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행정처리를 하고 제주에 잠시 보름살이를 다녀왔다 구직 준비를 하며 바쁘게 지냈다. 그동안 미뤄뒀던 구직. 땅 하고 시작한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되질 않더라. 워낙 경기가 안 좋기도 하고 지원할 데도 별로 없고 지원을 해도 최종에서 미끄러지기도.심지어 처우에서 어그러지기도 했다. 뭐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나도 신중해진 탓이겠지.
알프스에서 생각했지. 한국 오면 '영남알프스'에 가겠노라고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땐 역시 등산이지요
마음이 바빠질 때면 스스로의 여행기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봤다. 여행유튜브도 다시 보고 편집도 일단락 냈다. 싹 정리하면서 내 맘도 정리되는 기분... 집에 남겨졌던 남편 인터뷰도 해보고. 그러고 나니 드디어 이제 진짜 일할 준비가 끝났다 싶다. 이 글은 찬찬히 여행을 돌아보며 짓는 매듭.
미뤄둔 버킷리스트를 급하게 풀어냈다. 킬리만자로 등반, 알프스 트래킹, 프리다이빙 - 이집트의 다합이 프리다이빙 성지라는데 아 그러면 가는 김에 이집트의 유적과 사막도 들를까 - 입버릇처럼 인생에 3개월만 빈틈이 생기면 남미에 가야지라고 10년 동안 말하고 다녔는데 10년 동안이면 충분히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을 스페인어가 아직이라 그러진 못했다. 역시 사람이 늘 준비가 되어있어야……
갑작스레 시작된 80일간의 퇴사여행. 실직으로 시작된 여행이므로 별다른 목적은 없었고 그저 빨리 이 거지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연을 가까이하고 다른 환경에 놓여 스스로의 경계를 좀 무너뜨리고 싶었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이런저런 기회를 찾아보고 삶의 방향도 정하고 싶었다. 별 목적이 없대 놓고 거창한 소망이 자꾸만 붙었다. 당연하게도 80일은 짧고 사실 여행을 - 그게 아무리 이제껏 해보지 않았던 긴 여행이라도- 하고 돌아온다고 해서 드라마틱한 일이 곧바로 펼쳐지지는 않는다. 사진과 영상을 연신 열심히 찍고 SNS를 하고 유튜브를 한다고 스타가 되진 않는다. 중요한 건 내 마음. 매번 올 기회는 아니니 좋은 걸 나누고 싶은 마음, 그 맘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여행하는 기분이야'를 그냥 인사치레로 넘기지 않는 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고 전해지고, 비슷한 걸 해보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이래도 된다는 게 가 닿기를 바라는 맘. 가령 '여행 많이 하면서 살라'며 이제 삶의 재미는 TV 뿐이라던 할머니에게(할머니가 내 여행 도중 쓰러지셨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가셨다. 다행히 얼굴도 보고 대화도 나눴지만 이 여행얘길 전해주지 못해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매일매일 잘 지내는지 궁금해하는 가족들에게, 이다음에 저길 가봐야겠다 점찍어둔 혹은 아직 생각지도 못했던 그 누구에게라도 닿아 반가운 소식이 되길.
부지런히 찍은 사진과 영상, 그리고 그때그때 남겨둔 소회는 ‘이제껏 제일 길게 떠난 여행’의 해상도를 높아줬다. 나도 몰랐던 나의 표정, 생각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나를 더 잘 알게 된다는 식상한 진리. 놀랍게도 그건 진짜였다. 물가와 상관없이 나의 적정 지출은 일 5-7만 원 선. 돌아가서 행복하기 위해 최저한도로 벌어야 할 금액은 이 정도. 봄~초겨울 정도를 날 수 있는 짐의 규모는 15kg. 빨래를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마지노선은 2주. (있는 옷을 알뜰히 입는다는 전제 하에.) 그러면 소비를 더 많이 할 필요가 없잖아? 산책은 나의 큰 기쁨. 예상치 못하게 대형견을 마주치기라도 할 때면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더라. 아무 데나 잘 드러눕고 몸에 햇살을 반쯤 걸치기를 유난히 좋아한다. 한 동안 지쳐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하고 싶은 게 생겼다. 소박하고 안 바쁘게 살겠어. 바쁜 것도 습관이라 생각해. 짐도 시간도 점유하는 시간을 줄이고 단순하게 살고 싶다. 한참 뒤의 캠핑카나 오토바이 여행을 생각한다. 한 5,6년 더 열심히 일하고 시즌2로는 진짜로 남미로 갈까. 시기를 좀 더 앞당기려면 알바도 하면서? 미뤄왔던 스페인어를 좀 진심으로 해야지.
그러나 입국하자마자 곧바로 느낀 건 피로와 조바심이었다. 나는 마치 여행지에서의 루틴이 없었던 것처럼 적극적으로 시간을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허비했다. 하루종일 누워서 유튜브를 보고 SNS를 하고 쉽게 지쳤다. 하루의 끝, 침대에 누워 따끈한 남편을 끌어안고 눈을 감을 때면 편안하긴 편안한데 뭐 하나 뿌듯한 게 남지 않았다. 조그만 둔덕만 보여도 쓰러져 딱 5분만 눈을 감고 싶었던 그렇지만 결국 끝까지 올랐던 자정부터 해가 뜨기까지의 킬리만자로 자락, 발길 닿는 그 어디나 저렴하고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을 수 있던 가로수마저 어쩜 오렌지나무인 세비야의 골목, 50도의 바람이 불어와 어디에도 그 더위를 피할 수 없었던 그러나 그 숨 막히는 사막의 벌거숭이 산까지도 전에 없던 별세계였던 이집트까지… 분명 그땐 체력이 넘치든 지쳤든 활력이 넘쳤는데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장기여행은 말이 여행이지 뜯어보면 식사와 산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누워서 계획을 짜고 계획을 수정해 가며 먹고 부지런히 걸었다. 하고 싶은 건 미루지 않고 바로바로. 좋은 감정은 그때그때 기록했다. 일상은 너무나도 익숙한 나머지 정성스럽게 시간을 보내는 법을 잊어버리고 만다. 나는 그게 회사 때문인 줄로만 알았지 회사를 다니지 않는 지금도 그럴 줄이야. 매일 정성스레 챙겨 먹고 산책한다면, 그리고 가끔의 의외성만 챙겨주면 - 미술관이든 영화든 도서관이든 혈중 비일상성 농도를 유지시켜 준다면 - 나는 영원히 행복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만 생각을 멈추고 운동화를 신고 일단 나가본다. 돌아오면서 안 먹어본 식자재를 사 와야지.
하나 더. 여행을 갈무리하면서 비로소 체감한 건 이 여행은 기후위기여행이었다는 것이다. 베네치아의 광장은 잠겨있었고 원래 더운 이집트도 일교차가 갈수록 심해진대고 알프스의 초입 마을에서는 8월에 난데없이 눈을 만났다. 고국은 이집트만큼 더웠고 다음 행선지인 세비야에서 그 더위를 다시 만났다. 거대한 지구의 선풍기가 고장 난 듯했다. 도무지 양 극단이 교류가 되질 않는 듯. 대륙을 걸쳐 두 번 산에 올랐는 데 빙하가 없어질 거란 소릴 어느 곳에서나 들었다. 오염수가 방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가역적인 인재에 드는 절망감을 어찌해얄 지 모르겠다. 이집트의 46도가 넘는 더위는 정말로 피할 곳이 없어 절망스러웠다. 이젠 지구 어디서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기분을 떨칠 수 없다. ‘희망이 있어야 여행도 하지...’ 길에서 만난 여행업계 사람이 말했다. 일본의 요즘 세대들은 여행을 안 한다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게 마지막 여행이었겠구나. 5일간의 캠핑이 끝나고 대망의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 우후르피크에 오르던 날. 밤 11시부터 오전 9시까지 이어진 산행에서 극심한 고산증에 시달리며 나는 절박하게 희망을 찾고 있었다.
돌아와서 만난 사람들은 제일 좋았던 곳을 묻는다. 실컷 먹고 보기로는 스페인, 뿌듯했던 건 킬리만자로, 별세계는 이집트였다.이제는 여기에서도 오래 가져갈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플라멩코를 새로 배우게 되었다.)이 여행이 당장 나의 직업을, 일상을 바꿔주진 못했지만 connecting dots라고 어딘가에 가 닿을 것을 믿는다.당장에 여행 유튜브도 꾸준히 하고 있고 여행하며 알게 된 지인의 여행사 오픈 프로젝트도 하고 있으니 꼭 그리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