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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Sep 02. 2020

왕십리, 똥 이야기

더러운 이야기의 즐거움

어린이날을 맞아 D와 성수 옥탑방을 빌려 밤새 루미큐브를 한 다음날 아침, 우리는 수제버거를 배불리 먹고 성수에서 왕십리 방향으로 슬슬 걸어가고 있었다. 성동교를 건너 중랑천을 따라 걷고 있을 때, D는 조금 당황하며 "J, 저 배가 아파요."라 했다.




똥이 마려운가.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니 그의 동공은 불안한 듯 흔들렸고 안색은 창백했다. '이런 급하구나!'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왕십리 쪽으로 가면 화장실이 있을 거예요!" 라 말하며 그의 손을 붙잡고 화장실을 찾아 잰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참을만했던지 그는 내 손에 이끌려 걸으며 바지에 똥 싸 본 적 있냐 물었다.

똥 이야기라니!! 나는 그가 던진 주제에 꽤나 구미가 당겼다.



더러운 것들을 이야기할 때의 그 이상 짜릿한 쾌감이 있다. 온몸이 더러움을 뒤집어쓰는 것 같으면서도 멈출 수 없는 그 중독성과 오감이 집중하게 되는 그 이상한 즐거움... 이상하게도 우리 가족 모두가 비슷하게 그 더러운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을 알아, 우리는 종종 더러운 이야기를 하며 배가 아프도록 웃곤 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말하기 좋아하는 나의 더러운 이야기는 내가 강원도에서 곤드레나물밥을 먹은 날의 사건. 중학생이었던 내가 처음으로 곤드레나물밥을 먹은 날의 이야기인데, 그 새로운 나물의 향긋함과 간장 양념을 넣고 싹싹 비벼먹는 감칠맛이 좋아 한 그릇을 금세 비운 내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곤드레나물밥을 그대로 다 토해버렸다는 이야기다.


나는 D에게 바지에 똥을 싸 본 적은 없지만 다른 더러운 에피소드는 있다며 잔뜩 신이 난 채로 그 날의 이야기를 했다. 강원도로 가는 차 안에서 약간의 멀미 기운이 있었다는 것을 잊은 내가 곤드레나물밥을 빠르게 흡입한 탓에 보기 좋게 체해버렸고 곧 화장실 변기통을 부여잡고 속에 있는 것들을 그대로 게워내야 했는데 그 와중에 목에서 빠지지 않는 한가닥의 곤드레나물을 빼내기 위해 목구멍에 손을 집어넣어 그 퉁퉁 불은 곤드레나물을 빼내야 했다며 이야기를 빠르게 마무리 지을 때의 그의 표정은 음,..



세상 혐오스러운 것을 본 듯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는 D를 보며 내 공격이 제대로 먹혔다고 생각할 즈음, 그는 "저는 바지에 똥 싸 본 적 있는데." 했다. 충격적 이게도 D가 화장실이 아닌 곳에서 예상치 못하게 실수를 한 경험은 두 번. 한 번은 술을 진탕 마신 다음 날 아침 친구들과 슈퍼마켓을 가는 길에서였고 다른 한 번은 샤워를 마치고 맨몸으로 침대에 누워서였다 했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화장실을 찾아 헤매며 그가 해 준 이야기들은 더욱 적나라하였으나 그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이쯤 적어야겠다.




 그 날의 사건 이후 사람들이 더러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궁금하여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두 가지 흥미로운 가설을 찾을 수 있었다.


1)

SHAPE 이라는 온라인 매거진에 게재된 칼럼( "There's a Reason Why We Like to Click on Gross Stuff on the Internet", https://bit.ly/3gOHTbJ)에서  St. Joseph's University의 Alexander J. Skolnick 박사는 (연애기를 쓰며 미국대학 심리학 박사의 연구까지 인용하다니)인간이 더러움을 좋아하는 이유를 역겨움의 필요성에서 찾기 시작했다. 박사는 인간은 역겨운 감정을 통해 더러운 것들이 우리 몸에 가져다줄 수 있는 해로움을 차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상한 우유를 마시면 뱉어내는 것과 역겨운 냄새가 나는 토사물을 피할 수 있도록 만드는 "역겨움"이라는 감정은 우리를 병들게 할 수 있는 더러운 것들을 피하기 위한 본능의 산물인 것. 그렇다면 역겨움을 즐기는 이유는? Skolnick 박사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더러운 사진들을 괜히 클릭해보고 사람들과 더러운 이야기들을 공유하는 것을 우리가 롤러코스터를 좋아하는 것에 비유했다. 그는 "롤러코스터가 수직 낙하하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롤러코스터가 "통제된 공포"이기 때문이며, 이때 인간은 생사의 위협을 받지 않고 흥분 상태에 있을 수 있다." 했다. 역겨움과 더러움을 롤러코스터 예시에 비교해도 이는 성립한다.



2)

국민일보, 국제신문, 네이버 블로그, 육아서적 등 다양한 매체에서는 아이들이 똥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 다뤘다. 정리하면 아이들이 똥 이야기만 나오면 자지러지게 웃는 이유는 1) 응가가 아이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스로 창조해내는 물건이라서, 2) 응가이야기를 하면 어른들을 당황시키는 쾌감을 느낄 수 있어서, 3) 어감이 재미있어서 이다.



이유야 무엇이건 내가 똥이 급한 D를 이끌고 똥 이야기를 한 그 날의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써 내려가는 이유는 나와 "더러움 감수성"이 같은 사람을 또 한 명 발견한 기념비적인 날이기 때문이다. 혹은 D와 웃고 떠들 수 있는 주제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이 뿌듯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냥 불특정 다수가 읽는 이 곳에 더러움썰을 풀어내며 "통제된 더러움"이 주는 쾌감을 느끼고 싶어서일 수도.





아, 역시 모든 똥 이야기는 시작도 마무리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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