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심어둔 곳 '피레네 산맥'

산티아고行 까미노 첫날, 그날의 이유를 말하다.

by 떠수니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스페인 산티아고로 향하는 800km의 순례길(이하 까미노)을 '걸은 사람'과 '걷지 않은 사람'. 나아가 피레네 산맥을 '넘은 사람'과 '안 넘은 사람'으로도 나눌 수 있다고 본다. 그만큼 평생에 한 번 경험하면 눈과 마음이 청명 해지는 장소다.


순례자들 사이에선 피레네 산맥을 거친 사람을 암묵적으로 인정해주는 부분이 있다. 인정이라 함은 생장부터 시작한 순례자 사이에서만 형성되는 반가움과 특별함, 각별함을 의미한다. "어디서 시작했니?"라는 질문에 "생장"이라고 답하면 끼리끼리 엄청 반가워한다. 생장은 생장피에드포드(Saint Jean Pied de Port, 이하 생장)라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이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까미노 12개 중 순례자 대부분이 길고 긴 프랑스길(Camino Francés)을 걷는데 그 출발점이 생장이다.


프랑스길을 선택한 순례자들은 피레네 산맥을 끼고 프랑스에서 스페인 국경을 넘어가는 코스를 첫날부터 걷게 된다. 가장 힘든 구간으로 뽑히는 피레네. 걷기가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앞날을 깜깜하게 만드는 당황스러움을 준다. 해발 1,450m까지 두 발로만 올라야 하는 그 여정이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그만큼 값진 무엇인가가 우리를 기다린다. 오히려 그 힘듦이 감사할 정도로 피레네 광경은 마음속에 박혀 버렸다. 그래서 눈앞에 만날 펼쳐진 기분이다.


눈을 감아도, 다시 떠도 언제나 펼쳐지는 피레네. 피레네 산맥이 어떤 곳인지, 그날 이야기로 공유해보고 싶다.





힘들 각오가 필요한 곳이다.


같은 알베르게에 머문 친구들 모두 오전 6시에 기상했다. 다들 눈뜨자마자 부리나케 나갈 준비를 완료했다. 이들은 내가 포토그래퍼인 줄 안다. 난 그저 DSLR을 들고 있을 뿐.




산티아고로 떠나는 날이 본격 시작됐다. 마음만큼은 비장하다. 오전 7시 15분. 까미노 행군을 본격 시작한다. 그런데 출발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오르막길에 쓰이는 근육과 신경들은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크게 놀랐다. '가장 힘들면서도 아름다운 구간'이라는 가이드북 곳 수식어구를 계속 떠올리며 7kg 무게의 가방을 환하게 웃은 채로 짊어지려 가려고 노력 중이다. 줄지어 우리를 기다리는 오르막길에 안 쓰던 근육들을 어떻게 잠재울지 계속 걱정된다.



출발 14km 지점. 우리 신발은 아직까진 샛노랗고 새빨갛다. 산티아고에 가까워질수록 고운 빛깔은 완전히 사라진다.
초반엔 가방과 스틱, 발걸음과 적응하느라 바쁘다. 아름다운 광경에 놀라 입이 벌어지면서도 헉헉거리느라 말도 안 나온다.
떠오르는 태양과 안개, 구름이 뒤섞여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시간 반 정도 지나자 몸과 가방, 스틱을 어느 정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살 만 하니 그제야 피레네 구릉 지대를 걷고 있다는 점을 인지했다. 눈앞에 펼쳐진 아침 풍경과 시원한 바람이 오르막길의 고통스러움을 모조리 없앴다. 이런 광경을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까? 언제쯤 또 볼 수 있을까?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새벽안개에 둘러싸인 난 피레네로부터 무슨 마법에 걸리는 기분이었으니깐. 신비의 마법이 없었다면 아마도 걸음 하는 내내 '언제 도착할까'만 반복 생각했을 거다.


피레네 오전 풍경. 엄마가 다독거려주는 느낌을 받고 다시 영차 영차 힘을 내고 또 냈다.


어제 비가 내려서 그런지 제대로 진흙판이다. 말똥, 염소똥이 잔뜩 뒤섞여 단순한 진흙밭이 아니다

평온한 풍경을 뒤로 하고 다시 고통이 몰린다. 어깨가 짐 무게에 적응한 줄 알았는데 결국 계속 아프다. 코치받은 대로 허리끈과 가슴 끈을 번갈아 가며 힘의 무게를 조율하고 있다. 발목까지 오는 등산화를 신어야 옳다는 걸 피레네에서 단번에 깨달았다. 자갈과 진흙이 깔린 길이 많다. 가장 높은 곳인 레푀더 안부(Col de Lepoeder, 1,450m)에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를 뿐더러 큰 돌덩이들이 깔려 있어 발목을 다치기가 쉽다. 까미노에선 트랙킹화보다 등산화를 추천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발목까지 올라오는 신발을 안 신으면 흙 알갱이와 돌맹이들이 잽싸게 양말 속에 들어가서 걸음에 방해를 준다.


별생각 없이 길을 그저 따라갈 때도 있다. 제일 높은 레푀더 안부로 가는 길 앞두고는 특히 그렇다. 앞사람 옆 사람 뒤에 오는 사람 모두 슬슬 말이 없어진다. 오늘이 가장 힘든 날이라고 하니깐 내일부터는 좀 수월하겠지! 애써 위로하며 좁은 보폭으로라도 힘내서 걷는다. 세상엔 공짜가 없잖아?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도착해도 하느님께 은총받을 일이다.



한 순례자의 죽음을 기리는 비. 까미노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다. 기념비를 오랫동안 말 없이 바라봤다.
산악자전거로 까미노를 찾은 사람들. 걷는 순례자들보다 절반 일정(15일)을 잡고 산티아고로 간다. 이런 오르막에서 자전거를 타다니 체력이 대단하다.
호기심 소녀 프랑스 출신 마리. 가는 길마다 지나치는 법이 없다. 어디론가 달려가던 마리는 피레네의 깊이를 한참 바라보았다.
앞에 펼쳐진 끝도 없는 오르막길.


역시 듣던 대로 고된 나폴레옹 길이다. (아래 설명 참고) 출발지 생장에서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까지의 거리가 25km. 이 중 70%가 오르막이다. 더구나 제일 까미노 전체 여정에서 가파른 경사라니깐 실제 걸은 거리는 지도상 거리보다 7km 정도 더 길다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수 백만의 순례자들은 힘들었던 이 길을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나 역시 까미노를 끝낸 지금도 피레네 산맥이 가장 인상 깊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나폴레옹 길 → 발카를로스 길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개. 나폴레옹 길과 발카를로스 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나폴레옹 길을 날씨가 안 좋으면 포기하고 다른 루트를 찾아가라고 경험자들은 하나같이 권한다. 날씨 안 좋을 때 나폴레옹 길로 가면 산안개로 시야를 확보할 수 없으니 매우 위험하다는 설명이다. 발카를로스 길로 국도 N-135를 타는 편이 낫다고 한다.


(왼) 나폴레옹 길(24.8km) - 산길

(오) 발카를로스 길(25km) - 아스팔트 도로길


* 발카르로스 길: 성 로마제국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가 스페인으로 군대를 끌고 진입했을 때와 초라하게 뒤로 물러설 때 카를로스 계곡(Valcarlos)을 이용했다고 한다. 론세스바예스까지 주도로로 가는 길도 있지만 날씨 문제가 없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아스팔드 도로로 걸으면 발과 무릎에 엄청 충격이 간다.


* 나폴레옹 길

- 1808년 포르투갈 정복을 빌미로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한 나폴레옹 군대가 이용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순례자들을 괴롭히는 도적이 저지대에 비해 적었기 때문에 중세 순례자들이 많이 애용했던 길이다.

- 프랑스 길 전체 구간에서 가장 높은 곳(1,450m)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 걷는 거리는 지도상의 거리보다 더 길다.

- 걷기에 익숙하지 않은 첫 날이고 20km 이상 오르막이 계속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힘들다. 가이드 북 『까미노 데 산티아고(출판사 책보세)』








말똥 향기도 사랑하게 되는 곳이다.



어느 순간 우린 점심 먹을 장소를 계속 찾게 됐다. 말똥도 많고 오르막이 이어지니 마음처럼 아무 곳에나 덜컥 앉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조금만 더 올라가 보기로 했다.


남자 왼쪽 편에 말똥이 덩어리로 쌓였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
말똥과 함께해도 맛나는 샌드위치. 말똥향기를 맡으며 나눠 먹고, 앉아 쉬기도 감사한 순간이다.




드디어 먹을 장소를 찾았다. 시원한 음료수와 간단한 요깃거리를 파는 트럭까지 있으니 여기서 자동 쉬어가게 된다. 과일주스 1팩에 1.50유로. 만족할 만한 가격이다. 생과일주스만 사 먹었는데 여기선 그런 걸 따지면 안 된다. 지금부터 안 먹던 것도 먹는 연습을 해야 한다.


사람들이 둘씩 셋씩 점심을 먹고 있다. 말똥이 엄청 깔렸는데도 앉아 먹는다. 수채화 같은 피레네 풍경과는 심하게 대조적인 냄새. 겨우 찾은 평지니깐 다들 앉기로 결심한 거겠지. 어떤 사람들은 덜커덩 누워 하늘을 보고 있다. 난 아직까진 그런 엄두는 나지 않는다.


점심거리는 미쳐 생각도 못했는데 동행들이 준비한 샌드위치를 나눠먹었다. 전일엔 생장에 늦게 도착한 데다 짐 부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같이 먹으면 된다며 반쪽을 흔쾌히 건넨다. 다행히 함께 나눠도 충분할만큼 큼지막하다. 재료 하나하나 맛났지만 나눠먹는 마음에 더욱 맛났다. 이곳까지 올라오면서도 초콜릿이며 에너지바며 녀석들이 계속 주는 걸 받아먹었는데 불편한 기색 하나 없다. 알게 된 지 이틀밖에 안 됐지만 성품에 진한 감동을 먹는다. 까미노가 더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






초반 거쳐가는 오리손에서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까지는 화장실도 단 하나 없지만 구멍가게도 하나 없다. 그래서 점심쯤 볼 수 있는 이 트럭이 반갑다. 가이드북들엔 트럭 소개는 없다. 오후 늦게 도착한 순례자들은 이 트럭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생장에서 오전 6~7시 사이 출발하면 웬만해선 놓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2시 반.



트럭 아저씨는 주문받자마자 손님들의 국적을 체크한다. 한 명도 빠짐없이 음료수라도 사 먹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은 자료. 끊임없는 오르막에 숨 돌리느라 안 사먹을 수가 없다. 이날 이 곳을 지나친 한국인은 10명. 북유럽 사람들과 맞먹는 흥미로운 수치다.(오후 12시 30분 기준)






마음 녹이는 풍경을 선물하는 곳이다.



계속되는 오르막길이지만 좋은 에너지가 방출된다. 조랑말들과 양떼, 소떼들의 움직임이 내 마음을 흔든다. 이들 속도에 맞춰 느릿느릿 기분 좋게 걸어가려 노력하니 나도 모르게 안정이 된다. 그간 불안정했던 건 아니었는데 이곳을 걷는 내내 안정을 찾은 기분이다.


얼굴이 까만 양들을 마네크라고 하는데, 이들 젖으로부터 나온 '오쏘 이라티(Ossau Iraty)'는 품질 좋은 귀한 치즈라고 한다. 다만, 순하디 순한 양들 목에 네모난 종이 걸려 있어 마음은 아팠다. 무게도 제법 돼 보이는데, 세계 대회에서 우수한 치즈로 인정받았다고 한들 양들은 행복하지 않을 거다.



마음을 터주는 풍경이 쉴틈없이 이어진다. 줄 지어 가는 조랑말들을 보니 내가 그림 한 편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고지대로 가니 조랑말들과 양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목에 걸린 종들이 시원한 피레네 산맥 바람에 섞여 울린다. 나에겐 가볍지 않고도 마음 적시는 소리.
대자연 앞에선 왜 인간이 순수할 수밖에 없는지 깨닫는 순간. 피레네에 서 있는 오늘만큼은 이곳에 돌아다니는 양과 다름 없다.



머리도 마음도 활짝 열린 풍경 속 배고픔을 잊기도 한다. 맑은 공기와 뜨거운 햇살에 이미 배가 불렀을지 모른다. 굶주린 상태에서 갑자기 좋은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나곤 하는데 여기선 공기 먹다 배 터져 죽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공기와 햇살.. 그토록 간절했던 존재다.


"햇빛을 아예 안 보고 살았던 사람 같아 병색 있어 보인다. 까미노에서 실컷 햇빛을 쬐라."


프랑스 민박집 마담이 집을 나서기 전 하신 말씀이다. 내 얼굴을 읽어주는 그 말씀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파졌다. 생각해 보니 마지막 국제부 근무 동안은 햇빛 구경은 거의 못했다. 2년 반.


초반 걸음길엔 철새는 물론 흰목대머리수리, 붉은 솔개, 검독수리, 이집트 독수리, 수염수리 등의 맹금류를 볼 수 있다고 하던데 풍경 보니 피레네 산맥에서는 있을 법한 얘기라는 생각이 든다. 막상 눈 앞에 나타나면 무섭겠지만 소들과 양떼들 덕분에 까미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은 없어졌다. 어머,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긴장감이 사라져 버렸다.



까미노 표시. 기행기나 가이드북에서는 보지 못한 표시라 그런지 더 반갑다. 인디언 얼굴에 그리는 자국들 같기도 하고. 하늘에 펼쳐진 그림 낙서까지 여기선 다 특별하다.


피레네의 능선은 특별하다. 오대산의 어머니같은 부드러움과 저쪽 북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카리스마를 고루 가졌다.


목동 아저씨가 양떼를 이끄는 진풍경(珍風景). 이때만큼은 카메라보다 눈으로 풍경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산의 높이를 계속 실감하려고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산맥의 선과 질감, 깊이가 한 눈에 보이니 신기하고 신기하다. 살면서 뒤돌아보는 일은 거의 없었던 나다.





나를 온전히 숨겨주는 곳, 마음 열어주는 고마운 곳이다.



엄마 마음처럼 둥글고 널따란 능선에 우리 할아버지는 하늘에서 오늘도 따뜻한 햇빛 줄기를 내려 주신다. 할아버지 나 보여? 나 여기 있어요. 할아버지 생각에 마음이 열린다.



파올로 코엘료의 『순례자』 책에서 "피레네 산맥은 아주 훌륭한 공명 상자"라고 소개된다. 정말 내 마음까지 다 울릴 것 같다. 마음 같아선 산 끝자락까지 다가가 내 맘을 터놓고 싶지만 살짝 웅얼거려도 크게 울릴까봐 으레 겁난다. 속마음이 내비치면 내 마음이 저 멀리까지 퍼지고, 그때 마침 바람이라도 불면 더 크게 부풀려질까봐서다. 습관적으로 억누른다. 또 참는 자신을 보고 피식 웃어 본다. 그래도 지나간 내 마음까지 생각할 여유가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과거의 나도 보고 싶지 않아 두 눈 감고 살았는데 말이다. 이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마음이 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피레네는 반겨주면서도 숨겨주는 매력이 있다. 그 아무도 날 찾지 못하게 받아 준다. 어떤 조건도 없다. 걸음을 시작한 5시간이 지나서야 이어폰을 꽂기 시작한다. 기다렸던 순간. 우리가 음악을 듣기 시작한 건 긴장감이 풀렸다는 신호기도 하다. 음악이 들리는 순간 이제 진정한 나만의 세계로 몰입하게 된다.



유럽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너도밤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고 하는데 양 옆에 서 있는 나무들이 '너도밤나무'가 아닌가 싶다.



에피톤프로젝트가 한 달 전 내놓은 정규 앨범부터 들었다. 그중 가사가 없는 미뉴에트를 계속 듣는다. 플루트 소리에 나만의 세계로 점점 빠진다. 걸음을 시작하는 내게, 새로움이 시작될 내게 복잡한 감정 없이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곡이다.


마음이 더 열리고 있다. '첫날인데 앞으로 이것보다 더 열리면 어쩌지?' 행복한 걱정도 든다. 원래 복잡하고 상처 많은 인간이었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지금 행복하다. 마음을 열어주면서도 나를 온전히 감싸주고 보호해주는 기분.


이렇게 못난 나를 받아주는 곳은 아리띠 숲(Bosque de Irati)이다. 같은 햇살이 내리쬐는 숲이더라도 피레네의 숲은 깊이가 다르다. 사견이지만 미국 캘리포니아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숲은 웅장하지만 위대하지는 않았다. 피레네는 그저 위대해 보인다.


스페인 여행에선 빠질 수 없는 노리플라이. 알람브라 궁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올라 그라나다 시내를 내려다보며 바람에 머리를 휘날릴 때 노리플라이 곡들을 멍하니 들었다. 어떤 잡념도 없던 시간이 2년 만에 또 왔다. 지금 내게도 그런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다. 마침 피레네에서 별 어렵고 고통스러운 생각 없이 걷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굳어 있던 마음이 열리는 기분이니 그 시점에 머문 장소가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까미노에서라면 마음이 예전처럼 돌아갈까 싶어 언제부턴가 안 듣던 곡들도 까미노로 데려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좋아했던 '이사오 사시키(Iso Sasaki)' 아저씨의 곡도 감흥이 없어졌던 것 같다. 이뤄낸 꿈을 위해 바둥바둥~ 악착같이 살던 그때가 생각나는 게 싫어서였다. 용기를 내어 오랜만에 듣는 곡들을 듣는데 이상하게 거부감이 없다. 까미노 효과일까?


이사오 사사키 아저씨의 음악 중 'sky walker'는 각별하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마음을 알아줬던 곡, 울고 싶을 때는 눈물까지 받아줬던 고마운 곡, 말없이도 마음을 전달해준 곡, 무기력함을 극복시켜준 곡, 아끼는 사람들에게 선물했던 곡, 수천억 번을 더 듣는대도 질리지 않을 곡, 그래서 정말 감사한 곡. 아저씨 음악을 피레네에서 다시 듣게 되니 단단하고 강했던 내가 다시 살아난 것 같다.



낙서 많은 저 공간에 마음을 숨겨 볼까도 싶었다.
옷이 드문드문 벗겨진듯한 피레네 산맥. 해발 1,400km 수준에 어울리는 키 작은 꽃과 새파란 하늘이 애교스럽다.
말똥밭에서 차마 눕지 못했는데 드디어 누웠다. 가방을 다시 메기 싫은 마음에 스틱까지 쥐고 있지만 누워서 하늘로 발을 뻗고는 내가 자유스럽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알리고 있다.






행운을 빌어야 하는 곳이다.


기가 막힌 날씨 덕분에 기억 속 피레네 풍경은 완벽했다.



어제는 안개로 엄청 흐렸다고 하는데 오늘은 말끔하게 개어 있다. 기가 막힌다. 하늘은 그림 속 하늘처럼 파랬고, 그 속 구름은 애교스러울 정도로 등장해 나의 기운을 행복하게 흔든다. 백두산 천지에 올랐던 1998년 광복절. 그 날도 그랬다. 고등학교 시절 경상북도 교육청에서 주최한 〈고구려 역사탐방〉연수로 만주 지역 일대를 갔었는데 마지막 날 일정이 백두산이었다. 지프차를 타고 천문봉에 도달하기 직전만 해도 새하얀 짙은 구름이 백두산 천지를 반지(ring)처럼 휘감고 있었다가, 지프차에 내려 천지로 걸어 올라가는 그 순간엔 구름이 완전히 걷혔다. 덕분에 북한 쪽 천지까지 한 눈에 담고 왔다. 자욱한 안개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건 진짜 행운이라고 한다. 천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내려가는 길에 보니 흰 구름들은 천문봉을 다시 뒤덮고 있었다. 일 년에 네 번 정도 볼 수 있다는 확 뚫린 천지를 봤던 순간처럼 오늘의 피레네에서도 그렇다.


난 맑은 하늘 아래 피레네 산맥을 걷고 있으니 복 받은 사람임엔 틀림없다. 하루 먼저, 그리고 다음날 피레네를 오른 순례자들은 비와 안개로 이 아름다운 광경을 놓쳤다고 한다. 까미노에서 연을 맺은 '엄마와 아들(별칭)'은 피레네를 제대로 못 본 걸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맘 놓고 자랑할 수 없었다. 혼자만 본 것 같아 미안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내 마음에 리듬과 가락이 생긴다. 빛 줄기 덕분이다.
바닥에 자리잡은 빛줄기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 피레네에 남겨진 우거진 녹음과 세월의 흔적들은 '신의 창조물'이라고 감히 주장한다.
'진귀하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정말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이날처럼 볕이 좋은 날이 아니면 피레네 숲의 빛을 즐길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나무와 나무 사이,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 이파리와 이파리 사이. 모든 틈 사이로 빛은 빼곡히 숲을 채워 그윽한 숲을 밝혀준다. 눈부시게 큰 빛줄기 하나가 나와 시선을 맞추기도 한다. 그야말로 빛의 향연.



숲과 빛과 공기에 나를 맡긴 채 그렇게 목적지를 도달해 갔다. 그리고 도착했다.





인간은 대자연이라는 존재 앞에서 겸손해진다. 대자연을 경험하고 싶다면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돈이 엄청나게 많아서 타임머신처럼 뿅~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분명히 알고 있는 건 힘들게 도전하지 않으면 마음에 남는 건 없다. 대자연에 도전하려면 어떤 식이든 힘듦을 각오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치솟는 화도 아픔도 슬픔도 다스려야 한다. 피레네에서도 그랬다. 다만, 피레네에선 그 힘듦이 다르게 남겨진다. 솔직히 힘듦이 속사포처럼 없어져서 얼마나 내가 힘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미친듯이 또 가고 싶다.


이쯤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도 피레네를 경험한 사람이 되고 싶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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