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뻗으면 닿을 듯한태평양이철썩이는 해변가의 레스토랑. 생일 케이크는 튜나 포케 Tuna poke.신혼여행 후보지였던 곳에서 생일이라. 인생은 정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아직 채 떨어지지 못하고 작렬하는 태양 때문인지맥주 때문인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근래 몇 달을 통틀어 가장 좋은 기분이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이동하느라 피곤할 만도 한데, 어쩐지 마음에 태평양이라도 들어앉은 듯하다. 최근에 이렇게 흡족스러웠던 날이 있었던가?
'꽤 멋진 날이야.'
Guam the Beach Restaurant & Bar
괌 여행을 결정했던 건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던 때.웬만해서는 울지 않는 나였지만, 그즈음에는 눈물주머니가 금방이라도 흘러 넘 칠 것 같았다. 결혼을 약속했던 사람과 파혼한 지 딱 3일째 되던 날이었다.
친구 S와 K를 만났다. 그녀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17년 지기 친구들이다. 몇 주 전에 S가 집에 초대했을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만남이었는데, 하필 3일 전에헤어진 탓에 내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다.
나조차도 완벽히 이해되지 않은 파혼 사유, 아직 채 정리되지 않는 예식장과 신혼집 문제에 대한 막막함 등등이런저런 얘기를 풀어놓으며 슬픔에 허우적대는 나를,S와 K는애잔한 눈으로 그저 가만히 들어주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넋두리는 두 달 후 내 생일에 받으려던 프러포즈 이벤트 얘기까지 흘러갔다. 참으로야무지고 부질없던 계획을 듣던 S가 문득 말을 꺼냈다.
"우리 해외여행 갈래? 코로나 정책 완화되어서 갈 수 있대. 네 생일에 괌 가자. 괌에서 생일을 보내는 거야."
눈물이 그렁하던 눈이 크게 떠졌다. 해외여행? 괌? 야자수? 태평양? 축 절여있던 마음에순간 빛이 드는 기분이었다. 본디 나는 여행을 무척 좋아한다. 직장 동기들이 여행경비를벌기 위해회사 다니는 게 아니냐 할 정도로, 코로나 유행 전에는 한 해에도 수 차례 해외여행을 다녔었다.하지만 괌이라, 어쩌면 신혼여행지가 될 수도 있었던 곳이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자 나는 또 금세 슬픔에 축 쳐졌다. 시무룩해지는 나에게 K가 호통치듯 말했다.
"야, 결혼해야만 신혼여행지 가란 법 있냐? 남들은 신혼여행으로나 가지만 우린 아무 때나 갈수있잖아!"
K가 맞다.이렇게 자주, 그것도 친구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떠날 현실적인 여건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할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결혼하거나 자녀가 생긴 친구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진다. '친구의 결혼식'은 친구를 미혼의 세계에서 기혼의 세계로 떠나보내는 이별의 세리머니라는 생각도 했었다. 기혼의 세계에서 행복하길 빌며 더 이상 미혼의 세계로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어쩐지 친구의 도리인 것 같아서 아무 때나 연락하기가 어려워진다.
미혼이더라도 휴가를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친구는 함께 일정을 맞춰여행 가는 것이 어렵다. 그런 점에서 S와 K는 나의 오랜 여행 메이트였다. 우리 셋 다 휴가를자유롭게 쓸 수 있는 직장에 다니고 일정 맞출 가족도 없으니, 괌 정도는 언제든지 훌쩍 떠날 수 있다. 시간, 돈, 체력을 오롯이 나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조건. 그것만으로도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이 주어져있고, 하지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일에 받으려던 프러포즈는 이제 없지만, 이제는 스스로에게 프러포즈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여행을 선물해야지. 그러고 보면 내 인생의 절반을 함께 한 친구들이 변함없이 내 곁에 있는데, 그깟 몇 개월을 만난 사람과 헤어졌다고 슬퍼하는 것부터가 우습게 느껴진다.
"다시 돌아온 걸 환영해!"
짠! 우리는 술잔을 부딪히며 코로나 이후 3년만에 첫 해외여행을 결의하였다.17년을 함께했지만 같고도 다른, 하지만 다르고도 같은, 그래서 꽤나 잘 맞는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 그리고 서른넷 미혼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일, 사랑, 가족, 건강, 취향, 도전과 휴식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