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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아 Oct 12. 2022

삼십 대 중반, 친구라는 의미

「괌 여행기-Ep.01」시간이 우리에게 준 것 


S와 K는 나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천진했던 우리가 아른해서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쉬는 시간이면 만화책을 돌려보고, 점심시간에는 급식실로 냅다 어가서 밥을 다닥 먹고 만화책에서 기술 이름을 외치며 배드민턴을 치던 기억도, 문제집을 풀 성적에 고 웃던 장면도 다 귀엽고 사랑스럽게 남아있다.


학창 시절에는 입시, 진로가 가장 크고 유일한 어려움이고 그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었다. 그때는 당연하게 서른 살에는 결혼했을 줄로 상상했었고 나이 많고 대단한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었다. 17년이 지나 현실 속의 삼십 대 중반이 되어보니 17살의 나의 막연한 상상이 민망할 뿐이다. 확실히 이는 적지 않아 졌지만, 결혼은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었고, 그래도 어엿한 사회인으로 밥벌이하고 있으니 다행이긴 한데, 여전히 삶은 어려운 질문 투성이다. 무엇이 정답인지, 대체 답이 있긴 한 건지. 그나마 확실하게 틀린 선택지는 처음부터 지워버리는 단호함이 생기긴 했다.


"난 요새 아니다 싶으면 인간관계를 너무 쉽게 잘라 버리더라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야."


S는 최근에 '선 넘는다'라고 생각된 관계를 단칼에 잘라버린 자기 자신에 놀랐다고 했다. 전에는 인간관계에 스트레스를 종종 받았었는데 근래에는 고민도 없이 끊어내고 있다고.


"나는 이제 사람에 대한 관심이 생기질 않던데."


K도 그렇게 말했다. 이게 과연 맞는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않으려는 자기 방어력은 조금 늘은 것 같다. 20대 때는 인맥이 넓을수록 내가 주류가 되는 기분이었다.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도 많았고, 내 마음도 훨씬 열려 있기도 했었다. 그래서 학교 친구, 동아리 친구, 술친구, 스터디 친구 등등... 친구도 참 많았고, 친구가 많은 것이 소위 '인싸'의 지표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러다 보니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도 억지로 잘 지내보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사회성이라고 여겼다. '사회성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웃고, 나를 깎아서 상대방에게 맞추어야 하는 줄 알았다.


"위험 인지 능력이 좋아진 거지, 뭐."


막상 진짜 사회인이 된 지금은 '사회성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 관심 갖는 것도 피로하게 느껴지고,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애초에 거리를 둔다. 굳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넓혀야 할 필요성도 모르겠고,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서 신뢰를 쌓아갈 마음의 여유도 그리 쉽게 생기지 않는다. '적당히' 사귀는 방법만 터득하다 보니, 그렇게 절교는 쉽고 새로운 만남은 쉽지 않은 삼십 대 중반이 되었다.



항상 오래 만난 친구들만 만나고, 확장 없이 관계의 테두리가 굳어져 버린 느낌이지만, 그 단단한 느낌이 나쁘지는 않다. 변함없이 계속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믿음, 거기에서 오는 안정감.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 특히 최근에 파혼을 하면서 진짜 '내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었다. 평생을 함께 하자던 약속이 무색하게 마음이 변한 사람을 앞에 두고, '내 것'이 아닌 관계를 실감했다. 반면, 내가 슬퍼하고 있을 때 지난 17년 간 그래 왔던 것처럼 조용한 위로로 나를 지켜봐 주는 친구들 덕분에 나는 조금 덜 힘들었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나의 인생의 절반을 함께한 친구들. 우리의 관계를 단순히 '우정'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한 것 같다. 내가 좀 우스꽝스러운 짓을 해도, 나를 부끄러워할 지언 정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존재들. 내가 평소와 다르게 못된 말을 해도 오해하지 않고, '무슨 일 있어?' 라던가, '왜 그렇게 말해?' 라며 따져 물어 줄 거라는 신뢰. 그건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불타는 듯한 관계에서는 기대하기 어렵고, 금방 생기지도 않는, '의리'라고 해야겠다. 시간은 우리에게 지층을 쌓아 주었다. 나는 기억도 잘 안나는 열일곱 살의 나를 기억하는 나의 친구들, 내 기억 속에 예쁘게 남아 있는 열일곱 살의 우리, 이제 그때의 딱 두 배가 되어버린 나이.



그래도 시간이 우리에게 준 건 나이뿐 만은 아니야.
차곡차곡 쌓인 추억과 단단한 신뢰를 주었으니.



시간이 아니면 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온갖 풍파에 깎여 나가도, '또 새로운 모양의 지층이 생겼구나.' 라며 지켜봐 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내 인생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시간들을 목격해주고 함께 해주어서, '야, 그거 기억나냐?'라고 물으면 '당연하지'라고 답하는 친구들과 또다시 쌓아갈 새로운 간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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