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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mun May 02. 2023

네덜란드 튤립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네덜란드의 봄


네덜란드에서 지내면서, 외국에서 지내는 행복감을 느끼는 가장 크게 느끼는 시기가 딱 이 시기쯤 인 것 같다. 서머타임의 시작. 겨울이 지나고 봄을 맞이하며, 여름을 기다리는 시기.


한국에서 살 때는 서머타임이라는 개념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서머타임이 시작된다고 하면 그저 어렴풋이 '아, 여름이 오는군'이라고 느꼈을 뿐. 하지만 네덜란드에서 지내다 보면 한국에서 살 때는 미처 몰랐던(알 필요가 없던) 일조량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한국에서 미세먼지 없이 깨끗한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듯이..)


네덜란드에서는 서머타임의 시작을 전후로 많은 것이 달라진다. 서머타임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의 유럽(특히 북쪽)의 해는 그 존재감을 뚜렷이 한다. 오후 4시를 기점으로 시름시름 사라지던 해가, 오후 8시가 넘어가도록 그 기세를 사그러뜨리지 않는다.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고 인적이 드물던 거리에, 햇빛의 자비를 피부로 직접 느껴보고자 하는 인파와 튤립이 가득하다. 카페나 식당 내부는 허전한데 비해, 외부 테라스 자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시원한 버블티를 손에 하나씩 들고 거리를 누비거나, 자전거를 타고 해변가나 숲을 가도 그저 너무 행복할 뿐인 날씨인 것이다.



해가 질 무렵의 숲은 서늘하고, 좀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긴다 (출처 :나)

가까이에 자연이 있다는 사실이 네덜란드에서 사는 것의 큰 이점이다. 하지만 이 자연은 언제든 손을 뻗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존재하긴 하나 한국처럼 늘 편안히 이용할 수 있는 편의 시설로 보기는 좀 어렵다. 자연을 중시하는 네덜란드의 특성상, 숲이나 해변가에는 한국에서 그 흔한 가로등 하나도 설치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해가 지면 그대로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기 때문이다.


비가 자주 내리고, 돌풍 수준의 바람이 많이 부는 네덜란드의 날씨 특성상 조난의 가능성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음을 인지해야만 한다. 갑자기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까지 내리친다면, 당신은 순식간에 공포영화 혹은 재난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동네 마트에 등장한 오종종 예쁜 아스파라거스들. 가격은 좀 사악하다..(출처 :나)

유럽에서는 이 시기쯤에 서서히 아스파라거스가 마트에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이 시기쯤에 나오는 아스파라거스를 무척 좋아한다. 마치 새순과도 같은 아스파라거스는 입에 넣기만 해도 그 부드러운 식감과 동반되는 오묘한 꼬들거림과 향긋한 내음만으로도 봄을 한입 머금은 듯한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아스파라거스는 그린과 화이트 두 종류가 나온다. 상대적으로 화이트 아스파라거스의 출하시기가 제한적이므로, 나는 늘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로 시작해, 그린 아스파라거스로 끝을 낸다. 마트에서는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를 먹기 위한 필러(peeler)와 전용 소스(홀란다이즈 소스인 것 같다)를 따로 판매한다. 크리미 한 소스에 껍질 벗긴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이기만 해도 레스토랑 전체요리 하나가 뚝딱 완성되니 저절로 눈과 입이 풍요로워져 즐겁기 그지없다.



2018년 4월의 큐켄호프 (출처 :나)

내가 처음 네덜란드를 방문했던 시기는 4월이었다. 여행의 황금기를 찾아서 방문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4월에 학교 오디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붙을지 떨어질지도 모를 상황 앞에 불안한 내 마음과 달리, 4월의 네덜란드는 그저 '봄'이었다.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게이트 앞에는 큐켄호프(Keukenhof)에서 열리는 튤립 페스티벌 예매줄이 길게 늘어서있었다. 뭔가에 홀린 듯 줄을 서서 표를 예매했고, 다음날 나는 큐켄호프에 서있었다.


큐켄호프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다양한 색색의 튤립들이 여럿이서 온 사람들을 맞이했고, 홀로 온 나는 그저 산책하듯이 그곳을 거닐었었다. 처음엔 '시험을 앞두고 이런데 와도 되는 것인가'하며 괜스레 마음이 복잡해 튤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평소에 꽃을 엄청 좋아했던 것도 아닌데, 그저 튤립하나에 무슨 큰 의미가 있다고 여기까지 온 내가 좀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했다.


빨강, 노랑, 핑크... 다양한 색깔이 시야를 계속해서 채워가면서 이상하게도 불안한 마음은 서서히 가라앉고, 밝은 마음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과하게 활짝 핀 꽃도 있는가 하면 , 봉우리만 간신히 틔우고 있는 꽃도 있었다. 같은 튤립이라 할지라도, 피어나는 시기까지 동일하지 않은 것은 당연할진대 그 당시에 내겐 이 광경이 적잖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래, 각자 다 피어나는 시기가 다른 거지. 꽃이 그렇듯 사람도 그런 거지.'


서른을 넘긴 나이에 다시 학부부터 시작하면서 불안감이 없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괜찮아'라는 직접적인 누군가의 한마디 말보다 꽃 한 송이가 더 큰 위안이 되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크게 깨달았다.


네덜란드에서 사는 지금은 마트에서 튤립 다발을 세일할 때(!) 가끔 사서 방에 꽂아놓고 그때를 추억하고는 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튤립은 유독 어둡고, 혹독한 바람을 견딘 이들에게 건네지는 작은 등불과도 같은 선물이 아닐까,라는 시덥잖은 생각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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