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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소녀 Feb 22. 2024

러시아인의 '생일', 알면 좋은 것들

미신과 종교, 두 가지 믿음이 만든 러시아 생일에 대한 에티켓

러시아에서 지내던 시절, 유난히 기분 좋았던 러시아 사람들과의 기억들이 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다같이 모여 진심으로 축하하며 보낸 시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일은 딱 자기 할 만큼만 하던 현지인 파티나 이벤트가 있으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임하는  보며 내심 놀랐고 약간의 신감(?)도 느꼈다.


특히 누군가의 생일(день рождения)을 맞으면 분위기는 더욱 즐거웠다.

그러던 중 나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생일을 절대로
미리 축하하지 않는다는 것!


한국에서는 생일 당일 축하를 못 해줄 경우 며칠 전이라도 미리 축하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은데,

러시아에서는 그렇게 하면 큰일 날 것처럼 느껴졌다. 단호하게 생일 축하는 미리 하지도, 미리 받지도 않았다.


왜 그런 걸까?

그 이유는 러시아에 깊이 뿌리내린 토속신앙 혹은 미신에 었다.


생일 축하 파티(출처: blackpantera.ru)


"선한 영혼의 심기를 건드리면 1년이 불행하다"


고대 슬라브부터 이어진 오랜 믿음에 따르면, 생일이 되면 선한 영혼들이 찾아와서 축복을 빌어준다고 생각했다. 생일자에게 도착한 영혼들은 세상의 모든 문제로부터 그를 구해주고 다음 생일 전까지 1년의 새로운 과제를 주는 한편, 함께 생일을 기쁨으로 축하하는 행사를 치른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생일을 당겨서 미리 축하다면?

영혼계의 이 특별한 손님들이 생일자를 찾아올 시간적 여유가 없어지고 만다. 당겨진 축하 날짜전달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맘대로 축하 파티를 먼저 해버릴 경우, 생일자에게 미처 당도하지 못한 선한 영혼들은 축배 들 시간을 뺏기고 자기 할일이 없어지니 기분이 매우 상할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영혼 심기를 건드라면 아무 도움을 받을 수 없어, 생일자에게 다가올 1년 온갖 불행이 닥칠 게 될 거라고 여긴다.


이러니 생일을 미리 축하하려 하겠는가? 이른 생일 축하는 매우 좋지 않은 징조로 여길 수밖에 없다. 개개인이 이런 미신이나 속설을 잘 알든 모르든 이들의 내재된 문화로 자리잡았다.


생일 선물(출처: darfix.ru)


그러니 러시아 사람의 생일을 축하할 일이 있다면 절대 미리 하지 말라! 선물도 먼저 주지 말라!

되도록 축하는 당일에 하고 당일 축하 행사를 할 수 없다면 다음날 하는 편이 라리 낫다. 너무 늦게 해도 선한 영혼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니 안 된다. 이들의 문화를 존중해주자.




성자 엘레나의 이콘화(출처: ru-shkola.ru)


러시아어를 처음 배울 때 재미있었던 점은 이름이 다양한듯 하면서도 알고 보면 거기서 거기란 사실이었다.

다양성은 러시아 이름 애칭 파생으로 인것이었고, 비슷하다 느낀 이유는 공식적인 러시아 이름이 일부는 정해져있어 동명이인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에서 '엘레나'라는 여성을 찾는다고 한다면 엘레나가 여럿이라 '어떤 엘레나?'라며 되묻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


드미트리, 안드레이, 타티야나, 이리나…


이와 같은 이름들은 러시아 문학이나 미디어를 통해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는 성자의 이름이기도 하며, 정교회 성당에서 세례를 받으면 성자 이름을 부여받는다.

러시아는 국민의 70% 이상이 정교회 신자이다. 그리하여,


러시아에는 신앙으로 기념하는
두 번째 생일도 있다.


자신의 성자를 기념하고 종교적으로 다시 태어난 날이 바로 그 날인데,

이 또한 생일처럼 미리 축하해서는 안 될 날이다!



"제2의 생일은 이름과 관련있다"


러시아에서는 명명일(именины), 즉 이름의 날도 제2의 생일이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보면 명명일을 축하하는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이는 오래 전부터 지켜온 문화이다.


명명일 문화는 정교회 문화에 그 뿌리를 둔다.

러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아이가 태어나 정교회 성당에서 세례를 받으면 저마다 성자의 이름을 부여받았다. 교회력으로 매달 일자마다 기념하는 성자들이 존재해서, 해당 날짜 성자들 중 영향력있는 이의 이름을 따르게 되었다. 성자의 이름을 받은 사람은 그 성자가 걸어온 삶을 알아야 하고 그를 본보기로 삼으며 살아간다.


정교회 세례 받는 모습(출처: TASS.ru)


이같은 전통이 지금은 현실에 맞게 조정되면서, 세례 받을 때 본인과 같은 이름의 성인을 찾아 그를 기념하는 날짜들 중 자기 생일 이후로 가장 가까운 날을 명명일로 정하기도 한다. 러시아 사람들은 세례 받은 날을 '천사의 날(день ангела)'이라고 부르는데, 이날 하늘에서는 세례 받은 에게 천상의 후원자인 수호천사를 임명하고  호천사는  사람을 평생 지켜준다고 믿는다. 천사의 날과 명명일은 동일시 되기도 하나, 두 날은 같은 날일 수도, 다른 날일 수도 있다.

 

생일과 같은 이 명일에는 가족과 함께 기념하고 축하하며 작은 선물을 나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는 명명일도 천사의 날도 모르는 이들이 많아 옛날만큼 그 문화를 지켜나갈지는 모르겠지만, 이색적인 문화인 것만은 분명하다. 생일을 두 번이나 보내다니 말이다!


천사의 날을 축하합니다!(출처: 유튜브 채널 Zam Goshan - Открытка Дня)




이처럼 러시아에서는 생일도 두 가지,

미신과 종교가 모두 '사람이 태어난 날'을 기념하고 있다.

이미 뿌리내린 문화라, 러시아에서는 지켜줘야 할 생일 에티켓이겠다.


두 가지가 공존한다면, 한편으로는 이런 궁금증도 생긴다.

'세례 받을 때 임명된 수호천사는 생일날 찾아오는 선한 영혼의 영향을 콘트롤할 수 없는 것일까?'

선한 영혼의 도움을 기대하며 미신을 맹신하지만 정교회의 축복도 포기할 수 없는, 참 아이러니한 모습이다.


어찌됐든 태어난 걸 감사하며 앞으로도 아무 탈 없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게

'나를 좀 보호해 달라'는 간절한 사람의 마음은 어느 생일이건 매한가지리라.


생일은 한 사람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축하받아 마땅한 날,

기쁨으로 많이 축하해주고 진심으로 축복을 빌어준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다.

단, 러시아에서 축하는 당일에!



※ 원문 관련 영상 [러시아인의 두 가지 생일]

https://youtu.be/tWabG-yr5Xw

출처: 유튜브 채널 여행과 사색


* 커버 사진 출처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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