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주변 분들 증언 대로 모스크바는 너무 잘살고 있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가운데 그 분위기는 충분히 파악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러시아가 '경제제재? 그게 뭔데?'라고 묻기라도 하는듯, 도시의 활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곳곳에 보이는 건설 및 보수 현장이다.
모스크바 강변 공사 현장(출처: 저자 제공)
모스크바 강변을 걷다 보면 도시의 경관을 해치고 있는 풍경들이 꽤 많다. 강변 노른자 땅에 들어서는 신축 건물들이 심심치 않게 들어서고 있는 탓이다. 아직 대부분이 건설 중이다. 대형 크레인은 물론, 차츰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회색 골조들만 봐도 완성될 건물의 엄청난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옛 건물들 사이로 솟아오르는 현대 건축물과 땅을 엎어 새로 포장하는 도로 현장이 당장은 보기 예쁘지 않고 불편해도, 이런 모습이 모스크바가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건물 하나가 지어지려면 자본과 인력, 건설 자재의 원활한 유통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결국 러시아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
도시 구석구석 뒤집어 놓은 길(출처: 저자 제공)
제재를 받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이들에게는 '틈'이 있었다.
돈벌이를 위해 러시아에 정착한 중앙아시아 노동자들, 대러 제재에 참여하지 않은 여타의 국가들과 같은 '틈'... 그 틈이 현재의 러시아 지원군이었다. 더군다나 중앙아 출신 건설 노동자들은 비교적 낮은 인건비로 관리가 가능하니 비용도 절감되고, 건설기계나 자재들은 러시아 자체 생산 가능한 부분과 더불어 대러 제재에서 벗어난 중국이나 인도, 터키 등으로부터 조달 받을 수 있으니 재료가 모자랄 일도 없다. 도시는 이들의 도움을 통해 서방의 제재로 생긴 공백을 채워가며 자기만의 왕국을 조성해 나가고 있었다! 길이 막혔다고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대체 방안으로 운영해 나가고 있다. 또 도시는 새로운 것만 짓지 않고, 늘 그래왔듯이 오랜 건축물과 유산들도 지속적으로 관리한다. 내가 방문한 시기에도 많은 관광지 건물이 외관 복원과 수리로 천막에 가려있었다. 오랜 성당과 공원, 기념비까지 기존의 것도 하나하나 보존하려는 러시아의 노력과 정성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옛것을 지키려는 모습, 이건 정말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부분이다.
제재를 느낄 수 없는 부분은 또 있다. 환전 및 결제와 관련된 금융 분야였다.
내가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6년 만의 모스크바 방문에서 '루블 결제를 어떻게 하나'는 큰 걱정거리였다. 옛날처럼 현찰로만 지불하고자 지폐를 많이 들고 다니는게 이제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서방의 대러 금융제재 이후 러시아에서 한국 신용카드는 쓸모없는 플라스틱이 되고 만 상황이라, 과거로 회귀라도 하듯 달러나 유로를 들고 현지에서 루블로 환전해서 써야 하는 방법밖엔 없다. 그나마 요즘은 모스크바에서도 대체로 현찰을 거의 내지 않는 추세라서, 잔돈이라도 소지하지 않으면 점원이나 기사에게 큰 돈을 지불하고도 거스름돈은 없다며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게 분명하다. 그래서 이번 방문 중에 현지 계좌가 연결된 직불카드를 만들었다. 이 카드가 정말 신세계였다.
틴코프(티-뱅크) 카드(출처: 저자 제공)
티-뱅크(제재 전 명칭은 ‘틴코프’)는 외국인도 현지 계좌를 개설하기 비교적 수월하다. 신청 절차가 간편하고 빨라서 편하다. 온라인으로 오늘 신청하면 계좌가 연결된 직불카드를 내일 발급받는 식이다. 신청 고객이 장소와 시간을 정하면 직원이 직접 찾아와 카드를 전달하고 행정 처리를 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찾아가는 서비스’ 아닌가? 우리나라보다도 훨씬 큰 나라에서 이런 신속 서비스를 제공하다니 놀라웠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그만큼 사용자와 공급자가 도처에 깔려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카드 개설 후에는 곳곳에 설치된 기기에서 루블을 충전해 사용하면 되는데, 삼성페이처럼 휴대폰에 등록해서도 쓸 수 있다. 카드 비번 설정이나 잔액 확인은 고객이 직접 모바일로 관리할 수 있고, 결제처에 따라 일정 비율 캐시백 해주는 혜택도 있다. 요즘은 상점과 카페, 박물관 등 어디서나 카드를 받는다. 결제 시엔 QR 코드와 금액이 뜨는 화면에 카드만 살짝 대면 지불이 완료된다. 점원에게 실물 카드를 건네거나 고객이 카드를 기기에 꽂을 필요 없는 비접촉 결제다.
그뿐만이 아니다. 길거리 버스킹하는 예술가를 자세히 보면, 공연 팁용 현금 통과 함께 요즘은 자기 휴대폰 번호를 적은 종이를 같이 세워둔다. 웬 전화번호? 휴대폰 번호가 계좌 번호처럼 사용되기 때문이다. 계좌이체 하듯 카드에 충전된 금액을 상대방 전화 번호를 통해 손쉽게 송금할 수 있는 방법이다. 개인이나 작은 사업장에서 주로 이렇게 결제한다.
티-뱅크 전용 ATM과 오프라인 매장의 흔한 카드 결제창(출처: 저자 제공)
현지 직불카드만 있으면 누릴 수 있는 것도 많아진다. 스마트폰 앱에 카드를 등록해 옵션별를 택시 부를 수도 있고, 음식 배달이나 식료품 주문도 가능하다. 예전에도 이런 서비스가 있긴 했는데 지금은 서비스 품질이나 속도가 상당히 개선됐다. 한국만큼, 아니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더 편한 점도 있다. 일례로, 고객이 오전에 주문한 식료품을 1시간 안에 받아볼 수 있다. 현지 이커머스 기업 ‘오존’은 프리미엄 고객 대상으로 1시간 내 배송 서비스를 제공한다. 러시아에서 신속 배달이라니! 예전의 러시아를 생각하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배달을 시키면 몇 시간도 감내해야 한다고 했던 게 불과 몇년 전. 이제는 배달의 민족이 한국만 지칭하는 게 아닌 게 되었다.
도심을 누비는 배달기사들(출처: 저자 제공)
서울보다 4배나 넓은 모스크바에서 거리마다 배달통 들고 다니는 기사들이 자주 보이는 건 너무나 당연한 풍경이다. 내가 놓친 6년 동안 수도의 물류는 더 많이 촘촘해졌고, 서비스 맛에 길이 들어버린 모스크비치들의 소비 생활도 제법 통이 커졌다. 서비스를 직접 체험해본 결과 무엇보다 결제 시스템 접근과 사용법이 간편해서 이용에 어려움이 없었다. 지극히 이용자 친화적이었다. 이렇게 손쉬운 결제와 빠른 서비스 덕분에 모스크바는 한결 살기 편한 도시로 거듭나 있었다.
돈만 있으면 택시도 타고, 배달도 시키고 아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세상이다. 단지 물가는 예전보다 전반적으로 많이 오른 편이다. 달러 강세의 영향이 크게 안 느껴졌다.
그들의 이유 있는 친절
내수가 활성화되니 러시아인 태도에도 변화가 좀 생긴 것 같다. 러시아인들은 원래 '판매자가 왕,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마인드가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점원이 손님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거나 친절하게 대하는 법이 없었고, 물건도 안 팔면 그만이었다. 마트는 고객이 제품을 직접 골라 담는 시스템이 아니라, 고객이 판매자에게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말해야 가져다주고 계산해주는 구멍가게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가격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 고객이라도 오면 점원이 화를 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옛날에는 나도 마트만 가면 더욱 소심해졌었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러시아에서도 차츰 서비스 개념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나아지고 있었다.
모스크바의 로봇 카페. 러시아인의 일자리도 위협받고 있다, 그러니 친절해질 수밖에(출처: 저자 제공)
지금은 러시아인의 '친절'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물론 6년 전에도 그들의 친절을 접하긴 했다. 하지만 그때는 노련함이 없었다. 교육을 받아 따라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갔을 때는 서비스가 제법 자연스러웠다. 무엇보다 매출 올리려는 직원들의 유도와 상술도 꽤나 많이 접했다. 직접 경험했더니 너무 인상적이라 잊을 수가 없다.
티-뱅크 현지 카드를 발급받기로 한 날이었다. 내가 호텔이 아닌 곳에 머물고 있어 아파트 주소로 오전 시간 카드 수령을 요청했다. 방문 희망 시간이 되기 한시간 전쯤 직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다시 연락을 주겠단다. 시간 지체 없이 제때 안내 및 확인 문자를 바로바로 보내는 걸 보고 어느 정도 안심했다. 그동안 쌓인 러시아 사람과 서비스에 대한 불신이 단번에 녹아 내리는 듯했다.
직원이 근처에 거의 다왔다고 해서 밖으로 나갔다. 카드만 받고 신분증 확인만 하면 금방 끝날 일인 줄 알고, 별도 처리할 공간을 알아보거나 하지도 않았다. 아파트 앞 찻길에서 직원을 만났다. 그녀는 살짝 주변을 살피더니 갈 만한 곳이 없는 걸 보고, 쿨하게 괜찮다며 사람들 오가는 길거리에서 그냥 일을 처리하자고 한다. 가방 하나 잠시 세워둘 바위 앞에 서서 카드 행정 처리를 했다. 양식 작성과 서류 든 고객 인증샷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일을 길거리에 서서 하는데도 그녀는 불편한 기색 없이 명랑하고 침착하게 일을 마무리했다. 호텔이면 로비라도 있었을 텐데. 오히려 공간을 미리 알아보지 못한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한편으론 불평 없는 그 모습에 나는 내심 놀랐다.
카드가 든 검은 봉투와 그 위에 '당신의 선물입니다' 문구가 적힌 심카드 패키지(출처: 저자 제공)
직원의 친절과 인내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카드 발급이 다 끝났나 싶은 시점. 생긋 웃는 얼굴로 직원이 선물을 주겠다고 한다. 보너스로 100루블을 받을 수 있고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면서 지금 쓰는 심카드를 얼마에 했냐고 묻는다. 솔직한 가격을 말하니 그녀는 본인 회사 심카드를 뜯으며 그보다 저렴하게 더 빠른 데이터를 이용하라고 온갖 멘트를 날렸다. '그냥 듣기만 하고 안 하면 되겠지, 뭐' 생각하고 일단 직원 얘기를 들어주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사이 내 스마트폰에 새로운 심카드를 끼워 개통까지 시도하는 것이었다. '아차, 늦었구나!' 직원은 이제 이 심카드에 450루블만 넣으면 보너스 금액 100루블이 당신 거라고 얘기한다. 단, 1시간 안에 넣어야 보너스 금액이 유효하다고 강조하면서 어서 충전하라 재촉했다. 카드도 방금 받아 잔액도 없고, 그것보다도 엊그제 산 심카드가 잘 쓰고 있는데 100루블 받자고 새 심카드를 450루블 주고 이용하는 건 더 어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이렇게 조건이 좋은데요! 대신 이체해 달라고 부탁할 사람은 없어요?" 맑은 웃음으로 송금을 계속 종용하는 직원에게 나는 지금 약속 시간에 늦어 바로 가봐야 하니 알아서 하겠다며 둘러대고 황급히 헤어졌다. 와.. 어쩐지 너무 친절하다 했다. 직불카드에 심카드 끼워팔기라니! 이벤트를 가장한 판촉이었다. 순수하고 물러터진 줄만 알았던 이들도 이렇게 돈을 벌고 있구나. 나라 불문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명확한 의사 표현은 필수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그 이후로 친절하게 다가오는 러시아인에게 괜한 경계만 늘었다. 주어진 일 외에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던 이들의 태도가 너무 생경하기만 했다. 이제 러시아인의 친절에는 확실한 이유가 생겼다.
달라진 관광지 풍경
우크라이나 전쟁과 서방의 제재 이후 러시아를 여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줄 알았다. 누가 전쟁 중인 나라에 굳이 여행하러 가겠는가? 공항에서 물론 수많은 중국인이 입국하는 걸 두눈으로 직접 보긴 했지만, '오면 얼마나 오겠어?' 그 이상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모스크바 유명 관광지에도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있을까, 평일에 가면 한결 여유로울 거라고 여겼다. 예전처럼 단체 관광객에 치이거나 길게 줄 설 일은 없겠지?
활기찬 아르바트 거리(출처: 저자 제공)
예상은 빗나갔다. 붉은 광장을 비롯한 명소와 박물관 등에서 관광객들이 상당했다. 특히 평일 오후 붉은 광장에는 이미 인파로 북적였다. 그 커다란 광장에 여행자들이 서로 사진 찍고 찍어주며 거닐었다. 육안으로만 봐도 상당한 수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 대낮에 방문한 건가 궁금해졌다. 오가는 이들을 가만히 살펴보니 대부분 러시아인이다. 방학을 앞둔 시기라 잔뜩 들뜬 마음으로 방문한 가족 단위였다. 아마도 지방에서 멀리 수도까지 여행을 온 국내 여행자들일 터다. 그렇다. 러시아인 중 살면서 모스크바에 한번도 와보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고 했었다. 그만큼 먼 곳이기도 하고, 형편이 되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국내 여행이 유행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러시아 사람들은 보통 휴가를 가까운 유럽이나 따뜻한 나라로 다녀왔는데, 비행길이 막히면서 확실히 국내 여행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붉은 광장 들어가는 부활의 문 근처 인파(출처: 저자 제공)
러시아인 다음으로는 눈에 띄는 사람들은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다. 하지만 언어가 다른 걸 보니 한국인은 아니었다. 중국 단체 관광객 아니면 중앙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러시아와 교류가 있는 나라들이라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한편, 의외의 출신들도 많이 보였다. 히잡을 둘러 쓴 중동 사람들이 명소마다 꽤 자주 눈에 띄었던 것! 다소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아랍어를 쓰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이 모스크바를 누리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현지 관광지의 풍경은 모스크바에 직항이 다니는 지역 출신의 사람들로 가득 채워지는 중이다. 직항 여부가 정말 중요한 것임을 새삼 실감했다. 한국인을 거의 만나지 못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상상도 해볼 수 있겠다. 제재 이후 러시아가 아프리카 국가들과도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그렇다면 머지않아 아프리카 사람들도 모스크바에서 많이 보이게 되지 않을까? 아니면, 이미 시작됐는데 내가 못 본 걸까? 결국은 도시 풍경이 나라의 문이 어디로 열려 있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다. 직항 여부가 도시의 색깔과 풍경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걸 느꼈다.
곧 한국 사람들도 넘쳐나게 되면 참 좋겠다.
그래야 나도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평일 오후 붉은 광장 풍경(출처: 저자 제공)
이처럼 제재라는 걸 잊게 할 만큼 모스크바는 아주 잘 살고 있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만 그런 것일지언정 대단하다.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와는 별개로 자기들이 살아갈 나름의 생존 방식을 찾아서 정착시켰고, 우호국들과는 한층 더 끈끈함을 유지하고 있다. 그저 무조건적으로 서방 편에만 서는 한국이 러시아에 비우호국으로 분류된 이래 갈수록 한러 비즈니스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한국 기업들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