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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비 May 10. 2024

여자 회원도 받아주나요?

"동아리 들어가고 싶은데 여성 멤버도 받아주나요?"

“내가 반대해서 미안하다. 너희들이 들어온 뒤 오히려 더 활기차고 동아리가 활성화가 되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대학교 2학년 때, 여자 멤버를 받지 않았던 동아리를 우겨서 들어갔던 적이 있다. 남학생들로만 구성되어 있던 농구 동아리, '팬다스(PANDAS)'였다. 1, 2학년으로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신생 동아리였다. 

"난 여자아이들 들어오면 탈퇴할 거야!" 

처음에 여자였던 내가 들어가려고 문을 두들겼을 때, 안 받겠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던 BJ가 했던 말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당시는 '서클'이라고 불렸던 '동아리' 활동이었다. 나도 대학에 입학하고 어떤 동아리 활동을 할까 계속 눈여겨보았다. 영자신문 동아리와 사진동아리 등이 관심이 가긴 했지만, 정작 내가 처음으로 선택했던 동아리는 '백령 테니스 동아리'였다. 1981년에 처음 시작한 백령 테니스 동아리는 내가 입학했을 때 선후배 사이의 유대 관계가 꽤 돈독해 보였다. 테니스를 배울 수 있는 기회구나 싶었지만, 별 고민 없이 친한 친구 따라 큰 고민 없이 결정했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난 즈음 우리가 혼자 쓰던 동아리 방에 '농구 동아리'가 함께 쓰게 되었다. 동아리방 한 곳에 하나의 동아리가 배정이 되었던 것이 동아리 2개, 3개가 함께 쓰게 되었다. 해가 거듭하면서 동아리 수도 많아지고 다양해지고 동아리 방은 한정되어 있어 대학교 측이 내놓은 방안이었다.


1983년 농구대잔치가 출범하면서 19800년대와 1990년대는 농구의 인기가 엄청났던 시절이었다. 학교 운동장에서는 농구를 하는 친구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농구를 하던 친구들은 대부분 키도 크고 잘생겨서 내 눈을 끌었다. 어느 날 테니스 동아리방을 갔더니 농구동아리 ‘팬다스’가 함께 쓰게 되었다고 했다. 이런!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던 잘생긴 친구들이 우리 동아리방을 함께 사용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친구들은 대부분 운동장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동아리방에서 그들과 마주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학기를 보내면서 '나도 농구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왜 갑자기 그런 생을 하게 되었을까. 잘생긴 사람을 좋아했다지만, 팬다스 친구들의 외모가 멋지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선후배가 돈독한 동아리에 있어 좋은 점도 있었지만, 동아리가 신생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팬다스는 새싹이었다. 나와 같은 학번의 친구들이 1기였다. 내가 2학년일 때 2기 후배들이 들어왔다. 내가 들어가겠다고 생각했을 때, 1기와 2기로 구성된 인원도 20명 남짓 되는 정도의 작은 동아리였다. 아마 이 점이 내 마음에 더 끌렸던 것 같다. 나도 모르는 무의식의 힘으로 이 동아리를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갤럽 강점에 '절친 테마'가 있는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보다 친밀감이 좀 더 가까운 그런 소수의 집단을 선호하는 성향이 반영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다 남자 멤버로 구성이 되었다고 한다. 도전 정신이 올라왔다.

"여자들은 안 받아!"

동아리에 들어가겠다고 입회 원서를 달라고 했더니 돌아온 말이다.

"여자는 못 들어간다고? 왜?"

예기치 않은 거절에 의외로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문을 두드렸다. 보통 포기가 빠른 편이었는데, '꼭 들어가고 싶다'는 내 욕구가 생기니 마음먹을 것을 해내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집요했던 면도 꽤 있었다. 특히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떻게 해서든 해내려고 했던 것 같다. 


'열려라 참깨'의 마음으로 그때부터 계속 문을 두드렸다. 진심은 통했는지 임원들은 1차로 설득을 했다. 회원들하고 이야기를 해보니 가장 강력하게 반대를 했던 친구가 "여자 멤버가 들어오면 탈퇴를 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했다. 대부분은 여자들 한 번 받아보자는 의견이 많아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열 수 있었다. 나는 늘 함께 다니던 친구들 3명과 함께 입회원서를 썼다. 사실 농구를 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운동 신경도 없었던 나는 농구를 하겠다는 마음도 아니었다. 팬다스는 매주 토요일 아침, 운동장에 모여 함께 게임을 하고 식사하고 해어지는 모임 루틴이었다. 친구들이 농구를 할 때 나는 함께 농구를 할 수 없으니 그들이 경기하는 것들을 기록하고 매니저 역할을 하기로 했다. 회원명부 같은 것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의 인사기록 카드 같은 것을 만들었는데, 누가 시키지도 않은 것들을 너무 즐겁게 자발적으로 했다. 농구공을 골대에 넣는 연습을 틈틈이 하기도 했지만. 


2학기가 어느덧 다 가고 있었다. 1기였던 2학년 남자친구들은 군대를 가야 할 시점이었다. 1학년 후배들은 우리가 들어오고 이런저런 것들을 챙겨주고 남성들만 있던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지니 우리의 든든한 힘,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누나들이 들어오니 좋아졌다."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그렇게 2학기 말 종강파티를 하는 저녁회식 자리에서 BJ가 한 마디 한 것이다. 미안했다고. 좋았다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나는 그 약속을 지켜 여전히 우리 팬다스 동아리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2016년에는 팬다스 창립 30주년 기념 홈커밍데이를 다녀왔다. 후배들이 여전히 우리를 기억해 주고 초대를 한다. 몇 년 뒤에는 40주년 기념 홈커밍데이에 있을 것이다. 그때의 인연들은 여전히 PANDAS OB 모임으로 일 년에 1번 이상은 지속적으로 모이고 있다. 


왜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대학시절 내내 팬다스 활동은 너무 즐거웠다. 사람들이 가장 좋았다. 너무 많은 인원이 아니다 보니 누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보였던 것 같다. 사람들하고 소통하고 관계하는 것이 즐거우니 모임을 가는 발걸음은 늘 신이 났다. 누가 시켜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선택해서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렇게 하는 내 모습을 보며 동기와 후배들은 아낌없이 칭찬해 주고 지지해 주었다. 반대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런 방해를 적극적으로 막아주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여성은 안된다는 편견에 맞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두드렸던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만약 내가 그때 포기했다면 이렇게 귀한 인연을 오래 이어왔을까? 시작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한 경험은 그 뒤 사회생활과 인생 경험치를 쌓을 때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을까? 그때의 긍정 경험, 작은 성공 경험 덕분에 그 뒤로도 나는 용기를 내서 일단 해보는 도전 정신을 획득하게 되었다. 퍼스트 펭귄 역할은 어디서나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여성에게는 그 잣대가 더 가혹하다. 그럼에도 지레 겁먹고 포기하기보다 일단 해보자는 용기를 갖기를 바란다. 결과적으로 내가 원했던 동아리에 들어가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나도 첫 술에 배부른 경우도 아니다. 실패하고 또 도전하고 그런 과정을 경험한 덕분에 더 소중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내가 지금 포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도전을 위해 나는 지금 작은 발걸음이라도 내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꼭 시도해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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