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지시 VS 업무 분배
우리 팀은 회의를 거의 하지 않는다. 다른 팀과 같이 있을 때 할 이야기가 아니거나, 긴급하게 공지할 사안이 있을때, 혹은 급하게 일의 진척도를 체크할때 회의를 한다. 그런 회의는 대부분 5분을 넘어가지 않고, 팀원과 많은 시간을 들여 소통을 해야 할 때는 회사 밖에서 산책을 하거나, 주위의 예쁜 카페를 탐방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편이다.
별도의 보고도 존재하지 않는다. 팀원들은 본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나 결제를 받아야 할 내용을 전자결제로 올린다. 나는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고, 내가 상사에게 설명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내용이면 숙지하고 결제를 누른다. 물론 평상시에 담당이 하는 일을 자세히 알고 있고, 그 의도를 평소에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쉬운 과정이기도 하다. 일상의 업무에서 궁금한게 생기면 내 자리에서 내가 물어보고 내 수첩에 메모한다. 나에게 보고를 하기 위한 보고서 작성은 가급적 피한다.
나는 담당의 의견이 곧 전문가의 의견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내가 경력도 많고 월급도 많지만, 팀원들이 본인의 업무 영역에서는 전문가라고 믿는다. 그래서 각 담당별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결정 권한을 준다. 다만, 나랑 의견이 다를 경우 팀원들이 나를 눈치보지 않고 설득하도록 유도하고, 설득 과정에서 스스로 배워 나갈 수 있도록 독려하는 편이다.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경직된 군대의 지휘체계 같은 조직을 원하지 않고 스스로 행동하고 판단하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래서 우리 회사 내에서는 우리 팀 만큼 일을 잘하는 조직이 없고, 모든 구성원들이 해당 분야의 전문가라고 자부하고 있다. (이 점은 우리 회사의 사장도 인정한 부분이다. 다만 그것은 나의 운이 좋아서라고 했을 뿐).
그런데 우리와 같은 경직된 제조업에서는 명확한 '업무지시'가 필수이다. 아무리 유능한 직원이라도 풀기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는 당황하기 마련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훈련을 많이 받은 우리팀의 담당들도 '이런 저런 일이 있었습니다.' 라고 간략하게 요약해서 보고할 수는 있지만,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모를 경우, 혹은 본인의 pay label 에서는 결정할 수 없는 무거운 일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상사가, 이런 메세지를 던져야 한다.
" 내가 책임질 테니, 이렇게 진행하자"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때가 생기겠지만, 전통적인 기업에서 '책임' 이란 무거운 족쇄요, 피하고 싶은 폭탄이다. 리더가 책임져 주고 확실한 대안을 주어야 하는 일이 빈번하다. 내가 팀장을 맡은 5년동안, 나는 이런 명확한 업무지시에 집중했고, 팀원들은 여기에 안정감을 느낀다고 종종 이야기 해주었다.
그런데, 나의 새로운 동료들과 일하면서, 명확한 업무지시 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는 걸 최근에 깨닫게 되었다. 우리도 일종의 조직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리더인 J 가 있었다. J는 단순히 업무 플로우나 프로젝트의 시간을 관리하는 것 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회의가 산으로 갈때 방향을 잡아주고, 각각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정리해 주었다.
하지만 우리 구성원들 그 누구도 어떤일을 해야할지 정리하는 것을 업무지시라고 느끼지 않았다. 보통 각자 준비한 내용을 공유하고 피드백 하는 2시간 정되의 화상회의가 끝나면, 슬랙으로 회의의 중요요약내용이 바로 올라오고 거기에서 업무분배가 이런식으로 진행된다.
" 자 오늘 회의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가 해야 할일은 이렇습니다 @J 는 설문지 초안을 작성해 주시고 @P 는 협력업체 인터뷰 일정 수립해 주시고 @부장님 은 주요 인터뷰사 연락처랑 동의 받아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혹시 추가적으로 해야 할 일이나, 수정해야 할 사항이 있을까요? "
업무 분배를 하는 방식이 정중해서 지시라고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 동료 모두에게 공동의 책임과 권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리더는 그것을 촉진하고 방향을 잡아주는 역활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업무 지시가 아닌 업무 분배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 내가 책임질테니 이렇게 진행하자 " 라는 말은 나의 새로운 동료들 사이에서는 많이 어색하다. 응? 니가? 왜?
명확한 업무지시가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조직의 하부로 갈 수록 의사결정권한이 없는 조직에서 명확한 업무시가 없다면 직원들의 불만은 오히려 상승한다. 실제로 두리뭉술하게 지시해 놓고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나몰라라 하는 리더들이 직원들의 많은 지탄을 받는 것을 보면 명확하게 업무 지시하는 리더를 만나는 사람들은 행운아이다.
다만, 급변하는 환경에서 업무의 최일선에 있는 전문가들에게 스타트업 처럼 권한과 책임을 같이 주고 리더가 그것을 인큐베이팅 해준다면, 조금더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주체적으로 성장하는 구성원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이런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조직은 직급을 가진자가 수직적이고 기계적으로 통제하는 조직은 절대 따라갈 수 없는 민첩하고 살아있는 조직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강조함에도, 나는 J가 저녁을 먹는 장소에 대해서 나에게 어떻냐고 물어볼 때 한번도 싫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15년을 꼰대로 지내왔던 내가 리더의 말을 아직도 완벽하게 '거역'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이 글을 빌어 J 에게 이야기 하고 싶다.
" J ! 우리 팀이 같이 갔었던 이탈리안은 맛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자주가요. 우리 골고루 다른데도 좀 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