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9번 공항버스
무언가를 '저장'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버릇 때문에 항상 스트리밍으로 노래를 듣는다. 평소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지만 여행을 가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재생할 곡목이 없다는 것, 이보다 기운 빠지는 일은 아마 없을 지 모른다.
연착으로 시작하여 비행기만 여덟 번을 탔던 이번 여정에도 재생할 음악이 없음이 아쉬웠다. 멋있어 보이려고 늘 챙기지만 여정 내에 한번도 완독한 일이 없는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도 이미 다 읽었다. 출장일정을 요약하는 보고서도 유례없이 다 써재꼈다. 업무 관련 문서를 더 이상 봤다가는 말 그대로 토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럴 때, 내 귀를 기분 좋게 자극하는 시원한 비트와 재기발랄한 노랫말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십 종류의 터키시 딜라이트, 다 마시고 난 뒤 컵을 엎으면 내 미래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는 커피, 신선한 과일과 채소와 치즈가 계속 리필되고, 손을 들면 마사지사가 와서 어깨며 머리를 시원하게 매만져주며, 자동 피아노로 연주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가 흐르는 터키항공 비즈니스 라운지에서도 채울 수 없었던 한 가지 욕망은 바로 '가요를 듣고 싶다' 였다.
이어플러그에 마스크, 유니클로를 껴입은 채 그저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가득찬 열시간의 비행이 끝났다. 입국 심사와 짐찾기는 순식간에 끝났다. 오후 여섯시가 조금 안된 시각이었다. 11번 게이트로 나가자마자 집으로 가는 6009번 공항버스가 플랫폼에 멈춰섰다. 낑낑대며 캐리어를 끌고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다. 목배게, 여권, 탑승권, 지갑, 휴대용 세면도구 등이 잡다하게 뒤섞인 가방에서 얼른 이어폰을 찾아, 귀에 끼웠다. LTE가 터진다는 것은 얼마나 속시원한 일인지. 얼른 뮤직 앱을 실행하고, 다리를 뻗는다.
달려 가고 있었어
작은 결심을 품고
숨찬 언덕길
끝에 선 두 발자국
그때 시작된 나의 노래
도망치고 싶었던
겁이 많았던 시절
한참 망설인
걷잡을 수 없는 마음
내 두 손에 꼭 쥔 약속
운명을 믿지 않았던 너에게로
기운찬 기타 리프와, 평이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이 노랫말이 지난 8일의 지난함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풀어주었다. 한강은 시원하게 뻗어 있고, 도시를 감싸기 시작한 어둠은 찬란한 불빛들로 단장할 준비를 마친 듯 했다. 석양을 안은 능선은 보일 듯 말 듯 따스하게 미소짓고 있다. 무심결에 지나치던 소소한 풍경들이 별안간에 애틋해지고, 춥고, 빠르고 깨끗한 이 큰 도시에서 이 한 몸 누일 곳이 있다는 것이 이토록 다행스러운 일이 될줄이야. 곧 일상의 더깨에 훅 하고 날아가 버릴 연약한 감정이지만, 낯선 곳에서 조금쯤 짓눌려 있던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게 된 건, 순전히 지금 내 귀에 가요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훌쩍 넘어서
마주침의 뜨거운 순간을
한없이 기다리고 있던
그날의 우리를 찾을 수 있기를
한 번쯤 들었겠지
노래는 한밤의 불빛처럼 달려
쉼 없이 이 길을 거슬러
마침내 도착한 곳에서
오랜 약속처럼 너를 만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