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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enam Kang Oct 12. 2020

퇴사했더니 퇴근하고 싶어졌다

몰입의 종료, ‘자기만의 방’에서 나오는 의식로서의 퇴근

회사 앞 지하철역 승강장에서의 고민(‘퇴근이 좋아 퇴사 못 할 거 같아’)을 떨쳐내고 퇴사했다. 바로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남편이 파견 근무를 하고 있는 미국 뉴욕으로 두 아이를 데리고 건너왔다.


80여 일만에 우리는 다시 단란한 4인 가구가 됐다. 우리 넷은 하루 세끼를 함께 먹고(남편은 재택근무를 한다), 하루에 한두 번 다함께 동네 공원을 산책한다. 남편이 쉬는 날이면 센트럴파크, 브루클린브릿지, 거버넌스 아일랜드 등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능한 뉴욕의 명소로 나들이 간다. 작은 아이는 아빠와 야구할 수 있어서, 큰 아이는 아빠와 ‘싸우기’ 놀이(침대에서 하는 일종의 레슬링)를 할 수 있어서 즐거워한다. 서울의 할머니, 할아버지, 학교, 친구들, 동네 분식집과 편의점이 아쉽긴 하지만.    


나도 대체로 만족스럽다. 육아와 살림을 전담한다고 해도 회사 나가는 것보다는 시간이 여유롭고 스트레스가 적다. 오랜만에 요리하는 것이 재밌어 거의 매일 다른 메뉴를 선보이며 깍두기까지 담갔다. “엄마 요리 최고!” 하며 엄지손가락 치켜세우며 맛있게 먹는 아이들과 남편 모습을 보며 뿌듯하다. 또 뉴욕은 내가 선망해온 도시다. 아이들이 등교한 사이 혼자 뉴욕 거리를 거니는 것을 호사라고 느낀다(코로나 팬데믹으로 주 2~3회만 등교하지만). 영어가 서툰 작은아이의 온라인 수업을 보조교사 겸 동시통역사가 돼 봐주면서 내 손으로 내 아이를 돌본다는 안정감을 느낀다.  




하루 두 시간, 방해 받지 않을 권리   


Edward Hopper, Morning Sun (1952). Courtesy of the Columbus Museum of Art.


뉴욕에 온 지 한 달쯤 된 날이었다. 빨래를 개어 옷장에 넣으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책상에 앉아 일하고 있었다(방이 두 개뿐이라서 안방이 침실 겸 남편의 집무실이다). 남편이 일하는 중에는 되도록 말조차 걸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날은 굳이 남편이 아니더라도 꼭 밖으로 내뱉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나, 퇴근하고 싶어서 취직하고 싶어. 이게 뭔 말인지 알겠어?”     


남편은 하던 일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막상 말해놓고 나니 내가 생각해도 엉뚱한 말이어서 민망한 기분에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돈을 벌고 싶다거나, 자아실현을 하고 싶다거나,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게 아니라 퇴근하고 싶어 회사 나가고 싶다니….


하지만 이 날 이후 내가 한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왜 퇴근하고 싶은 걸까? 왜 퇴근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걸까? 18년간의 직장 생활 동안 퇴근이 대체 무슨 의미였기에?   

  

퇴사 전, 생애 첫 전업주부 라이프를 앞두고 시간 사용(Time Use) 연구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은 친구 J에게 조언을 구했다. 전업주부로서 행복한 삶을 누리려면 시간 사용을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내 질문에 J는 갖은 잔소리(“뭐든 찾아서 공부해라”) 끝에 처방전을 써줬다.


“하루 두 시간, 자신만의 시간을 확보하세요. 그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생활 만족도가 높을 거예요.”


하루 두 시간의 시간 확보는 의외로 수월했다. 두 아이는 12살, 8살이다. 더는 ‘밀착육아’를 할 필요가 없다. 아이들이 TV를 보거나 게임하거나 놀이터에서 놀 때, 또 잠들고 나면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이들이 엄마를 찾지 않을 때는 집안일에 손을 놓고 책 읽고, 글 쓰고, 신문 읽고, 자료 찾는 등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러다 작은 아이가 “엄마, 나 심심해. 놀아줘” 하면 그제서야 “엄마 이제 밥해야해. 형이랑 놀아”, “아차, 엄마 마트 가서 사올 게 있다!" 하고 (영악하게) 도망쳤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그 두 시간이 끊김 없는 두 시간이 아니라, 파편화된 두 시간이라는 거다. 한창 신문 읽고 있는데 작은 아이가 “엄마, 나 배고파. 점심 언제 먹어?” 하고, 작은 아이가 아빠와 야구하러 나가길래 ‘이제 좀 혼자 있어볼까’ 하면 큰 아이가 자기 방에서 나와 “엄마, 은수 아빠랑 어디 갔어? 야구하러 갔어? 엄마 뭐해? 엄마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 하고 재잘댔다. 거실 1인용 소파에 양반다리 하고 앉아 노트북을 켜면 두 아이가 양쪽에 매달려 “엄마, 뭐해? 엄마 글 써? 무슨 글인데? 엄마 구독자 몇 명이야? 나도 구독하면 안 돼?” 하고 질문을 쏟아냈다.


아이들이 잠들고 혼자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켜면 이번에는 한국 시각 맞춰 일하던 남편이 잠깐 짬이 났다며 방문 열고 나와 부엌에서 야식거리를 꺼내고 거실 TV를 틀었다. 내 노트북 화면을 흘끔흘끔 쳐다보다가 눈빛 레이저를 맞으면 “아, 안 볼게. 안 보면 되잖아” 했다. 이 정도 되면 그냥 노트북을 닫아버리게 된다.

    

회사에선 안 그랬다. 일하고 있으면 아무도 안 건드렸다. 건드린다면 그 역시 일에 관한 것이어서 용인의 대상이었다. 우르르 점심식사 하러 나갈 때 “저는 하던 일 마저 하고 따로 먹겠습니다” 하면 “넌 대체 왜 그러냐”고 시비 거는 사람도 없었다. 아무도 내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지 않았다(적어도 드러내놓고는). 동료끼리의 잡담은 회사 생활의 윤활유지만, 그것도 분위기와 때를 따져가며 하는 거였다.      





몰입, 행복보다 좋은 것    

 


‘뭔가에 몰입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잊고 더 없이 평화로운 기분에 젖어든다. 칙센트미하이의 주장에 따르면 몰입은 행복보다 더 좋은 것이다. 그리고 몰입을 하려면 ‘온전한 집중’과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  - 브릿지 슐츠, ‘타임푸어’     


‘타임푸어’에서 유명한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저자 브릿지 슐츠와의 인터뷰에서 여자들은 실제로 몰입할 시간을 가질 기회가 부족할 뿐 아니라 애초에 몰입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몰입에 관해 강연할 때 ‘하지만 뭔가에 몰입할 때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나요? 지금 하고 있는 일 외에 다른 걸 다 잊어버리게 되잖아요. 그건 나의 다른 책임을 방기하는 게 아닐까요?’ 라는 질문이 꼭 나오는데,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거의 100% 여자라고 한다.  


이 책을 작은 아이가 한돌 반일 때 밑줄 그어가며 읽었다. 유치원생인 큰 아이와 이제 막 뛰어다니기 시작한 작은 아이를 돌보며 회사 다니느라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고, 자식이 없을 때나 하나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 부족에 시달리던 시절이었다. ‘지금 퇴근하지 말고 더 일하고픈’ 욕망을 느끼는 내 자신에 대한 죄책감도 자주 느꼈다. 몰입은 그만큼 내 삶의 중요한 가치였지만 원하는 만큼 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 거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하려고 한 것이.


‘2시간 몰입’은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일벌레로 살아온 세월이 20년 가까이나 되는데, 수시로 방해 받고 파편화된 ‘나만의 시간’만 갖다보니 퇴근하고 싶은 거였다. 퇴근이란 몰입의 종료다. 몰입의 종료는 몰입하는 시간을, 행복 이상의 시간을 보냈다는 증거이고.


칙센트미하이의 말대로 몰입하려면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만의 방’이 필요하다. 물론 일개 취재기자인 내가 회사에서 방을 가졌을 리 만무하다. 내 책상과 의자, 서랍장이 있었을 뿐. 하지만 그곳은 어른의 세계여서 벽으로 둘러쳐 있지 않더라도 아무도 남의 책상과 의자를 침범하지 않았다.


뉴욕 집에 나만의 공간은 없다. 남편에겐 자신의 책상이 있고, 아빠가 일하는 시간에는 방해해선 안 된다는 룰을 누린다. 큰 아이에게도 자기 책상과 침대(이층침대의 아래 칸)가 있다. 슬슬 사춘기로 접어드는 큰 아이는 방문 닫고 책상에 앉아 상상의 지도를 그리거나 자기 침대에 엎드려 책 읽고 만화 보기를 즐긴다. 작은 아이는 아직 자기만의 공간을 요구하진 않지만, 자기 침대(이층침대의 위 칸)에 형이 올라오거나 형의 물건이 놓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만의 공간은? “부엌이 있잖아” 하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 사람을 평생 미워할 테다.


회사 다닐 땐 집에 나만의 공간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집에 있는 시간은 짧고 회사에 내 자리가 있으니까. 퇴근은 몰입의 시간을 가진 뒤 자기만의 방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자기만의 방이 있는 사람만 퇴근을 한다.


“퇴근하고 싶어 출근하고 싶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것 같다. 나는 몰입이 가능한 시간과 공간이 고프다. 지금까지는 학교와 회사가 그 역할을 해줬다. 학교는 마쳤고 회사는 떠난 지금, 몰입을 가능하게 할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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