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대중교통과 공중시설을 사용하며 적잖이 놀랐다. '이정도까지라고?' 생각하게 할 만큼 아주 세밀한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지하철과 버스 좌석마다 USB 단자가 있어서 놀랐다.
이건 한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그림이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고 정보도 검색하다 보면 배터리 소비량이 많다. 더욱이 나의 5년 된 스마트폰은 하루를 넘길 리 만무하다. 충전량이 간당간당할 때마다 대중교통에서 급한 불을 껐다. 충전 케이블은 늘 가지고 다녔으므로 단자에 연결만 하면 자동 충전이 됐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여유가 없으면 그 대안도 있다. 공중시설이나 지하철역, 레스토랑, 카페 등 곳곳에 보조배터리 공유 스테이션도 꽤 자주 보인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끊김 없이 모바일 접속을 할 수 있는 셈.
러시아도 한국 만큼이나 스마트폰 중독자가 많은 걸까?
버스 좌석에 있는 USB 충전 단자와 스타스(스타벅스 아류) 카페에 있는 보조배터리 공유 스테이션(출처: 저자 제공)
이런 부분들만 봐도 모스크바가 모바일 환경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확실히 모스크바에서 생활하면서 웬만한 것들은 모바일로 처리해왔다. 각종 티켓 예매, 콜택시나 배달 주문, 숙소 예약, 결제 카드 관리 등 속속들이 서비스의 온라인 처리가 일상에 깊이 스며있다. 직접 가지 않고서도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 확실히 편했다. 종이로 된입장권도 필요없다. 모바일 예매를 완료하면 PDF 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고, 현장에서는 파일의 QR코드를 제시하면 된다. 물론 한국도 모바일 이용이 생활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곳환경은 그보다도 일상 속에 더 깊숙이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좀 불편한 건 한국보다 데이터 전송 속도가 느려 좀 답답한 점, 그리고 도시에 드론 공격이 있은 후 전파 교란이 생겨 시내에서는 모바일 GPS의 정확도가 좀 떨어진다는 점 정도? 그래도 어느 정도 길을 아는 사람이면 큰 문제는 없다.
서커스 티켓 PDF 파일. 하단의 QR 코드만 제시하면 입장 가능(출처: 저자 제공)
시대가 변하니 아쉬움도 좀 있다.
모든 게 온라인으로 가능해지다 보니 현지인과 대면 접촉이 줄었고 그만큼 대화할 기회도 없어진 것. 내가 몸소 러시아인의 기분을 살피고 느낄 긴장감(?)이 떨어졌다. 극장의 어떤 공연 어느 자리, 열차표 몇시 어느 도시행 어떤 좌석, 어떤 물건 등등... 내가 굳이 어눌하게나마 러시아인에게 전할 용기를 내지 않아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세상이 와버렸다. 터치할 일이 없어 좋아진 건지, 아니면 교류가 없어져 정이 없어진 건지! 친절해진 그들에게 한마디라도 더 걸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안타까운 맘이다.
그리고 화장실에서도 놀랐다.
도시를 다니며 나의 동선에는 반드시 화장실이 있어야 했다. 주로 카페나 박물관, 쇼핑몰 등에 있는 화장실을 활용했다. 옛날화장실 상태를 알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놀랐다! 여기만 시설이 좋은 거 아닌가 싶어 다른 곳들도 일부러 더 찾아가 확인해 볼 정도였다. 거의 한국 또는 한국보다 더 나은 수준이다. 유료·무료에 상관없이 화장실이 대부분 깨끗한 편이었다. 매시간 청소와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휴지는 기본으로 채워져 있었고 세면대의 수도와 핸드드라이는 모두 센서로 작동했다. 수도관에 핸드드라이가 같이 달려있는 세면대도 종종 있었다. 더이상 변기를 밟고 올라가 일보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하하하하)
세면대 수도관, 그리고 양옆으로 뻗은 건 핸드드라이. 무려 다이슨 브랜드!(출처: 저자 제공)
화장실, 어디 그 끝을 봐 보자!
청결 상태를 알 수 없어서 사용이 꺼려지는 길거리 공중화장실도 가봤다. 물론 유료이고, 이용료는 카드 결제도 가능하다. 화장실 시설마다 가격이 달라진다. 오, 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용에 불편함이나 불쾌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종종 지하철역에도 공중화장실이 보인다. 이런 좋은 변화를 접하니 더욱 낯설게만 느껴진다. 모스크바 확실히 더 좋아졌구나, 나름의 시민 의식이라는 것도 자리를 잡았구나 싶었다. 흔히 어느 곳을 가든 화장실 하나만 봐도 그 나라의 수준을 평가할 수 있다는데, 적어도 내가 경험한 모스크바의 것들은 선진국에 가까웠다.
이제는 화장실 때문에 동선 바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도시의 공중화장실(출처: 저자 제공)
애국심으로 전략적 파고들기
모스크바에 지내며 매의 눈으로 도시 구석구석을 살폈다. 지난 방문과 다른 점은 무엇이 있나, 나라의 분위기를 좌지우지 할 만한 뭔가 있지 않을까? 그게 나의 큰 관심사였다. 역시나 예전과 다른 몇 가지가 내 눈에 포착되었다. 마치 국가가 국민에게 던지는 메시지 같은 거랄까. 그런 메시지들이 어디 거창한 곳에 광고하고 있거나 대놓고 '~해라'식의 것은 아니었다. 시민과의 접점이 가장 많은 장소에서 아주 전략적으로 요소요소 파고들면서 러시아인의 마음을 자극했다. 아마도 러·우 전쟁 이후 두드러진 분위기겠지만, 생각보다 은근하게 잘 침투하고 있어 놀랐다.
먼저 대중교통에서 그 메시지는 시작됐다. 매일 오가는 지하철과 버스에서 나는 곳곳에 달린 스크린 속 내용에 집중했다. 거기서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내용만 보면 '모스크바가 정말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하고 있구나'를 단번에 알 수 있게 했다. 한층 확장되고 개선된 모스크바의 교통 환경, 도시 속 주요 스폿의 역사와 러시아 문화에 대한 이야기 등이 여행작가인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여행책에 나올 법한 유용한 역사적 정보들도 많았고,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멋진 문화적 포인트로 감탄하게 하는 것들도 있었다. 러시아인이면 누구나 엄청난 자부심과 함께 절로 애국심이 솟을 만한 내용이다.
버스 스크린에 소개되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지하철 열차 스크린에 소개되는 수상트램(출처: 저자 제공)
또 버스 정류장을 가득 채우는 광고가 눈에 띈다. 군인의 모습이 담긴 포스터였는데, 자세히 보니 '특수 군사작전 계약 병사 모집' 공고문이었다. 전쟁국이 아니고서는 접하기 힘든 광고판이다. 버스와 지하철에서 한참 애국심 사기 올려놓고 이 포스터를 보면 아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까? 거기에 도심의 주요 보행자 산책로에 길게 늘어선 게시판 속 국가 유공자 사진과 업적들까지 보면, 그 마음에 불을 제대로 지필 것만 같다. 장소마다 매우 적절하게 강약도 조절해가면서 시민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풍경이었다.
버스정류장에 있는 계약병사 모집 광고판 '특수군사작전에 동참하세요'(출처: 저자 제공)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은 오랜만에 서커스를 보러 갔다. 서커스는 주로 부모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가는 곳 아닌가? 나는 가볍게 즐기고 올 생각이었고, 역시나 러시아스러운 센스로 적절히 희극과 묘기를 섞어 공연하는 모습에 많이 감탄했다. 아이디어도 참 좋았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공연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류베(푸틴의 최애 그룹 가수)의 노래 배경으로 배우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 갑자기 거대한 러시아 국기를 휘날리는 게 아닌가? 서커스에서 러시아 국기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관중들은 모두가 열광했다. 아마도 어린 세대까지 애국심을 심어주기 위한 의도된 연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기분 좋게 즐기다가 온갖 질문과 의문을 품은 채 공연장을 나와야 했다.
서커스 공연 말미에 나타난 러시아 국기(출처: 저자 제공)
이렇게 모스크바 곳곳에 심어둔 애국적 요소 하나하나가 눈에 쏙쏙 들어왔다. 이방인의 시선이라서 유독 눈여겨보게 된 건지도 모르지만, 모스크바 시민에게 나라 사랑의 마음이 절로 들도록 잘 침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략적인 파고들기가 바로 이들만의 비법이었구나!
식을 줄 모르는 러시아인의 한국 사랑
모스크바에서도 한국 문화의 인기는 대단했다. 두눈으로 확인하고는 사실 더 놀랐다.
마침 내가 방문한 시기에 코트라 모스크바 무역관에서 주최하는 한국 소비재 로드쇼가 열린다고 해서 분위기도 파악할 겸 방문했다. 한창 강변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고리키 공원의 푸드트럭이 있는 공간에서 열렸는데, 도착하자마자 넘쳐나는 인파로 완전히 북새통이었다. 현지인들이 화장품, 식품을 비롯한 한국 기업 소비재를 체험할 수 있는 자리와 함께 다양한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었다. 한국 제품 샘플을 써 보고, 이벤트로 음료도 마시며 한국 체험을 희망하는 현지인이 생각보다 많았다. 입구부터 사람으로 가득 막힌 느낌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2024 한국 소비재 로드쇼 현장(출처: 저자 제공)
한국 제품 체험과 함께 한국 화장법을 현장에서 시연하는가 하면, 현지 댄스팀이 무대에 올라와 케이팝에 맞춰 춤을 췄다. 화장품이나 화장법은 러시아 스타일에 어느 정도 맞춰진 것 같았지만, 춤은 좀 달랐다. 나조차도 처음 듣는 케이팝 음악에 따라 열성적으로 춤동작을 이어가는 러시아인들을 보니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댄스팀도 여럿이 있었다. 러시아가 문화예술의 나라가 아니던가? 한국의 대중문화가 이들을 새로운 문화예술의 세계로 이끌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바로 여기 있었구나 싶다. 그간 해외 케이팝의 인기를 귀로만 들어오다가, 직접 보니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로드쇼 내 부대행사. 한국 메이크업 시연 및 케이팝 댄스(출처: 저자 제공)
행사가 열린 곳에 있는 수많은 푸드트럭 중 가장 인기가 많은 곳도 한식 매장이었다. '치코리코'는 현지인이 운영하고 있는 러시아 최대 인기 한식 스트리트푸드점인데, 오프라인 매장 자체를 한국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독특하게 꾸민 것이 특징이다. 이곳도 비록 푸드트럭이지만 그 인기로 인해 제일 줄이 길었다. 특히 버블티가 현지에서 유행이라는데, 가격도 400~500루블 수준으로 저렴한 편도 아니지만 다들 유행처럼 즐기고 있었다. 물론 치코리코의 분식 맛은 오리지널 한국의 맛과는 조금 다르게 현지화된 맛이라고 한다.
아무튼 러시아에서 자처하여 한국 문화와 음식을 사랑해주니 괜시리 감동이 밀려왔다.
푸드트럭 중 가장 긴 줄을 차지하는 한국 스트리트푸드점 치코(출처: 저자 제공)
이처럼 모스크바에도 K-콘텐츠 열기가 대단함을 확인했다.
러시아의 한국 사랑이 결코 쉽게 가라앉을 인기는 아니다. 가볍게 볼 현상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파고들 '틈'이 아닐까. 어쩌면 앞으로의 한러 관계에서 핵심적인 민간 외교적인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한러 관계의 실마리를 찾고 싶어진, 많은 생각이 든 여정이었다.
이번에 만난 러시아와 모스크바는 새로웠다. 멀리서 보면 멋있어 보였어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늘 어딘가 허술함이 많았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작은 것 하나까지 감탄하게 만드는 곳이 되어 있었다.
러시아도 충분히 잘할 능력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왜 숨겨왔을까? 조금만 노력하면 이렇게 잘살 수 있는데.
이들의 저력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아마도 이러한 반전 매력이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모스크바가 이유 있는 변화를 만들어낸 비결일 것이다. 물론 러시아인조차 ‘모스크바는 러시아와는 또 다른 나라’로 인정하는 만큼 앞서 이야기한 모습들이 러시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게 아닌 ‘모스크바 한정’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분명한 건 러시아의 수도는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오인하고 있었던 부분도 분명 많다.
기분 좋았던 6년 만의 여정.
그 기운을 받아 지금부터는 국내에서 가려진 러시아의 모습을 올바로 알리는 본업에 충실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