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트로 부티크(Etro Boutique)를 지나 펜디(Fendi)와 디올(Dior) 숍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자, 길 건너 카페에 가서 14달러,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1만6000원짜리 커피를 마셔보는 거야. 명품은 안(못) 사도 커피 한 잔의 ‘스몰 럭셔리’는 누려볼 만 하잖아?
카페 메뉴판을 죽 훑어보는데, 인스타그램에서 구경한 14달러짜리 ‘히코리 스모크 스모어 라테’(Hickory-Smoked S'mores Latte)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10달러짜리 ‘에스프레소 토닉’(Felix's Espresso Tonic)이 올라와 있다.
“에스프레스 토닉이 뭔가요?”
“에스프레소에 저희가 만든 토닉 워터, 라임과 카다멈(cardamom)을 넣은 거예요.”
“아 네…. 그냥 라테 한 잔 주세요. 우유는 넛(nut) 밀크로 할게요.”
https://www.instagram.com/felixroastingco
여기는 소호의 커피숍 펠릭스(Felix Roasting Co.). ‘럭셔리 커피’를 표방하며 2018년 등장해 단박에 뉴욕을 대표하는 인스타그래머블 카페로 등극한 곳이다. 청록색과 분홍색을 메인 컬러로 삼아 꽃무늬 벽지를 손수 그려 붙였고, 500여 개 타일로 된 벽 그림을 만들었다. 별 모양의 테라조(terrazzo) 타일 바닥, 그리고 이 바닥과 디자인적으로 통일성을 갖는 테이크아웃 커피컵. 중앙에는 묵직한 느낌의 원형 목재 커피바가 놓였다. 흡사 프랑스 궁전을 모티브로 한 고급 부티크 호텔 같다. ‘쿨한 투박함’을 지향하는 요즘 커피숍들과는 완전 딴 세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팬데믹 시대. 실내 영업이 금지된 탓에 펠릭스의 럭셔리 공간은 빛을 잃고 말았다. 펠릭스는 미드타운의 첫 매장을 임시 휴업하고 지난 9월 소호에 야외 공간을 갖춘 두 번째 매장을 열었다. 10월 들어 제한적 실내 영업이 허용됐음에도 뉴욕 카페들은 여전히 테이크아웃 영업만 한다. 펠릭스도 마찬가지다.
2018년 펠릭스가 영업을 개시하면서 내놓은 시그니쳐 메뉴, 히코리 스모크 스모어 라테는 ‘정말 이게 커피라고?’ 하는 말이 절로 나오는 희한한 커피다. 설명에 따르면 다크 초콜릿과 부순 크래커로 장식한 칵테일 잔에 에스프레소와 우유를 따른다. 그리고 종 모양의 유리 항아리에 넣고 히코리나무를 태워 연기를 씌운다. 마지막으로 소금에 절인 수제 카라멜 마시멜로를 살짝 녹여 히코리 나뭇가지와 함께 잔에 얹는다. 인스타그램을 검색해보면 이 커피를 정성스레 찍은 사진과 동영상이 한가득 나온다. 14달러짜리 커피를 사마시는 사람들이 실재하는 것이다!
바리스타는 카페 문 연지 얼마 안 돼 히코리 스모크 스모어 라테는 아직 개시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개시한다 한들 이렇게 비싸고 비주얼 남다른 커피는 실내조명 아래에서 사진 찍어야 하는데, 일회용 커피컵에 담아 갖고 나가야 하는 요즘 과연 누가 사마실까 싶다.
그렇다고 증류식 소주 마실 때 섞어 마시곤 했던 토닉워터를 오전 10시의 모닝커피에 넣어먹긴 어색해서 '노멀하게' 라테를 주문했다. 럭셔리를 실천하지 못한 아쉬움(?)에 1달러를 추가해 넛 밀크로 바꿔봤다. 파란 색 바탕에 별 무늬가 팝아트처럼 그려졌고 가운데 금박 로고가 새겨진 일회용 커피컵은 예뻤다. 보통 커피숍은 컵 뚜껑을 셀프로 챙겨가도록 하는데, 여기서는 도자기 접시에 컵 뚜껑 하나를 살포시 올려 건네주는 것이 대접 받는다는 느낌을 주었다. 라테는 넛 밀크 덕에 고소했지만, 크게 인상 깊은 맛은 아니었다. 스타벅스보다 맛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며 잠시 둘러본 실내는 사진으로 본 미드타운의 그것과 흡사했다. 청록색 소파에 분홍색 스툴, 금색 테두리의 테이블, 귀족(혹은 왕족)의 초상화, 화려한 상들리에 등등. 하지만 사람의 온기가 없는 럭셔리는 어정쩡하고 쓸쓸했다. 분홍색과 금색으로 치장한 커피바에는 플라스틱통에 든 손소독제가 놓여 있었다. 슬픈 부조화였다.
그나마 야외 테이블에 열 명 남짓의 손님이 있어서 ‘살아있는’ 카페 분위기를 냈다. 요즘 맨해튼 식당들은 차별화된 야외 좌석으로 승부하는 중이다. 어퍼웨스트의 한 레스토랑은 야외 테이블을 아예 거대한 버블(비닐로 만든 구형 구조물) 안에 넣어 화제몰이를 했다. 펠릭스의 야외 공간도 순위에 들 만하다. 초록, 분홍, 노랑, 하얀색이 배색된 파라솔엔 솔까지 달려 발랄한 예쁨을 발산했다. 의자에는 꽃무늬 방석을 정성스레 씌웠다. 밝은 청록색 펜스에 초록 식물도 한가득 심어놨다. 발리 해변의 럭셔리 리조트 같은 모습이다. 지정학적(?) 위치상 명품 쇼핑백 몇 개를 내려놓고 커피 마시면 딱 좋은 분위기인데, 아직 이른 시간이라 쇼핑족은 없었다. 대신 개를 끌고 온 동네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었다.
호텔리어와 디자이너가 만든 '민주적 럭셔리 프로젝트'
호텔 휴고와 켄 펄크의 홈페이지
펠릭스의 창업자는 매트 모이니안(Matt Moinian). 2014년 소호의 고급 부티크 호텔 ‘호텔 휴고’(Hotel Hugo)를 성공시킨 호텔리어 출신이다. 그는 호텔 휴고 이후 커피숍 창업에 관심이 생겼고, 몇 년간의 절치부심 끝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켄 펄크(Ken Fulk), 커피 프로페셔널 레이건 페트렌(Reagan Petrehn)과 팀을 이뤄 펠릭스를 런칭했다고 한다. 초절정으로 화려한 커피숍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호텔리어와 디자이너를 엄마, 아빠로 두고 있는 셈이었다.
펠릭스의 포부는 거창하다. 자신의 럭셔리한 공간을 통해 ‘손님을 한 단계 더 깊은 우주로 끌어들이고자 (to pull our geusts one level deeper into our universe)’ 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우주적 럭셔리’를 경험하기 위해서 럭셔리한 값을 치러야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펠릭스의 시그니쳐 메뉴는 14달러나 되지만, 일반 커피 메뉴의 값은 뉴욕의 여타 커피숍과 비슷한 수준이다. 아메리카노 3.5달러, 라테 4.75달러로 블루보틀과 같거나 약간 저렴하다. 모이니안은 럭셔리는 값비싼 물건이 아니라, 공간과 서비스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펠릭스를 ‘민주적인 럭셔리 프로젝트’라고 명명한다. 커피 한 잔의 가격으로 럭셔리한 경험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다.
하지만 '커피 한 잔의 럭셔리'가 실현되려면 코로나가 없어야 한다. 전염병의 대유행이 진행되는 한, 장인 정신으로 정성스럽게 꾸민 실내 공간을 마음껏 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사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를 즐기던 사람들은 팬데믹 이후 좋은 원두를 주문해 집에서 직접 내려 마시기 시작했다. 아직 뉴욕(특히 맨해튼)은 사정이 괜찮은 편이지만, 미국은 코로나 대유행이 3차 파동으로 접어드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까지 펠릭스가 버틸 수 있을까. 럭셔리한 카페든, 낡은 탁자에 스툴 몇 개 갖다놓은 막카페든 실내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커피 마실 수 있는 날이 오긴 올까, 언제 올까. 펠릭스의 럭셔리 커피 프로젝트가 롱런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카페들이 추구해야 할 것은 '공간'보다는 '원두'임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꽤 차가워진 가을 바람에 흔들대는 펠릭스의 발리풍 파라솔을 보며 이러한 생각을 했다.