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서 만든 한민족 디아스포라 연대기
애플TV+ 오리지널 <파친코> 1회 ~ 3회를 몰아서 보았다. 공들여 잘 만들었다. 우선 제작진에게 큰 박수와 경의를 보낸다.
1. 그런데 뭐랄까 참 묘한 기분이 든다. 마치 LA 한인타운 ‘소반’이나 ‘올림픽 청국장’, ‘전원식당’(문 닫아서 많이 아쉬운)에서 만나는 한식 같다고 할까?
서울에도 없을 만큼 기막힌 한국 음식인데 옆 테이블에 현지인들이 있고, 달러로 계산하고, 팁도 내고, 분명 한글인데 어색한 말들(예를 들면 ‘파킹장’ 같은)을 만난 느낌… 익숙한데 낯선 느낌과 시선은 영화 <미나리>를 보고 난 뒤의 감정과 비슷하다.
2. 수 휴(Soo Hugh), 테레사 강 로우(Theresa Kang-Lowe), 코고나다(Kogonada), 저스틴 전(Justin Chon) 등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코리안 아메리칸 2세, 3세 프로듀서, 작가, 감독, 배우들이 재일동포 자이니치(在日) 4대 70년 이민사를 자신들의 시선과 감각으로 조명해 세련된 드라마로 만들어냈다.
그러니까 <파친코>는 영어 원작을 각색한 영어 대본을 갖고(한국어, 일본어로 번역해서), 할리우드 자본과 방식으로 만든 미국 드라마이면서 동시에 K-Drama이다. LA 한식집이 (법적으로, 위치상) 미국 식당이면서 (레시피, 재료, 스타일에서) 한국 음식점인 것처럼. 그래서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흥미롭다.
- 땅, 바다, 마을, 들판, 집, 거리, 옷 등 현대 한국 사극이나 시대극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느낌의 영상인데 조명, 색감, 화면 톤, 편집의 호흡과 리듬이 신선하고 때로 이질적이다. 특히 음악.
- 배우를 캐스팅하는 기준과 연기하는 방식 또한 남다르다. 어린 선자(전유나), 젊은 선자(김민하), 엄마 양진(정인지), 아버지, 이삭 등 모두 새로운 얼굴들인데 연기가 대단하다. 특히 김민하는 단연 발군이다.
3. 이민진 작가 원작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이 드라마 각색이 얼마나 새로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해체와 재구성. 큰 기와집 한 채를 허물고, 그 재료를 써서 다른 집을 지은 것 같다고 할까? 대들보, 서까래, 기둥, 기와는 모두 그대로인데 새로운 감각으로 해석하고, 틀을 다시 세웠다.
원작 소설이 시간 순서대로 써 내려간 연대기라면, 드라마는 과거와 현재, 도쿄와 오사카, 부산을 수시로 넘나들며 조각을 맞춰가는 퍼즐. 그런데 이게 기가 막히게 안 튀고, 정말 잘 붙는다.
4. <파친코>는 주인공 선자 이야기다. 1900년대 초 부산 영도 가난한 하숙집 딸로 태어나 아픈 사랑을 하고, 일본 오사카로 이주해 차별, 서러움, 고통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낸 여인. 남의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강인한 생명력으로 버티고 다시 일어서는 힘을 보여주는 놀라운 캐릭터의 파란만장 일대기인 동시에 자이니치 한 가족 이야기에 압축된 굴곡진 현대사이기도 하다.
5. 작가와 감독은 현재 전 세계 어느 나라 누가 봐도 공감할 ‘이민자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스토리를 만든 것 같다. 시간 순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연결하고, 대화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던가.
파친코 업장을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이 경쾌하게 춤추는 오프닝 타이틀은 원작의 유명한 첫 문장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루하루 삶은 이어지고, 가족은 시대와 장소를 관통해 연결돼 있으며, 삶이 뿌리째 뽑혀 옮겨진 이민자들의 고달픈 인생은 누가 봐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6. 이 드라마는 이민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이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온 부모 세대에 바치는 헌사, 잘 차린 잔칫상 같아서 뭉클하다.
이민자만 알 수 있는, 이민자 부모와 자녀를 둔 사람들은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느낌과 정서, 아픔과 슬픔이 있다. 그래서 프로듀서, 작가, 감독은 물론 윤여정 배우를 비롯한 출연진 또한 이민 생활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됐을지 모른다. 이 사람들 이번에 확실히 의기투합했구나 싶다.
드라마 <파친코>는 영화 <미나리>와 함께 한인 디아스포라의 문화적 감수성과 역량이 결집된 기념비적 작품으로 기록될 것이다. (2022. 0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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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민자가 아니면서 이민의 삶을 말하는 게 무척 조심스럽다. 다만, 3년 동안 미국 LA에서 일할 때 자연스럽게 시민권, 영주권을 얻어 정착한 분들을 많이 만났고, 고생한 얘기, 자녀와의 소통 문제, 질병 등 현재의 고민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관찰자로서 이분들의 삶을 아주 조금은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003년 KBS 일요스페셜 <자이니치의 축제> 만들면서 짧지만, 강렬하게 재일동포의 신산한 삶을 듣고 볼 기회가 있었다. 이민진 작가 소설은 1989년을 끝으로 마무리되는데 내가 참여한 이 프로그램은 그 뒤 이야기쯤 될 수도 있겠다. 이 드라마에 Co-Executive Producer로 참여하고 있는 LA 이동훈 프로듀서에게 참고자료로 소개했는데 제작진이 함께 봤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파친코>는 소설 읽을 때도 그랬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특별한 감정이 있다. 꼭 내가 아는 사람들 이야기 같아서. 1회 ~ 3회만 공개되어 아쉽지만, 기다려서 다 보고 싶은 작품이다. 유튜브에 1회 전편 영상이 올라왔으니 맛보기는 충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