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주 0일, 출산에 대한 기록
40주 0일, 유도 분만 날짜를 잡고 마음은 분주해졌다. 자연 분만을 시도해 볼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은 한 주를 기다리면서 그래도 진통이 자연스레 걸리기를 간절히 바라며 체력이 허락하는 범주 내에서 걷고 짐볼 운동을 했으나 39주의 마지막 밤에도 소식은 없었다. 기분 나쁜 가진통만 찌릿하게 간헐적으로 오다 말뿐, 결국 40주 0일의 아침이 밝았고 미리 싸 둔 출산 가방을 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2년 가까이 사용할 일이 없었던 캐리어를 오랜만에 펼쳐 싼 게 출산 가방이라니. 그런데 묘하게도 그 기분은 여행을 떠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 낯선 여행지를 떠나는 것처럼 묘하게 들뜨고 설레기까지 했다.
가족 분만실에 도착해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태동을 체크하기 위한 기계들을 배에 부착한 뒤 침대에 누웠다. 자궁 수축 정도와 진통 간격을 체크한 뒤 촉진제를 사용해 진통이 걸리길 기다렸다. 평소 생리통을 심하게 앓는 편이라 출산 진통도 버틸 수 있을 거라는 묘한 자신감으로 진통의 간격이 짧아지는 순간마다 신랑에게 태동 그래프를 봐달라며 체크했다. 진통이 점점 강하게 걸리기 시작했고, 출산의 3대 굴욕 중 하나인 내진이 잦아졌다. 아이가 얼마나 내려왔는지, 자궁이 얼마나 열렸는지 확인할 방법이 의료진의 두 손가락뿐이라니. 현대 의학의 발달에 비하면 너무 원초적인 거 아닌가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아이가 나오는 긴박한 순간을 앞두고 내 고통보다는 아이가 적절한 때에 위험하지 않게 나오는 것이 우선이기에 야무지게 헤집는 두 손가락을 버텨야 했다. 비명도 나오지 않을 만큼 기분 나쁜 고통이 이어졌고 아이가 본격적으로 내려오도록 진통의 세기를 높였다.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됐다. 수월한 분만을 위해 학습해 두었던 호흡법도 소용이 없었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도 나아지지 않는 통증에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출산의 고통을 생리통 따위에 비견했던 내 입을 매우 치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졌다. 신랑의 손을 잡는 것조차 힘들어질 만큼 의식이 자주 흐릿해지는 나를 보며 의사 선생님이 수술하자고 하면 그냥 하자고 신랑이 나를 회유하기 시작할 무렵, 진통 네 시간째. 담당의가 네 번째 내진 후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엄마는 자연 분만을 하고 싶겠지만, 내 가족이라면 난 제왕 하라고 할 거야. 진통은 걸리는데 자궁도 안 열리고 아이도 안 내려오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이가 생긴 순간부터 분만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 해 준 담당의가 가족까지 운운하며 어렵게 내린 판단 앞에 만출 자연 분만을 향한 내 바람은 힘이 없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이제 좀 꺼내 달라고 내 입으로 말하기 전에 먼저 운을 떼 주신 데 감사할 따름이었다. 수술실 준비가 완료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수술대에 누웠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은 마주한 뒤 잠들 수 있도록 하반신 마취를 택했다. 두 다리에 저릿한 느낌이 들면서 감각이 사라졌다. 배 위로 수술 도구가 오고 가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후 12시 30분, 아이 나왔습니다.”라는 말과 아이의 미약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아이보다 더 크고 서럽게 울어버렸다. 임신 10개월 동안 마흔하나 노산이라는 생각에 혹여 잘못될까 말하지 못하고 혼자 마음 졸이던 순간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기분이랄까. 수술 부위를 봉합하고 후 처치가 이어지는 동안 간호사가 적당히 닦은 아이를 내 얼굴 옆으로 가져다 아이의 볼과 내 볼이 마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축복아, 고마워. 엄마가 정말 많이 사랑해 줄게.
무사히 태어나줘서 고마워.
불러오는 배를 보며 아이의 존재를 어렴풋이 실감만 하다 마주한 아이의 체온은 너무 따스했다. 수술 잘 마쳤고 아이가 태변을 조금 먹어서 적절한 때에 수술해서 다행이라며, 아이도 이상 없이 잘 나왔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감사하다는 말을 무한 반복하다 수면 마취제에 취해 잠이 들었다. 몽롱하게 정신이 돌아올 무렵,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신랑이 눈에 보이고 축복이의 상태를 먼저 확인했다.
손가락, 발가락 다 잘 있지?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문장은 불문율처럼 박제된 채 모든 산모들에게 회자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나조차 가장 먼저 궁금한 건 역시 아이의 안부였다. 고생했다며 아이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한 이야기를 내게 하는 신랑의 음성은 따스했다.
“여보, 고마워. 여보 아니었으면 내 아이도 없이 살 뻔했는데, 다 여보 덕분이야. 고마워.”
워낙 아이를 좋아하지만 조카 둘 커가는 거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고, 혼자서도 당당하게 잘 산다고 떵떵거렸지만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안 순간부터 그렇게 지키고 싶어 속으로 안달을 내고, 혹여 잘못될까 남몰래 검색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으니 일순간 맥이 탁 풀려 신랑에게 눈물로 고해성사하듯 쏟아낸 말들은 다시 생각해 봐도 영 낯부끄럽다.
그렇게 축복이(가) 우리에게 꼬물꼬물 찾아왔다.
3.14 kg의 작고 귀한 축복이 내 삶에 초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