했을 수 있다. 내 자식만큼은 이런 삶을, 이런 가난을 대물림해주고 싶지 않아! 그 순간일지도 모른다. 자식의 행복을 박살 내기로 작정한 시점이!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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