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친구_완주 키키 님
완주 살이 10년 차 / 로컬베이스 씨앗C.Art 운영 / 연결술사
@kiki.c.art
제가 그들의 비빌 언덕으로 있고 싶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친구들이 저한테는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 있어서 그렇게 서로서로가 비빌 언덕이 되어 줄 수 있는 일을 지속하고 싶어요
서울에서 KTX로 1시간 50분을 달려간 전주역에서 다시 20분을 기다려 완주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전주를 빠져나가자 점차 창 너머로 초록 초록한 산과 들이 나타났다. 드문드문 작은 마을들과 그 사이로 햇살에 반짝이는 하천, 논과 밭이 이어지는 풍경을 감상하며 40분을 더 가서야 종점에 도착했다. 고산 터미널 주변은 초등학교와 농협, 작은 상점들로 제법 번화했다. 지도 앱에 최종 목적지를 찍어보니 여기서부터 28분을 더 걸어가라고 나왔다. “시골”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래, 이게 시골이지!
(다행히 시골친구의 배려로 차를 얻어 타고 5분 만에 최최최종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여기는 어떤 공간인가요?
지역자산화 사업으로 조성된 저희 베이스캠프인데 여러 단체가 디귿자 형태로 모여 있어요.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고 마당을 공유하는 구조로 모여 있어요. 서로 필요한 것들을 좀 같이 해주기도 하고 뭔가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고자 기획 단계에서부터 의도했어요. 만약 일렬로 나란히 있으면 서로가 안 보이잖아요. 처음 기획 단계부터 어디에 무언가를 배치하고 공간을 얼마만큼 배분할 건지부터 논의해서 만들어진 거라서 기존 건물에 들어간 거랑은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마당에 무대 설치해서 공연 같은 것도 즐길 수 있고 그런 장점이 있습니다.
다른 단체 분들과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예요?
저는 서울에서 귀촌을 했고 여기에서 같이 활동하고 계시는 분들도 기본적으로 다들 귀촌을 하신 분들이세요. 완주에 처음 내려왔을 때는 산례라는 지역에 살면서 토요일마다 마켓을 열었어요. 그때 같이 모여 활동하면서 알음알음 인연이 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키키 님은 어쩌다 완주에 오게 되셨어요? 특별한 계기 같은 게 있었을까요?
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본가도 아직 다 서울에 있어요. 저는 여행을 좋아했고 한 번쯤 지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당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쉬고 있던 차에 먼저 지역에 내려갔던 친구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해 볼 기획자를 찾는다면서 한번 해보겠냐고 묻더라고요. 그때 게스트하우스가 엄청 붐이었거든요. 저는 자본이 없는데 이미 조성된 공간에 제가 가서 운영만 하면 되는 거였기에 한번 가서 해보기로 했죠.
낯선 지역으로 이주하는데 망설임이나 두려움은 없었나요?
해보고 안 되면 다시 올라오면 되니까(웃음) 그렇게 생각해서 좀 가벼운 마음으로 왔어요.
당시 제가 도시에서의 삶에 좀 지쳐 있었거든요. 서울에 사람은 너무 많고 지하철에서 비명을 들으면서 출퇴근하는 게 어느 순간부터 너무 괴롭고 힘들더라고요. 도시에서는 경쟁이 심하고 뒤처지면 안 되니까 엄청 열심히 살잖아요. 언제부턴가 이렇게 사는 게 의미가 있나, 인구밀도 낮은 데에서 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하던 때였어요. 직장도 이제 좀 놓아 보자고 했을 때 기회가 온 거라서 그만두고 내려올 수 있었죠.
막상 완주에 와서 살아보니 어땠어요?
사람은 생각만 하던 걸 직접 해봐야 안다니까요. 자신의 로망을 한번 도전해 보는 거는 좋은 것 같습니다. 아니면 계속 아련함이 남아 있잖아요.
사실 제가 여행을 좋아해서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싶었던 건데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3년 동안은 여행을 거의 못 갔던 거 같아요. 항시 오는 사람을 맞이해야 하므로 정작 저는 그곳에 머물러야 했죠.
그리고 게스트하우스 일은 ‘거대한 집안일이었다.’ 네, 정말 규모가 큰 집안이에요. 저희가 전문 호텔이나 대규모 숙박시설이 아니다 보니까 일하는 분들을 다 두고서 운영할 수는 없잖아요. 군 위탁 사업이라 완주군에 내야 하는 비용도 있고 공과금 같은 것도 저희가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직접 제가 다 매달려서 해야 하는 수밖에 없었거든요. 도시에서는 머리 쓰는 일만 해오다가 여기서는 몸으로 직접 일하려니 생각보다 힘들더라고요. 체력적으로도 엄청나게 소진이 많이 됐어요. 그래도 인생에서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초기에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나간 거예요?
사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 어느 정도 수입이 나올 거라고 기대했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아서 어려웠어요. 제가 원래 서울에서는 NGO 단체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활동을 했었는데 여기 와서는 관련 사업들을 안 하고 싶었기 때문에 초반에는 경제적인 게 쉽진 않았죠. 낯선 곳에 와서 다른 문화와 관습을 익히고 적응해 가는 과정에 어려움도 있었고요. 관공서와 협업할 일도 늘어났는데 도시에서와는 분위기나 업무 수행 방식에 차이가 있더라고요.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저희가 할 수 있는 일들 찾아 용역 사업도 하고 연구 과제도 하면서 경제적인 부분은 조금조금씩 풀려갔던 것 같아요.
예전엔 지금보다 정보가 많지도 않고 지역체험의 기회도 거의 없었을 텐데요.
올해가 완주에 내려온 지 한 10년 정도 됐고 이제 단체도 10년 차에 접어드는 해예요.
마치 한국에 있는데 한국에 있지 않은 느낌이었어요. 제가 지역살이에 대한 경험이 없다 보니 지역에서 쓰는 언어나 어르신들의 관심 같은 게 많이 낯설었어요. 어릴 적 할머니, 할아버지 댁 가본 거나 대학생 때 농활 갔던 게 전부였거든요.
그래서 초반에는 조금 당황하긴 했어요. 도시에서는 다른 사람한테 관심 없잖아요. 그런데 청년기에 지역에 오다 보니까 왜 젊은 사람이 여기 와 있냐 그런 질문들과 의아한 시선을 되게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그런 게 어르신들의 관심 표현이라는 거 이젠 알지만, 초반엔 쏟아지는 관심이 약간 부담스럽고 당황스러웠죠.
그래도 시행착오를 이겨내며 존버하셨네요.
저희가 지역에 연고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지역사회에 조금 대비하는 것들이 필요하겠다 싶었어요. 저희 외에도 귀촌 청년들 중에 문화 예술계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저는 정확하게 말하면 기획자 쪽에 가깝고 디자인, 그림, 목공 등 다양한 일을 하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문화예술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모이게 됐죠. 토요일마다 ‘꽁냥마켓’이라는 장터를 열고 관심 있는 분들과 함께하면서 지역사회에 저희 존재를 알리고 데뷔를 한 거죠. 그런 활동들이 지역의 일로 계속 연결 연결이 되었어요.
그땐 지역엔 청년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 거의 없었을 때라 청년 문화기획자 양성 과정과 청년귀농귀촌캠프를 열었고 완주군의 청년 정책 연구 용역도 하게 되고 고산으로 와서 청년마을까지 하게 되었네요.
키키 님의 일과와 하시는 일들이 궁금해요.
아침에 일어나면 씨앗 사무실로 출근합니다. 주 3일 하루 6시간만큼만 일하는 거를 지향하지만 일이 있으면 주말에도 상관없이 나오는 편이고요. 사실 일과 생활의 경계가 없기는 해요. 올해는 새로 귀촌 한 친구들과 같이 일을 만들어 가는 일이 많을 거예요. 이 친구들이 하는 사업에 자문도 해주고 같이 사용하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챙겨야 하거든요.
그중에는 돈을 받는 일이 좀 있고, 돈을 받지 않는 일도 반 정도 있는 것 같아요. 돈과 상관없이 그때그때 필요한 일들을 하면서 살아왔어요. 제가 씨앗에서 고정된 월급을 받고 있지 않고 그때그때 프로젝트를 따고 연결해 주고 지원금에서 일부 나오는 게 저의 주 수입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매년 수입이 일정치 않고 소액이지만 그렇게 살았어요.
꿈꾸던 삶의 방식을 일구셨나요?
드라마 <나의 아저씨> 보셨어요? 마지막 부분에 이런 대사가 나오잖아요. “편안함에 이르렀는가?” 제가 원했던 편안함을 분명히 느끼고 만족하고 있어요.
저는 지역에서의 삶을 선택할 때 좀 느리고 천천히 살고 싶었어요. 생태나 환경 쪽에 관심이 있어서 계속 그런 활동을 했었는데 도시에서는 나도 모르게 배달 음식에 치이고 그런 것들을 소비 안 하고 살 수는 없더라고요. 상대적으로 지역에서는 내가 살고 싶은 방식에 맞추어서 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완주가 로컬푸드는 정말 잘 되어있거든요. 제가 채식을 하는데 완주에서는 내가 농사를 짓지 않아도 건강한 농산물이나 식재료들을 얻기가 편해요.
최근 시골살이를 꿈꾸는 도시인 특히, 청년들이 많아졌는데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사실은 저도 게스트하우스 기회가 아니었으면 귀촌하는데 되게 두려웠을 것 같아요. 도시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성공의 기준이 있는데 그런 기준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할 때 청년들의 입장에서는 어떤 낙인이 찍히는 것 같고 두려움이 클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지역에서 나랑 비슷한 활동을 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게 필요해요. 그걸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르거든요. 가볍게 체험하듯이, 여행하듯이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전국적으로 엄청 많잖아요, 그게 어디든 가볍게 한번 다녀오시라고 하고 싶어요. 막상 가보면 나랑 안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뭐 그냥 또 지금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는 거죠.
청년들은 자기 자본도 없고 사회자본이 없으니까 그런 기회들이 있을 때 만들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 당장 내려오지 않더라도 나중에 결심이 섰을 때 지역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의지가 되고 좀 더 만만하게 올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다양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보시길 권하고 싶어요.
올해 완주에서는 중년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열린다고요.
저희가 10년 동안 지역 프로그램들을 운영해 보니 이전보다 지역살이 선택지가 많아지긴 했지만 ‘사각지대’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청년일 때는 바쁘고 정보가 없어서 청년 마을을 못 갔고 막상 관심이 생겨서 참여하려고 보니 나이가 지나버린 친구들이 분명히 있을 거거든요.
이제 저도 청년층에서 벗어나다 보니 제 또래 친구들을 지역에서 더 많이 만나고 싶기도 하고요. 그 친구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올해 행안부에서 중장년층을 위한 지역 사업을 하면서 저희가 시범사업으로 선정됐어요.
서태지, 무한도전 같은 콘텐츠를 즐겼던 세대라면 모였을 때 대화가 잘 통할 거로 생각해서 X세대를 타깃으로 천천히 지역을 탐색해 보고 스며들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3단계로 구성했어요.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
제가 귀촌해서 10년 동안 집을 여섯 번이나 옮겼고 사업장도 여기가 네 번째 공간이에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공간이 아닌 곳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계속 발생하다 보니 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좀 무리해서라도 다음타운(지역자산화 공간)을 조성하게 되었고 활동 공간이 필요한 친구들이 여기서 많이 연결되기를 원해요.
예전에는 제가 기획하거나 온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거에 조금 더 관심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런 일들을 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을 서포트해 주는, 그 친구들의 ‘비빌 언덕’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활동을 좀 더 하고 싶어요.
그게 바로 저희가 그리는 시골친구의 모습이에요!
지역에서 활동할 때 세분된 조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보니 다 혼자서 알아서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거든요. 제가 청년 활동하면서 아쉬웠던 부분들이나 누가 같이 도와주면 힘이 되었겠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어서 이 친구들한테 자문이나 도움을 줄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이 이 지역에 잘 자리 잡고 활동할 수 있고 내 동료로서 잘 지낼 수 있게 제가 지원하고 싶어요.
이렇게 하는 이유는 딴 건 없어요. 혼자 있으면 외로우니까. 저의 이웃들을 만들어 가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고 ‘로컬X체인지@완주’도 사실은 그런 소망을 이루고자 하는 활동 중의 하나인 거죠. 지역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친구들이 이주해서 근처에 모여 사는 것만으로도 제가 되게 든든해요. 제가 그들의 비빌 언덕으로 있고 싶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친구들이 저한테는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 있어서 그렇게 서로서로가 비빌 언덕이 되어 줄 수 있는 일을 지속하고 싶어요. 그게 어떤 사업이고 무엇이든 그런 게 있다면 아마 계속 머물면서 함께 활동하게 되지 않을까요?
*해당 인터뷰는 2023.05.05에 발행된 뉴스레터 <안녕시골>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