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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아 May 13. 2023

파혼 후 11개월, 투명해지는 괴로움


최근에 L과 C의 만남을 주선했다.  사람 모두 내가 몹시 아끼는 10년, 15년 지기 친구들이다. 주선자로서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반, 둘이 커플이 되어 나 홀로 남겨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반. 그리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의 결혼식, 정확히는 '할 뻔했던' 결혼식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L에게는 축가를, C에게는 축사를 부탁했었기 때문이다. 혼이라는 사건 없이 내 인생이 별 일 없이 흘러갔다면 L과 C는 내 결혼식에서 만날 터였다. 인연이 있다면 어떻게든 만났을 테지, 하다가 그래서 그와 나는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는 생각을 했다. 평생을 함께할 거라 했던 약속은 1년도 안 되는 시간 속에 부스러질 말에 지나지 않았고, 그와 나는 연은 고작 몇 계절만에 다 써버릴 정도였구나. 로소 나는 파혼을 그저 지나간 에피소드로, 그리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저 상황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이 정도는 별 것도 아니라고 수없이 되뇌었지만, 사실 괜찮지 않았다. 누군가의 창첩장을 받을 때면 씁쓸했고, 취소한 결혼식장 예약일에는 생각하지 않으려 무던히 애써야 했다. 내가 원했던 파혼은 아니었기에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그 원인을 집착적으로 찾으려다 나를 자책하고 원망하기도 했다. 많은 분들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더 좋은 인연이 있을 거라고 위로해 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괴로움 속에 갇혀있었다.


11개월이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덤덤하게 파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고 싶었지만 과거는 절대 없어지지는 않았다. 나를 괴롭히던 기억은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서서히 조금씩 옅어져 가고, 어느 날 문득 이렇게나 투명해졌다는 걸 깨닫게 된다. 물에 물감을 풀 , 희석하고 또 하고 하다 보면 완벽하게 투명하진 않지 적어도 밑바닥을 볼 수 있을 정도까지 투명해진다. 기억은 여전히 남아 문득 나를 스쳐가지만, '그땐 그랬었지.'하고 코웃음 치는 때가 분명히 오더라. 아무것도 섞이지 않았을 때와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희석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를 위로해 주었던 분들처럼 나도 이별의 충격과 괴로움에 고통받고 있을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언젠가 괴로움도 스스로 떠나가는 때가 올 테니 슬퍼하고 견뎌내라고. 그리고 마침내 완전한 이별을 하게 되면 온전히 행복해지기를.



슬픔이여 안녕.
이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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