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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동준 Jun 29. 2017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 콜럼바인 총격사건 가해자 엄마의 기록에 대한 단상



‘욥의 고난’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상실과 고통의 극한을 상징한다. 일곱 아들과 세 딸이 죽고, 전 재산이 사라지고, 온 몸은 견딜 수 없는 피부병으로 고통을 겪고, 아내는 자신을 저주하고, 친구는 자신에게 훈계한다. 하지만 욥의 고난이 여느 고난보다 더한 점은 바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1999년 4월 20일에 욥의 고난보다 덜하지 않은 고난을 마주한 사람들이 있었다.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사고의 가해자 중 한 명인 딜런 클리볼드의 가족들이 바로 그들이다. 콜럼바인 사고로 12명의 학생과 1명의 교사, 그리고 가해자 2명의 자살을 포함해 총 15명이 죽었고, 수십 명의 학생들이 영구적인 장애를 얻었다. 피해자 가족의 물리적 정신적 고통, 지역 사회의 불안, 가해자의 가족 및 지인들에게 가해진 위협, 긴 법정 소송과 고통을 파고드는 언론 등 사건의 여파는 헤아리기 힘들었다.


경찰로부터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동일하게 접했으면서도 슬픔과 애도가 아닌 도피와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가해자의 유족들. ‘아무’ 문제 없어 보인 사랑스러운 아들과 무고한 학생들을 죽인 살인범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 앞에서 이들이 느낀 아득함과 절망감은 결코 욥보다 작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두 명의 가해자 중 한 명인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 수 클리볼드(Sue Klebold)가 “도대체 왜?”라는 질문 앞에서 지난 십여 년간 직시하고자 했던 자신과 아들의 진실을 기록한 책이다. 변명이나 명예 회복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왜?”에 대한 답변도 아니었다.


<수와 딜런> (출처 : 반비의 책 http://m.blog.naver.com/banbibooks/220761796176)



비난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극단적인 혐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를 대하는 전형적인 반응은 무엇일까? 콜럼바인 사건 당시 대학 초년생이던 나도 뉴스를 통해 처참한 상황을 보았다. 그리고 영원히 날아가버린 피해자들의 삶을 생각하며 당연한 분노 속에서 가해자들을 ‘정신병자’와 ‘악마’라고 생각했다. 수(Sue) 역시 아들의 ‘행동’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들의 ‘삶’을 부정할 수도 없다.


딜런이 죽기 전에 한 행동 때문에 딜런의 삶이 통째로 무가치한 것이 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악마라는 비난이 부당하지는 않다. 하지만 매번의 총기사고와 혐오 범죄 때마다 악마가 이 땅 위에 정기적으로 출현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면 악마라는 비난이 충분하지도 않다. 하나의 원인을 찾아 거기에 모든 책임을 쏟아 붓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우리의 질문은 “왜?”보다는 “어떻게?”로 옮겨가는 것이 낫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자기 목숨만 끊은 자살자든, 남의 목숨도 끊고 자기도 버려버린 살인-자살자든, 그들에게 “왜?” 그랬냐고 묻는 것은 남겨진 이들의 삶을 치유하는 접근은 아니다. 차라리 딜런이 어떻게 그렇게 변해갔는지, 수(Sue)는 어떻게 아들의 위험 신호를 보지 못했는지를 아는 것이 가해-피해 유족 뿐 아니라, 위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치유의 질문이다.



단 한 번의 예외와 견고한 세계의 붕괴


바다 건너 콜럼바인 사건을 악마의 짓이라고 비난하던 대학 초년생이던 나도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었다. 두 돌이 가까워오면서 자의식이 생기고, 간단한 언어 표현을 하고, 교감의 상대가 되어주는 사랑스런 아이를 보면서 질문을 던져본다.


“이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아마 줄 것이다. 크든 작든 어느 정도는…. 하지만 질문을 바꿔서 “이 아이가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범죄자가 될까?”라고 물으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의 모습과 중범죄자의 이미지를 동시에 수용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수용의 어려움은 조금 더 복잡한 면을 가지고 있다.


딜런이 악마이고, 병들어 걷잡을 수 없는 상태의 아이가 바로 코앞에 무기를 모아놓는데도 생각 없는 부모가 내버려둔 경우라면, 이 끔찍한 비극이 위층 포근한 침대에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들과 평범한 엄마 아빠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가슴 아픈 사건이지만 우리와는 먼 일이 된다.


나보다 몇 년 앞서 부모가 된 후배와 작년 언젠가 자녀 양육법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시골의 정취와 전통적 풍습이 강하게 남아있던 집성촌의 마을 문화가 나의 성장과 정신 세계의 형성에 긍정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서울에서 살게 될 아이에게 그런 환경을 줄 수 없어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후배는 지금 나 자신에 대해 긍정한다고 해서 나의 성장 과정을 ‘표준’으로 삼지는 말라고 충고했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나는 은연 중에 나의 삶을 인간의 ‘표준’으로, 나의 지난 시절을 성장과 성숙의 ‘표준’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 구성원이 중범죄자가 되는 것,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나의 세계’에 속한 핏줄이 때문이다. 그/그녀의 중범죄는 나의 삶의 견고함에 대한 위협이 되고, 내가 쌓아온 도덕적 실천을 무력하게 만든다. “도대체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니?”라는 질문은 사실은 “도대체 (내 자식인)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니?”라는 질문인 것이다. 세상 누가 평범한 시기에 자기 존재를 뿌리부터 의심할 수 있겠는가?



사랑에 대한 질문


인지부조화에 대한 반응은 이미 일어나버린 사건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을 때, 그 사건을 둘러싼 규범을 바꿔버리는 적응행동이다. 수(Sue)는 책의 전반부에서 아들이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평생 말썽이 없는 아이였다고 말한다. 그 딱 한 번의 문제도 결국에는 잘 극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견고한 그녀의 세계가 한 순간에 무너진 이후 조금씩 아들의 삶에서 균열의 흔적들이 있었음을 보게 되었다. 왜 그때는 알지 못했을까?


아이에 대한 맹목적 사랑 때문에 부모는 걱정스러운 행동을 보지 못하거나 나름대로 납득하고 넘어가려고 하기 쉽다.


수(Sue)는 활기 넘치는 시민이자 지역활동가였고, 약간의 완벽주의자였으며, 자신의 삶에 대해 강하게 긍정하고 있었다. 그 견고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것이 아들의 위험 신호를 으레 있는 청소년 증상으로 받아들이게 했을 것이다. ‘설마 내 아들이!’는 작은 인지부조화 상황들에 대한 반응이었다.


우리는 흔히 받아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문제가 있어도 그것을 문제라고 낙인찍지 않아야 한다고 배운다. 타인의 단점에는 둔감하고 장점에는 예민한 것을 사랑의 마음이라 한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역시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상은 결코 선(善)으로 가득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편한 사실에 눈을 감고 따뜻한 마음을 품는 것과 불편한 사실을 직시하면서 따뜻한 마음을 품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전자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고, 후자는 타인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부조리들, 사람들의 마음 속의 어두운 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더 큰 사랑, 조금은 결이 다른 사랑을 요구한다.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오고야 마는 돌이킬 수 없는 삶의 순간이 되기 전에 ‘사랑’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수(Sue)의 조금 늦은 질문은 남은 삶 전체의 숙제가 되어버렸기에.


그날 집으로 가는 지옥과 같은 길이, 불가능한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남은 일생의 과업을 시작하는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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