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부모님과의 합가.
두 번째 합가가 시작되었다. 작은 방에 퀸 침대와 아이의 싱글 침대를 붙여 놓고 벽 한쪽엔 TV를 두었다.
단 1년밖에 쓰지 못한 가구는 중고나라로 팔거나 마침 결혼하는 친동생의 신혼살림이 되었다.
아이는 어린이집을 졸업해 유치원에 입학했다. 워낙 자주 왕래 했던 부모님이라 합가 처음은 큰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생활비가 줄어들고 아이도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신랑은 다니던 회사를 계속 다녔고, 나도 몸이 조금 괜찮아진 틈을 타서 아동복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겸사겸사 정신과 병원도 알아봐서 동네의 한 정신의학과를 다니며 치료를 시작했다. 없는 형편에 정신과 진료는 많이 부담되었지만, 나는 살아야 했다.
살기 위해 정신과를 다니고, 대학병원 산부인과를 다니며, 작게나마 동네를 걷는 운동도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 8시간 근무인 아동복 로드샵에 아르바이트로 일하게 되었다. 여전히 저축은 힘들지만 우리 가족은 그렇게 버텨갔다.
그 와중에 외할머니의 치매가 시작되면서 외할머니까지 우리 집에 같이 살게 되고 34평 아파트엔 여섯 식구가 살게 되었다.
여러 명이 함께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이번에 또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사실 우리 가족은 어렸을 때부터 거의 대가족으로 살아왔다. 작은 달동네 열 평 남짓한 집에서 엄마는 딸 둘과 남편, 시누이, 시할머니까지 모시고 살았으며
형편이 안 좋을 땐 우리가 객식구가 되어서 이모집에 얹혀 산적도 있었고, 우리들 만의 집을 장만했다고 좋아하던 사춘기 시절엔 시골에서 상경한 낯선 사촌 언니들과 한 집에 살아야 했다. 나는 항상 내 공간이 부족했고, 그로 인한 결핍은 더욱 나를 옥죄어 갔다.
나는 매일 갈망했다. 우리 가족만의 공간을. 그리고 그 가족의 개념은 부모님과 여동생에서 남편과 내 아이로 조금 바뀌었다.
매일 인스타를 보며 자신들만의 신혼집을 꾸미거나 돈을 벌어 큰 집으로 이사하는 사람들을 동경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하지만 나는 아직 아팠고, 돈은 없었다. 그러던 중 친정어머니가 손목의 통증으로 하던 장사를 접고 본격적으로 손주 육아와 외할머니의 병간호를 하게 되었다.
아직 창창한 나이인데 엄마에겐 아마 그 시간이 가혹한 시간이지 않았나 싶다. 하루도 편할 날이 없던 엄마의 인생은 여전히 힘겨웠다. 그걸 알기에 나는 더는 불평을 가질 수 없었다. 그 가혹한 시간은 내가 만든 시간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든 우리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큰돈을 벌고 자 다른 일을 시작했다.
그게 우리 가족의 또 다른 지옥이 될지 모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