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주말은 폭풍과 같이 지나갔습니다
뒤늦게 장가가는 동생의 일정을 따라가야 해서, 토요일은 예비 부부와 한복을 맞추러 청계천 광장시장에 가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저녁에는 신사복에 어울리는 제 구두를 사기 위해서 명동바닥을 헤매고 다녔구요. 일요일에는 대전에 내려가서 예비부부의 상견례 자리를 지켰습니다. 부모님을 서울에서 대전으로 모시고 내려가서 사돈어른댁과 인사하고, 부부가 새로 살게 될 신혼집도 양가 식구들이 같이 가서 구경했습니다.네살짜리 우리 아들은 주말을 어른들의 일정때문에 헌납하는 꼴이 되었지요. 갑자기 추운날에 쉬지도 못하고 강행군을 펼친 탓에, 감기도 심하게 걸렸습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의 아이는 점점 때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정도는 모든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다시 올라오는 길에 절정을 찍었는데요, 한없이 아이의 행동과 말이 귀여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안좋은 태도를 보인것도 그때였습니다. 화장실에 다녀오고 나서 아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사기 위해 편의점으로 걸어가는 길이었습니다
" 아가. 할머니랑 같이 가자. 손잡자"
" 싫어! 할머니 손잡자고 하지 마!"
어제 한복을 맞추고 나서 광장시장을 걸을때도 할머니는 아기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아이가 " 할머니 손은 거칠어서 잡기 싫어" 라고 얘기해서 제가 너무 슬펐거든요. 나이가 들어가심에도 여전히 가사도우미를 하고 계시는 어머니가 늘 안타깝고 죄스러운 자식인데, 제 아들이 저의 아픈 부분을 후벼판것 같은 느낌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가벼운 주의만 주고 말았었죠 (저희 와이프가 어머니의 손을 만져보니, 본인 손이 더 까칠하다고 해서, 이중으로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시 일요일의 상황으로 돌아와서, 저는 이번에는 가만 두면 안될 것 같아서, 편의점으로 들어가려는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얘기를 좀 하자고 말했습니다. 제 마음은 아팠지만, 이런 일로 아이가 혼난다고 생각하면 아이나 할머니 둘다에게 또다른 상처가 될 것 같아, 저는 아이를 안아올려서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습니다
" 아들아. 할머니는 니가 너무 예쁘고 한번이라도 더 만져보고 싶어서 손 잡자고 하시는데 왜 싫다고 해?"
"....."
아이는 답이 없습니다. 저는 옳고 그름을 말하기 전에 제 감정을 말하면 조금 더 아이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우리 아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할머니가 너무 가슴 아플 것 같은데? 그리고 할머니는 아빠의 엄마잖아. 할머니가 가슴 아프면 아빠도 너무 가슴 아플것 같은데? 우리 아들이 아빠의 엄마한테 조금만 예쁘게 말해주면 안될까?"
"...."
아이는 끝내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네살짜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나 싶었습니다. 조금 크면 알게 될까? 아이가 컸을때, 아빠와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했을때까지 할머니가 기다려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요. 아이가 조금 더 사람의 감정과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할 나이가 되면 다시 말해줘야 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저는 아이를 더이상 다그치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할머니와 편의점에서 젤리를 사서 나왔고, 휴계소 광장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경찰차 장난감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속도 없이 그 장난감을 덜컥 아이에게 안겨주고는 함박웃음을 지으셨습니다.
그래. 저렇게 손자가 예쁘시고 손자를 보시고 행복하면 된거지. 내가 너무 세세하게 말 하나하나를 신경썼나 싶어서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휴계소에서 나와 부모님을 본가에 모셔다 드리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아이는 할머니가 사준 장난감이 요란한 음악과 현란한 움직임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을 집에 도착해서 한참을 보고 있었고, 주말동안 집안일을 못한 와이프와 집안정리를 못한 저는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을 확인하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한참을 장난감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저한테 와서 안아달라고 합니다. 피곤하고 졸린가 싶어 아내에게 대충 정리하고 자자 하고 말하는데 아이가 저에게 말을 겁니다.
" 아빠"
"응?"
"할머니한테 미안하다"
"왜?"
"손 못잡아줘서"
아이가 말하는 순간, 가슴에서 울컥하고 무엇인가 올라와 눈으로 몰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이 앞에서 울 수 없어서 꾹 참고는 아이를 다시 바라봅니다. 오후에 있었던 일을 4살짜리 아이가, 할머니가 사준 장난감이 빙글빙글 돌아보면서 생각해 본 듯 합니다. 할머니가 사준 장난감과, 할머니가 손을 잡자고 한 일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나에게 무엇이든 해주었는데, 나는 고작 손잡아 달라는 걸 안했나 싶었을까요? 아이의 진심이 담긴 "미안하다" 라는 말이 너무 고맙고, 아이에게 너무 일찍 많은 태도를 요구했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교차합니다.
저는 아무말도 못하고 아이를 꼭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여전히 미성숙한 아빠와, 나이에 비해 훌쩍 성숙해진 아들이, 서로를 보듬어 주는 밤이었습니다.
( 그 뒤로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전화해서. 할머니 할아버지 오늘 너무 고생많았어. 차안에 오래 있어서 힘들었지? 라고 말했고, 66세의 할머니는 " 응 너무 힘들었어. 우리 아가도 힘들었지" 라고 응석을 부리시네요. 아름다운 하루의 마무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