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탈출 : 종의 전쟁> 리뷰
9월에 쓴 칼럼입니다. 원문은 여기에 http://www.wasuwon.net/121350
원작의 리부트(reboot) 버전으로 시작된 <혹성탈출> 시리즈가 3편 <혹성탈출:종의 전쟁>으로 막을 내렸다. 유인원의 지도자인 ‘시저’는 확실히 압도적으로 멋진 캐릭터였지만 흥미로운 캐릭터는 아니었다. 내적 갈등이 거의없는 완벽에 가까운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는 인간군 대령으로 출연한 우디 해럴슨의 입을 통해 논쟁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시미안 플루’라는 바이러스로 인해 유인원은 똑똑해지고 인간 지능은 퇴화한다. 그래서 두 종(species)이 갈등하는가?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영화의 부제이기도 한 ‘종의 전쟁’은 사실상 이 작품의 핵심 갈등이 아니다. 문제는 유인원과 인간 사이에 있지 않고, 지능이 퇴화한 인간과 퇴화를 두려워하는 인간 사이에 있었다.
인간군 대령은 바로 이 문제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다. 어느 날 대령은 부하 중 몇 명이 말을 하지 못하고 지능이 퇴화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본다.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종의 퇴화 현상이라 판단한 대령은 추가 감염을 막기 위해 부하를 죽인다. 이 소식을 들은 생존 인류의 다른 결집지였던 북부사령부에서는 대령에게 치료제를 개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대령은 치매 치료제 개발의 실패와 실수로 유인원이 진화하고 인간이 퇴화한 역사 속에서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는가?”라고 분노하며 감염된 인간의 제거를 고집한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은 북부사령부 군대와 대령의 군대 사이의 전쟁이 된다. 이 전쟁에 대해 대령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한다.
“이것은 종의 생존을 건 성전(the sacred war)이다.”
이것은 대령의 진심이었다. 본인 스스로가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때, 남아있는 정신력을 모두 모아서 자살하기 때문이다. 종의 생존을 위한 성전에서 자신조차 예외로 두지 않았다. 그런 투철함은 타인을 향해서는 비정함과 잔인함이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령은 확고하게 고등사고능력, 혹은 지능이라 믿었다. 그 답을 벗어나는 인간을 제거하는 잔인함을 발휘하면서까지 개인적 신념을 지켰다.
“꼭 그렇게까지 잔인해야 하는가?”하는 반문과 함께 나 역시 그 질문의 답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 순간 아우슈비츠가 떠올랐다. 예전에 어딘가에서 강제수용소 수감자들 중 일부가 커피를 끓이기 위해 데운 물로 몸을 씻고, 아무도 봐줄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깨어진 유리조각으로 깨끗이 면도를 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지킨 사람들이 결국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책장에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출판사,2005)를 꺼내었다. 이 책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선배 수감자가 신참 수감자에게 가급적 면도를 열심히 하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유가 다르다. 좀 더 젊어 보일 것, 그래서 일할 능력이 있는 건장한 수감자로 보일 것. 그래야 용도폐기(가스실)를 면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생존’ 그 자체만 남는 것일까? ‘인간성’의 최후의 보루는 없는 것일까?
빅터 프랭클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121쪽 중에서
이와 함께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는 이유로 막 살지 않고자 하는 의지,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 공정하고 호의적이고자 하는 의지, 시련조차 정신적 성숙의 기회로 삼고자 하는 의지 등을 말한다. 강제수용소라는 조건은 인간성의 최후의 보루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조차 무너지는 곳이기에. 정말로 중요한 것만 남거나 혹은 그조차도 부서질 수밖에 없는 곳이기에.
그런데 이렇게 사람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인간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는 방식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하나는 그러한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빅터 프랭클 본인이 고백하듯) 극히 소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대답의 ‘밖’에 선 사람은 사람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간성의 실현과 보존의 책임이 오로지 개인에게만 남겨져있다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2014년 <오늘의 유머>라는 사이트에 장애인 학생에 대한 만화가 실린 적이 있다. 장애인 학생을 돌보는 ‘착한 급우’의 딜레마를 다룬 작품이었다([단편만화] 나는 착한아이를 그만뒀다). 이 만화는 장애인에 대한 호의와 냉대라는 태도만 놓고 사람을 선악으로 구분하기에는 문제가 너무 복잡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만화가 놓치고 있었던 것은 ‘시스템 역량의 부재’라는 사회적 문제이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면 대단한 작가다.) 나에게는 이것이 강제수용소에서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고귀한 노력이 놓인 ‘문제적 상황’과 동일한 것으로 보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고독하고 질긴 고뇌의 끝에 한 ‘개인’이 내릴 수 있는 답이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된다. 아무래도 지성사를 천재 철학자들의 역사로 배우다보니 이런 사고방식이 생긴 게 아닌가 싶다. 오히려 이 질문은 우리 사회가 시스템 역량으로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다양성이 어디까지인가, 종의 다양성이 어디까지인가라는 방식으로 답해야 한다.
영화 <혹성탈출:종의 전쟁>이 놓인 전쟁 상황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강제수용소에서 인간성의 보루를 찾는 것과 동일하다. 전쟁은 승리라는 목적에 기여하는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다. 강제수용소 역시 생존이라는 목적 이외의 대부분의 가치가 훼손된다. 결코 일상적 삶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 속에서 투철한 개인적 능력을 발휘한 끝에 살아남은 가치만을 중심으로 인간성을 구성해서는 안 된다. 생존경쟁을 통한 옥석 가리기가 본질적으로 비인간적, 반사회적인 이유이다.
마침내 강제수용소에서 해방의 날을 맞이한 순간에 수감자들이 느꼈던 딜레마가 바로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하는 일상적 시스템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수감자A : 말해 보게. 자네 오늘 기뻤나?
수감자B :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아니야.
“우리는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154쪽 중에서
인간군 대령이 던진 질문에 답하기 위해 강제수용소의 기록을 읽었지만, 오히려 알게 된 것은 정수(精髓)의 중요함보다는 다양성을 보장하는 시스템의 소중함이었다. 힘겹게 쌓아올린 자유의 가치를 다시 배우고, 공존의 가치를 다시 배우고 싶지는 않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