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잭과 나는 영화학교에서 만났다. 나는 연출 전공이고 잭은 촬영 전공이었는데, 그날은 우리 둘 다 다른 학생의 영화 촬영을 도와주러 장례 예식장에 있었다. <시체가 일어났다>라는 제목의 4분짜리 짧은 영화는 영안실에 누워있던 시체가 벌떡 일어난다는 코믹한 내용이었다. 나는 죽은 시체의 화장을 해주는 메이크업 담당이었고 잭은 촬영의 포커스 담당이었다. 잭은 세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모니터를 보며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는 데비가 붙어 앉아있었다. 데비는 그 작품의 프로듀서였지만, 촬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이따금 오렌지색 머리를 어깨 뒤로 찰랑 넘기면서 오프숄더를 입은 하얀 어깨를 드러내며, 촬영 중간 틈이 날 때마다 그에게 고개를 기울고 웃기만 했다. 데비가 잭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무심한 척 하면서 간간이 그들을 보았고, 잭과 눈이 마주치면 놀리듯이 웃어 보였다. 그러면 잭은 머쓱한 듯, 뭔가 해명하고 싶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잭과 나는 친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작업을 한 적이 있었고, 그 이후로 가볍게 서로를 놀리거나 농담을 하는 식으로 천천히 친해지고 있는 중이였다.
나는 스튜디오 세트장과 배우 대기실을 오가며, 배우들의 메이크업을 도와주고, 고쳐주고, 쉬는 시간에는 그들을 챙겼다. 중요한 메이크업 씬이 끝난 후, 나는 잭과 데비가 앉은 근처의 빈자리에 앉아 촬영을 구경했다. 영화를 신나게 만드는 어린 학생들이 심각하게 논의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아득하고 따뜻한 꿈처럼 느껴졌다. 잭과 데비는 술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지만, 촬영장에서 주고받는 대화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서 자세히 듣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잭이 고개를 돌려 나에게 질문을 했다.
“유조, 너는 펍에 가면 어떤 술을 주로 마셔?”
나는 예상치 못한 물음에 고개를 돌려 잭을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몰티즈처럼 쳐다보는 잭의 얼굴 뒤로 경계를 잔뜩 한 데비의 표정이 보였다. 잭이 데비와 대화를 하는 내내 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나는 아무렇게나 대답을 했다.
“술을 잘 마시지는 않는데… 와인이나 달달한 칵테일류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너는? “
“주로 위스키를 마시는데,”
“아, 위스키. 어떤 거?”
“요즘엔 허니 잭과 레모네이드를 마셔. “
“그게 뭔데?”
“잭 다니엘스 테네시 허니 위스키 알지? 거기에 레모네이드를 살짝 타고, 나는 거기다가 레몬 조각을 추가해 달라고 해.”
“오, 내 취향일 것 같은데? 난 아침마다 레몬과 꿀차를 마시는데. “
“그럼 좋아하겠다. 비슷한 맛일 거야. 더 진하고 쓰지만 그게 좋잖아. 영국 레모네이드랑 미국 레모네이드는 맛이 달라서 좀 다른 맛이기는 하지만 나쁘진 않아. “
“그래? 맛있겠는데? “
“촬영 끝나고 펍에 갈 거지? 내가 한 잔 사줄게.”
런던의 영화학교 학생들은 매일 촬영이나 긴 수업이 끝나면 학교 앞 펍에 갔다. 같이 간 친구의 술을 주문해 주거나, 여러 잔의 샷을 사서 나눠주는 것은 평범하고 빈번한 일이었지만, 그가 술을 사주겠다는 말이 낯설게 들렸다. 그가 나에게 관심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묘한 느낌을 모른 척하며 좋다고 말했다. 화제를 돌리고 싶어 포커스를 어떻게 맞추는지 물어보자 잭은 신이 나서 나에게 어떻게 포커스를 맞추는지 상세하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모니터 옆에 달린 조그만 휠을 돌리자 화면 속의 사람들이 흐려졌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잭은 내가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자 신이 났는지 해보라고 권해주기까지 했다. 데비가 팔짱을 끼고 잭과 나를 따갑게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지만, 나는 게임을 하듯이 포커스를 맞추는 일에 열중했다. 잘하는데? 재능이 있어. 그의 격려에 나는 웃었다. 역시 어렵다고 말하며 다시 그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촬영이 다시 재개되었다. 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구경하자 잭이 포커스를 맞추며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이 모든 생각과 상황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학교에 다니기는 했지만 잭은 나보다 10살이 어렸다. 나는 34살에 직장을 관두고 유학을 한국인 여자였고, 잭은 24살, 갓 학부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온 미국인 남자였다. 잭은 또래 중에서도 촬영을 잘하고 아이디어도 넘치는 데다가, 굉장히 성실한 타입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함께 프로젝트를 했을 때도 내가 원하는 것을 영민하게 캐치해서 좋은 결과물을 냈기 때문에 졸업 작품의 파트너로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잭을 이성적으로 생각한 적도 없거니와 잭이 나를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어쩌면 잭의 얼굴이 매우 작고, 키도 작고, 아침마다 변함없이 스프레이로 세워 올린 금발의 머리가 지나치게 완벽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가끔 대화를 하면 잭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에 이상한 감정이 든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모든 것에 지나칠 정도로 집중하고 열중하는 그의 성향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게다가 잭이 크리스마스 때 데비와 하룻밤 자고 차 버린 것도 모두가 아는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에, 그 아이가 나에게 관심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이 동네에서는 토트넘 저지를 입고 돌아다니면 폭행을 당할 수도 있어.”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다시 펍이고, 늦은 오후이고, 내 앞에 있는 잔은 허니 위스키가 아닌 흑맥주이다. 펍 안에는 아스널 유니폼을 맞춰 입은 영국인 가족이 들어와 있었고, 아빠로 보이는 덩치 큰 남자가 어린아이들에게 펍을 보여주면서 아스널과 토트넘의 오랜 라이벌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보던 마크가 물었다.
“너도 혹시 토트넘 팬이야?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소니 때문에 토트넘 팬이라던데.”
“나는 사실 스포츠에는 관심이 없어. 월드컵 외에는 축구를 보지 않아.”
축구를 매우 좋아하던 전 남자친구를 따라 축구경기를 보기는 했지만 결국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다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이제 두 번째 만나는 사람에게 굳이 말해줄 필요가 없는 정보인 것 같았다. 심벌 소리가 크게 나면서 다시 대화가 끊겼다.
“귀가 찢어질 것 같아! “
내가 소리를 높여 얘기했다.
“다들 이 재미로 펍 라이브를 들으러 오는 것 같아!”라고 그가 외쳤다. 그 말에 동의를 하지 않았지만 끄덕였다.
밴드가 리허설을 시작했다. 드럼과 리드보컬 겸 기타리스트, 베이스 기타와 서브보컬, 3인조로 구성되어 있었고 셋 다 애써 기른 수염과 빗지 않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지만, 20대 초반의 곱상하고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 못하네. 마크는 입모양으로 말했다.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은 정장 재킷과 흘러내리는 청바지를 입고 선글라스를 머리에 끼고 있었는데, 연신 흡족해하며 아이폰으로 그들의 영상을 찍고 있었다. 연주는 엉성했고 노래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다. 리드 보컬리스트는 이안 커티스와 커트 코베인을 어설프게 따라 하는 듯한 몸짓으로 자기 멋에 취해 잔뜩 취해 노래를 불렀고, 드러머는 심취한 듯 눈을 감고 입을 벌리면서 연주를 했다. 비니를 쓴 베이스 기타는 덤덤하게 서서 연주를 했다. 같은 무대에 있지만 전혀 같은 음악을 연주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각자 하고 싶은 것을 연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귀를 찢는 사이렌과 같은 음악이 계속 이어졌다.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볼륨 레벨과 소리에 귀가 먹먹해졌지만 동시에 머릿속의 생각들이 비워지면서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드럼과 기타 소리가 지나치게 커서 그의 가사들이 전부 다 뭉개져서 들렸다. …love me…you were my one and only… one…. on the ground… 리드보컬 청년 위에만 초록색 조명이 켜졌다.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얼굴이 조그맣고 콧날이 날렵한 리드보컬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곱슬머리를 하고 체크 남방을 입고 있었다. 시체가 나오는 영화를 촬영하던 날, 나는 체크 남방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이 교차하는 체크 남방이었다. 잭은 촬영 후 펍에서, 사실은 자기도 거의 똑같이 생긴 남방이 있다며, 오늘 입으려고 했었는데 아침에 바꿔 입었다고 말했다. 입고 오지 그랬어. 그러면 커플룩이었을 텐데. 나는 그렇게 생각 없이 농담을 했었다. 어쩌면 그가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의식해서 장난을 친 것 같기도 하다. 그때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표정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내가 예상치 못한 표정이어서 어떻게 반응을 할지 약간은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났다. 나는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그가 사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쓰고 깊은 위스키와 상큼한 레몬의 맛과 달착지근한 꿀과 차가운 얼음이 결합돼서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정말 마음에 든다고, 앞으로 허니 잭과 레모네이드를 자주 마시게 될 것 같다고 얘기했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너의 졸업 작품에 같이 못하게 된 건 유감이야.”
“괜찮아, 네 잘못도 아니잖아. 어쩔 수 없으니까.”
“너희 잘못도 전혀 아니지. 그 사건으로 너희가 제일 피해를 본 거잖아. 왜 학교에서 그런 조치를 내렸는지 모르겠어. 과한 조치야. “
마크는 기네스잔을 만지작거리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지만, 나는 그게 정말 과한 조치였는 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두 달 전, 나와 영화학과 학생들은 졸업 작품의 미술감독을 찾기 위해 협력 학교인 마크의 학교를 방문했다. 모든 팀이 미술 감독을 찾기 위해 그들 앞에서 졸업 작품의 아이디어와 미장센을 설명했다. 우리 차례가 되서 앞에 나갔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사람은 앞 줄에 앉은, 키가 크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였다. 그는 발표를 하는 내내 나에게 눈을 떼지 않고 집중했고, 여러 질문을 던졌다. 그의 응시와, 기분 좋게 긴장한 나의 대응사이 일종의 전류가 흘렀다. 피칭을 마친 후에 마크는 다가와 작품에 매력을 느꼈다며 함께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고, 우리는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간간이 작품 아이디어와 무드보드에 대해서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막연한 예감이 조금씩 선명해질 무렵, 그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학교에서는 우리 학교 영화학과 학생들이랑 협업을 하지 못하도록 대대적인 금지령을 내렸다. 서로 연락도 하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마크는 따로 디엠을 보내 같이 작업을 못하게 된 것이 미안하니 술을 한 잔 사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 시끄러운 펍에서 일종의 데이트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 사람과는 평소에 잘 아는 사이였어? “
마크는 잭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다른 학교들로 금세 퍼져나간 그 사건에 대해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잭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캐고 싶어 했다. 나는 궁금증에 가득 부푼 표정들이 조금은 지겨웠고, 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미미한 사실들을 떠들고 싶지 않았다.
“글쎄. 그냥 친구였어. 아주 잘 알지는 못했던 거 같아.”
(3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