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씨는 생산적이지 않은 인간이 되기로 했다. 생산성이란 말이 싫었다. 생산성을 중요한 덕목이라 여기는 것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싫었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생존하고 싶었다.
그는 백수가 되었고, 소비만 하면서 삶을 끝내기로 했다. 그는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했다. ‘인간은 원래 삶을 소비하기 위해 이 지구상에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생산을 하기 시작하면서 불행해진 것이다.’
그의 통장엔 천만 원 정도가 들어있었다. 그는 그 돈을 주식이나 비트코인에 투자하면 생산적인 활동이 되는지 아닌지 판단이 어려웠다. 고민 끝에 간접적으로 생산에 참여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투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소비는 즐거웠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착실하게 소모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그는 흥청망청하기보다 알뜰하면서 아주 맛있게 삶을 소비해나갔다.
예전에는 생산활동에 의해 몸에 발생한 독을 제거하듯이 소비를 했다. 그것은 절박하면서 중독적이었다. 하지만 생산활동이 없는 지금 그의 소비는 느긋하면서 순수했다. 마치 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듯이 이루어지는 소비였다.
돈이 줄어드는 것이 그는 두렵지 않았다. 삶의 끝을 스스로 정한다는 것이 오히려 편안했다. 생산적인 인간으로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산하지 않으며 일 년을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일 년이 흘렀다. 처음의 다짐과는 다르게 김 씨는 조금씩 초조해졌다. 이대로면 두 달 후에 통장 잔고는 백만 원이 깨질 것이다.
잡코리아에 들어가 보는 일이 잦아졌다. 취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구경하는 것뿐이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었다. 전 회사에서 지긋지긋하게 여겼던 업무들은 만족감과 성취감을 주는 프로젝트로 표현되었고, 그동안의 휴식은 더 높은 생산성을 위한 재충전과 자기계발의 시간으로 포장되었다.
겨드랑이가 땀에 젖는 몇 번의 면접을 거쳐 김 씨는 다시 직장인이 될 수 있었다. 지금 그는 회사에서 누구보다 생산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