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각하는냥 May 12. 2023

환불

아, 귀찮아.


귀찮음이 하늘을 뚫고 우주까지 치솟을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다. 다른 말로 '충전 중'이라고 돌려 말하기도 한다.


3월 초에 인터넷 쇼핑에서 산 '이동식 선반'이 배송되어 왔는데 조립을 해야만 했다. 그때 마침 귀차니즘이 동시에 찾아왔고 상자는 뜯어보지 못한 채로 구석에 그대로 방치되어 버렸다. 그러는 사이 3월, 4월, 그리고 어느덧 5월이 되고 말았다.


계속 방치해 둘 순 없었다. 조립에 대한 열의가 불타오르던 5월의 어느 날 드디어 구석에 있던 상자를 집어 들었다. 테이프를 뜯어 드디어 오래 묵은 상자를 개봉하였다. 


뜨악.


제품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다. 플라스틱 재질이 햇빛에 오래 노출되어 전체적으로 삭은 상태였고 일부는 옆면이 파손되어 있었다. 단순히 2개월 방치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고 불량품이 배송되어 온 것이었다. 순간 '환불'이 먼저 떠올랐지만 이미 기간이 오래 지났기 때문에 환불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후기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판매자가 양심 불량으로 환불을 거부할 경우 대응할 카드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그냥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간 내에 반품이나 환불을 하지 않은 잘못을 인정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부서진 채로 써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일단 부서진 곳의 사진을 찍고 판매자에게 제품 상태에 대한 불만의 글을 작성하여 보냈다. 답변이 꽤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다음날 오전 회신이 왔다. 본인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 환불 처리를 해준다는 것이었다. 원래 바랐던 그림이지만 너무 쉽게 되고 보니 환불을 위해 불타오르던 투지가 순식간에 꺾여 버려 이 또한 당황스러웠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결되고 나니 할 일이 없어진 탓에 묻어두었던 귀차니즘이 또다시 올라왔다. '아, 귀찮아.'


사실 이 글은 1주일 전부터 올리려고 썼던 글이다. 퇴고의 과정이 1주일이나 걸린 것은 아니고 첫 줄만 쓰고 1주일 동안 그대로 묵히고 이제야 마무리를 지은 글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 글에서 찌든 귀차니즘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한없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그런 향기다. 이 향기를 전염시킬 테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에게 한도 끝도 없이.




작가의 이전글 오픈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