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투르니에의 <고통보다 깊은>을 읽고
"사람이 성숙하고 발전하고 더욱 창조적으로 변했다면 그것은 상실 자체 때문이 아니라, 시련 앞에서 적극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에, 올바르게 싸웠으며 도덕적으로 극복했기 때문이다." (p.60)
투르니에가 노년에 쓴 이 책에서 지겨우리 만큼 반복되는 주제가 바로 이 문장이다. 너무 식상한 이 말이 그래도 다른 명망가들의 조언과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올바르게 싸웠으며 도덕적으로 극복했기 때문이다"라는 부분에 있지 않을까? (이 부분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다음 기회에...)
투르니에는 같은 내용을 이렇게도 표현한다.
"고통과 창조성에는 관계가 있다. 그 관계는 인과 관계가 아니라 연속의 관계다. 좋은 날씨가 언제나 나쁜 날시 뒤에 찾아온다고 해서 나쁜 날시가 좋은 날씨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더욱이 창조적 위인들의 과거사에서 대부분 큰 시련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역으로 모든 시련 뒤에 창조적 회복이 이어진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p.65)
완전한 온실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다 투르니에가 한 말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너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 이러한 조언이 '원론적 도덕주의'이며,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뻔한 소리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나도 다 아는 얘기 말고, 내가 몰랐던 무언가를 말해달라!"
투르니에 역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의사였고, 때문에 환자에게 "병을 대하는 태도가 결국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의 무력함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설픈 조언자들의 성급한 실수를 막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수확의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 지금은 땀을 흘릴 시간이다. 환자의 마음이 괴로움과 분노로 가득할 때 수용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우리 자신과 환자들 사이에 벽을 쌓게 될 것이다." (p.139)
투르니에는 희망을 '말하기' 전에 먼저 사랑의 '수고'를 묵묵히 수행하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혈육 동생인 야고보도 정확히 동일한 말을 했다.
(야고보서 2장 14~17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진정으로 상대의 회복을 바라는 조언과 그렇지 않은 조언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아직 전자를 충분히 실천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실감나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후자가 무엇인지는 경험적으로 아주 잘 알고 있다.
상대방을 살리지 못하는 조언, 결론적으로 무익할 뿐인 조언은 바로 조언자의 자기 만족을 위한 조언이다. 원론적 이야기,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야기는 바로 상대에 대한 사랑 없음, 혹은 오직 자신의 지식과 권위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다.
나는 한동안 소위 말하는 '멘토'들을 싫어했다. 지난 대선 안철수 신드롬을 전후로 한 시기가 우리 사회에서는 멘토 전성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나 역시 그들의 말에 처음에은 혹했지만, 이내 그들의 말에서 함께 수고를 감당하는 사랑을 찾을 수 없어서 마음이 돌아섰었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되었다. 나 역시 얼마나 '조언자'가 되고 싶어했나? 다른 사람 위에 서고 싶어하는 마음, 인간에 대해 지배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하는 욕구. 그것은 정말이지 달콤했고, 습관적이었으며, 종종 타인의 위한 수고라는 위장된 모습으로 나타나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나이가 들 수록 직접 일하는 것 만큼이나 조언하고 평가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매일 나를 벼리게 된다. 누군가를 실제로 도울 수 있는 실력과 마음을 갖추지 못하면서 조언자가 되는 것은 사기꾼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경고한다.
교회에서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라>는 주제의 설교를 한 후에 어떤 사람이 "저런 의지는 저 사람이라서 가능한 것 아니냐"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얘기를 전해듣고 한동안 마음이 먹먹했다. 나는 정말이지 그 누구도 믿음을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은 없으며, 때문에 힘을 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뜨겁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원론이 아닌 오직 나의 경험으로만 설교를 진행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누군가에게 '저 사람은 나와 달라'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해보았다. 시련을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놀라운 의지력을 발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나 역시 '저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사람들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위축감이 든다는 얘기다. 왜 그럴까? 그것은 내가 그들이 이룬 성공의 결과를 보기 때문이다. 그럼 과정을 보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나와 동등한 조건의 사람이라는 보편성에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줄 때에도 나와 당신은 결국 동등한 조건에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얼마나 동등한지, 무엇이 동등한지, 그래서 이것이 나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도 허락된 것이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즉, 출발점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건의 차이를 무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지능과 배경, 인맥과 시대적-사회적 환경의 차이는 실제적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굳이 내가 말할 바는 아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 얼마나 불리한 조건에 처해있는지에 대해서만 주목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라도, 나는 그에게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부여받은 권리가 무엇인지를 말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은 앞서 말한 원론적 도덕주의가 아닌가?
"안 되는 이유를 찾지 말고, 어떻게든 되는 쪽으로 눈을 돌려야지!"
이거 꽤나 익숙한 잔소리 아닌가? 그렇다. 이런 말은 잔소리가 될 뿐이다. 투루니에가 말했듯 괴로움과 분노로 가득찬 사람에게 수용에 대해 말하는 것은 짜증나는 잔소리 밖에 안 된다. 그렇다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출발점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하나?
내 경험의 한계 속에서 볼 때, 타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어느 정도 실현할 수 있는 것 같다. 즉, 타인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경험한 동일한 시련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극복 과정이 얼마나 긴 시간을 필요로 했는지, 얼마나 반복적인 좌절의 유혹에 시달렸는지, 생생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내가 잘나서 헤쳐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 자주 실패했다는 것, 다만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면서 간절히 마음 속으로 기도해야 한다. 상대가 오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에 주목해주기를!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의 하나님 됨을 입증하기 위해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자신을 위한 것이 없었다. 오직 병자와 가난한 자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것들 뿐이었다. 예수님 스스로는 자신의 하나님 됨을 증명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기이한 방식을 택하셨다. 성부 하나님의 뜻에 충실히 순종하여 십자가를 감당했고, 그 순종의 결과로 부활의 기적을 이루셨다.
이런 이야기는 비기독교인에게는 허황되게 들리겠지만, 최소한 누구라도 이 질문은 한 번 생각해볼 만할 것이다.
"하나님이면서 왜 굳이 인간이 되셨나?"
"나름 이유가 있어 인간이 되었다 치고, 왜 굳이 3년이나 당국자들과 충돌하면서 고생스러운 시간을 보내셨나?"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무소불위의 신이 뭐가 아쉬워 굳이 3년이라는 수고의 시간을 보냈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오늘은 '희망의 근거'를 들고 싶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으로 쓰자면 이렇다.
"내가 신이라서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 아니다. 성부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에, 그 축복으로 부활한 것이다. 나는 철저히 인간으로 너희 앞에 있었다. 십자가에서 죽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될 만큼이나 간절했던 나의 기도는 내가 얼마나 너희와 같은 완전한 하나의 인간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적 능력을 남발하면서 구원의 희망이 되신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절대자인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으로 구원의 희망이 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나중에 사도가 된 바울을 제외하면 제자들의 대부분은 학식과 배경이 좋지 못한 축에 드는 사람들이었다. 무식하기만 할 뿐 아니라, 욕심도 많았다. 야고보와 요한은 얼마나 욕심이 많고 간사한지 어머니와 짜고 새 예루살렘 나라에서 장관 자리를 보장 받기 위한 쇼를 벌이기도 했다.
예수님께서 왜 굳이 그런 사람들을 제자로 택하셨을까?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20대 후반 장교로 있을 때, 서진규라는 여성의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비참한 환경을 극복하고 인생을 일궈낸 성공 스토리였다. 나는 그 스토리보다 그 책의 제목이 마음에 남았다. 나도 여러 번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희망의 증거가 되자!"
하지만 사회 생활을 어느 정도 하다보니, 내가 가진 조건이 남들에 비해 꽤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력 없이 얻은 것이 아니었지만, 특별히 학벌과 지적 소양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기회가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조건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솔직히 없다. (엄밀히 말하면 내 마음대로 포기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최근 들어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 주목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내가 가진 보편적 기반이다. 내가 가진 특별한 조건은 자랑은 될 지언정 희망의 증거는 되지 못한다. 때문에 마음을 다해서 나와 타인의 동등함에 주목하고, 그것으로 부터 대화를 시작하고, 그것으로 부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지금 나에게 너무나 중요한 과제이다.
희망의 증거는 뛰어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등함에 있는 것이다.
투르니에의 책에서 가장 마음을 울렸던 문장을 인용하는 것을 통해 글을 마치려 한다. 시련은 그 자체로 결코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동시에 왜 그것이 온전한 승리의 조건이 되는지에 대한 말이다.
"더욱이 심각한 신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것(장애)이 단 하루의 승리가 아니라 매일의 승리다. 이 생생한 기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소유한 것에서라기보다는 투쟁하는 것에서 나온다."
P.S. 투르니에의 이 책은 좀 어렵다. 논증이라면 차라리 좋겠는데, 통찰을 중심으로 여러 영역을 넘나들기 때문이다. 일독을 권하기에는 약간 머뭇거려지지만, 어설픈 심리학 대중서보다는 확실히 추천할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